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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향교

향교의 개요

예산향교(禮山鄕校)_전경(정면)

예산향교(禮山鄕校)_전경(정면)

예산향교(禮山鄕校)는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향천리에 있는 향교이며, 1997년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현에서 동쪽으로 1리 떨어져 있다[在縣東一里].”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원래 예산향교는 지금보다 북쪽 계곡으로 1㎞ 정도 위쪽[예산읍 관작리와 석양리 사이]에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그곳에서 당시의 향교 흔적을 보여 주는 유적이나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예산향교는 조선 시대 지방의 관립 교육기관으로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하여 배향하고, 지방민을 교육하고 교화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를 실시함에 따라 교육 기능은 점차 사라지고,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에 석전제(釋奠祭)를 올리고, 매 삭망일(朔望日)에 향전 의식을 봉행하고 있다. 예산향교는 조선 전기에 건립된 향교로서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으나 그 형태와 역사를 잘 보존하고 있다. 또한 문서와 현판, 운영 관련 절목(節目) 등이 많이 남아 있어 향교가 운영되어 온 실상과 당시 지역민들과의 관계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예산향교_전경(우측)

예산향교_전경(우측)

향교의 변천

예산향교는 다른 향교와 마찬가지로 조선 초기 각 지방 군현에 향교가 건립되기 시작한 1413년(태종 13)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여러 차례 중‧보수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자료로 남아 있는 최초의 중수(重修) 기록은 『학교등록(學校謄錄)』의 1684년(숙종 10) 기사이다. 당시 화재로 인해 대성전(大成殿)과 5성(聖) 8현(賢)의 위판(位版)이 소실되었고, 화재에 대한 책임으로 예산 현감(禮山縣監)을 징계했다는 기록이다. 이와 관련된 내용이 『숙종실록(肅宗實錄)』 1684년 7월 10일조 기사에도 실려 있다. 이후 1720년(숙종 46) 『학교등록』 기사에 예산향교의 대성전과 동무(東廡)·서무(西廡)에 비가 새어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의 중수 기록은 현판의 중수기(重修記)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1785년(정조 9) 「대성전중수기」[현감 권기헌(權基憲) 찬]에는 당시 재정이 어려웠던 상황에서 유생들과 지역 인사들이 힘을 모아 중수에 나섰다는 기록이 있고, 1812년(순조 12) 「향교중수기」[현감 이순겸(李純謙) 기]를 보면, 대성전과 명륜당(明倫堂)이 황폐하여 3개월간 공사를 하였고, 이때 향교의 제기(祭器)와 학전(學田)을 마련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1857년(철종 8) 「문묘중수기」[현감 조희갑(趙羲甲) 식]에는 대성전이 비가 샐 정도로 무너져 유생들과 함께 천금을 모아 봄부터 가을까지 전각(殿閣), 당계(堂階), 담장, 명륜당, 서재실, 그리고 상탁(床卓)과 제기를 수리·보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1883년(고종 20)의 소규모 중수에 대한 기록이 1899년(고종 36) 『향교서재금록(鄕校西齋襟錄)』에 실려 있고, 1888년(고종 25) 『흥학절목(興學節目)』에는 그해 2월 현감 이시우(李時宇)가 대성전과 동재(東齋)·서재(西齋)를 중수하고, 자신의 봉름(俸廩) 18석을 지원하여 거접(居接) 비용으로 사용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일제강점기의 중수 기록은 자세하지 않다. 해방 이후에는 1975년에 동재 중수, 1976년 서재 중수, 1977년 내삼문(內三門) 중수, 1983년 내삼문, 계단, 축대, 담장 및 교궁(校宮) 경내 개수가 이루어졌고, 1995년 향교 중수를 거친 뒤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향교의 형태와 구조물

예산향교는 구릉지에 위치하여 마을을 앞에 두고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전면에 강학(講學) 공간을 두고 후면에 묘당(廟堂) 공간을 배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 방식으로 구릉지의 일반적인 배치 형태를 보여 준다.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으며 외삼문(外三門)을 세우지 않은 채 높은 계단을 두었고, 계단을 오르면 가운데 명륜당이 있고 좌우에 동재와 서재의 측면이 명륜당과 열을 맞추고 있다. 명륜당과 동재 사이의 중문을 통해 향교 내부로 들어서면, 명륜당 후정(後庭)이 나오고 후정의 양쪽으로 동재와 서재가 마주 보고 배치되어 있다. 명륜당과 동재·서재는 전면에서 보았을 때 ⊔자 모양을 하고 있다. 후정을 지나면 다시 높은 계단이 나오고, 바로 앞 내삼문을 통과하면 한 단을 높인 대지 위에 대성전이 세워져 있다. 대성전 주변은 내삼문을 중심에 두고 양쪽으로 담으로 둘러 일곽(一廓)을 이루었다.

예산향교_상공

예산향교_상공

대성전에는 공자(孔子)의 위패와 중국의 5성(聖) 4현(賢)의 위패, 그리고 우리나라 18현(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전면열은 퇴칸이고 후면 2열은 내부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1고주(高柱) 5량집 구조이고 정면만 겹처마로 된 맞배지붕이며, 공포는 외일출목 2익공 형식이다. 건물 내외부의 단청은 일반적으로 모루단청을 하는 것과 달리 옥색과 단홍색으로 소박하게 가칠단청을 하였다.

예산향교_대성전(정면)

예산향교_대성전(정면)

예산향교_대성전(좌측)

예산향교_대성전(좌측)

예산향교_대성전(우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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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향교_대성전(신위)

예산향교_대성전(신위)

예산향교_신위(좌측)

예산향교_신위(좌측)

예산향교_신위(우측)

예산향교_신위(우측)

명륜당은 교생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던 장소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이고 내부공간은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다. 가구(架構)는 무고주(無高柱) 5량집 구조이며 겹처마에 맞배지붕이다. 경사지를 이용해 건물을 배치한 구조여서 전면이 높은데, 전면을 누각으로 처리하는 대신 벽을 쌓아 처리하였다. 건물 단청은 금단청과 그림을 넣은 고분단청을 하여 화려한 모습이다.

예산향교_명륜당(정면)

예산향교_명륜당(정면)

예산향교_명륜당(후면)

예산향교_명륜당(후면)

동재와 서재는 학생들의 숙소나 학습장소로 쓰였지만, 예산향교에서는 관리인들의 거처인 수직사(守直舍)로 사용하였다. 동재는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정면에서 서쪽으로 2개는 큰 온돌방이고, 동쪽 2칸은 부엌과 창고이다. 온돌방 앞의 반 칸은 툇마루를 두어 널마루를 깔아 놓았다. 1고주 5량집 구조로, 홑처마에 한쪽은 팔작지붕, 다른 한쪽은 맞배지붕이다. 서재는 동재의 맞은편에 대칭 구조를 하고 있는데, 방의 구조는 조금씩 다르다.

예산향교_동재(좌측)

예산향교_동재(좌측)

예산향교_서재(우측)

예산향교_서재(우측)

내삼문은 대성전 앞에 세워져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의 솟을삼문이다. 겹처마로 지붕을 만들고, 명륜당과 같이 금단청에 고분단청을 그려 넣어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다.

예산향교_내삼문(정면)

예산향교_내삼문(정면)

예산향교_내삼문(좌측)

예산향교_내삼문(좌측)

향교의 기록자료

예산향교에 소장된 기록물에는 교생 및 유생의 명부인 『청금록(靑衿錄)』과 『향교서재금록(鄕校西齋襟錄)』, 향교의 운영 방식과 체제에 관한 각종 절목, 그리고 중수와 관련된 현판류가 전하고 있다.


『청금록』은 1890년(고종 27) 정월에 예산향교에서 작성한 유안(儒案)이다. 유생 명단을 성명, 자, 호, 생년, 본관, 임원 유무 등을 열거하며 수록하였다. 이교직(李敎稙)부터 총 51명이 기록되어 있으며 성씨는 전주이씨(全州李氏), 영산신씨(靈山辛氏), 한산이씨(韓山李氏) 등 다양하게 나타난다. 전반부에는 유생들의 인적 사항을 기록하였고, 후반부는 향교 재임 명단을 기록하고 있다. 내용상 여러 번 필체가 바뀐 점으로 보아 여러 대에 걸쳐 이어서 작성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예산향교_청금록(표지)

예산향교_청금록(표지)

예산향교_청금록(내용)

예산향교_청금록(내용)

예산향교에서는 향교 운영 관련 절목 등의 자료를 함(函)에 별도로 보관해 오고 있다. 『흥학절목(興學節目)』을 비롯한 절목류와 『향교서재금록(鄕校西齋襟錄)』, 그리고 「대제홀기(大祭笏記)」 등이다. 『흥학절목』은 1888년(고종 25) 2월 예산현에서 예산향교에 발급한 절목이다. 서문은 도유사 이교식(李敎植)이 예산향교의 유래를 작성하였고, 이어 예산현에서 예산향교에 지원한 비용 등을 규정한 절목이 있다. 권말에 경자년 8월에 작성한 서재의 청금록이 수록되어 있다. 이외에 1886년(고종 23)년에 작성된 『재회운영절목(齋會運營節目)』과 1888년(고종 2)에 작성된 『교중주방폐단절목(校中廚房弊端節目)』이 함께 보관되어 있다. 『향교서재금록』은 1899년 최종 작성된 교생안(校生案)으로 김제은(金濟殷)부터 방재근(方在根)까지 총 92명의 서재 유생의 성명이 적혀 있다. 명단에는 도할(刀割)과 대자(代子) 등 변동사항이 적혀 있고, 명단 뒤에는 절목류가 첨부되어 있어 예산향교 재정 운영의 실상을 살필 수 있다. 「대제홀기」는 예산향교에서 있었던 추계 석전대제((釋奠大祭) 때 사용했던 홀기(笏記)이다. 기미년 8월 5일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홀기는 집회·제례 등의 의식에서 그 진행 순서를 적어 낭독하게 하는 의례문서이다. 해당 문서는 진행 순서와 의례 방식이 적힌 홀기와 축문 서식이 수록된 형태로 구성되었다.

예산향교_향교 운영 관련 절목 등 일괄

예산향교_향교 운영 관련 절목 등 일괄

「향교중수기(鄕校重修記)」는 1888년(고종 25) 2월 지현(知縣) 이시우(李時宇)가 작성한 예산향교 중수기(重修記)이다. 1887년(고종 24) 현감으로 부임한 이시우는 오산현(烏山縣) 동쪽에 있던 향교 건물들이 무너지려 하여 강학을 할 수 없게 되자 지역 유생들과 의논하여 대성전과 동재‧서재를 보수하였다. 현판에 그 내력이 적혀 있고, 그 밖에도 7개의 현판류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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