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국학이야기

퇴계종가

종가의 역사와 규모

퇴계종택(退溪宗宅)은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1982년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종택 옆으로는 퇴계 선생 호의 연원이 된 퇴계(退溪)가 흐르고, 뒤로는 도산서원(陶山書院)이 자리 잡고 있다.


처음 퇴계종택을 지은 사람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손자 이안도(李安道, 1541~1584)이다. 이안도는 퇴계가 50세에 고향에 내려와 터를 잡았던 한서암(寒棲庵) 남쪽에 종택을 지었다. 그 뒤 창설재(蒼雪齋) 권두경(權斗經, 1654~1725)이 종택을 옮겼고, 이후 10세손 이휘녕(李彙寧, 1788~1861)이 옛 종택의 동남쪽 건너편에 다시 집을 짓고 살았는데, 1907년 일제가 두 종택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11세손 이만도(李晩燾, 1842~1910)가 의병대장으로 나선 것에 대한 응징이었다. 현재의 종택은 1926년 상주의 도남단소(道南壇所, 현재의 도남서원)에서 발의하여 1929년에 재건된 것으로 13세손 이충호(李忠鎬, 1872~1951)가 옛 종택의 규모를 참작하여 완성하였다.

퇴계종택(退溪宗宅)

퇴계종택(退溪宗宅)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

종택은 총 34칸의 건물로 중앙의 ㅁ자형 본채와 오른쪽의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 그리고 뒤쪽의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종택에 들어서면 솟을대문 양쪽에 행랑채가 있고, 행랑채로 통하는 솟을대문 위에는 퇴계의 손부 안동권씨(安東權氏)에게 내려진 정려(旌閭)가 걸려 있다. 대문 안쪽으로 보이는 사랑채는 정면 7칸, 측면 2칸으로 툇마루, 사랑 마루방, 사랑방, 책방 등이 있다. 양쪽으로 동 익사와 서 익사가 있어 안채와 연결된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건넌방과 양개문으로 통하게 된 방들이 있다.


퇴계종택에는 오른쪽에 따로 솟을대문을 두고 있는데, 바로 추월한수정으로 통하는 문이다. 추월한수정은 1715년(숙종 41) 도산서원 원장을 맡은 권두경이 세운 정자이다. 권두경은 퇴계의 도학을 드러내고자 이 정자를 짓고, 이곳이 도학의 본산임을 알리는 ‘도학연원방(道學淵源坊)’ 현판을 걸었다. ‘추월한수(秋月寒水)’는 주자(朱子)의 시 「재거감흥(齋居感興)」에 “공손히 생각건대, 성인의 심법은 천년의 시공을 넘어 차가운 물에 비치는 가을 달빛이라[恭惟千載心 秋月照寒水]”에서 유래한 것으로 성인의 마음은 가을 달빛이 비치는 차고 맑은 물과 같다고 비유한 것이다. 권두경은 서원 근처에 이 정자를 건립하고 종택을 지금의 자리로 옮겨 퇴계종택의 모습을 새롭게 갖추었다.

종가와 인물

퇴계 종가에서 불천위(不遷位)로 모시고 있는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은 조선의 성리학을 체계화한 대학자이다. 성균관 대사성(成均館 大司成), 대제학(大提學), 지경연(知經筵) 등을 역임하였고,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그는 서른넷의 늦은 나이에 과거에 합격했지만 출세에 뜻이 없어 여러 차례 관직을 사퇴하거나 응하지 않고, 평생을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사상적으로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과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하며, 주자의 이론을 더욱 발전시켜 ‘동방의 주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의 학맥을 이은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 등이 주리론(主理論)을 계승하며, 영남학파를 형성하여 조선 성리학의 한 축을 이루게 되었다.


퇴계 종가의 사람들은 퇴계의 학문을 가학으로 삼아 퇴계의 삶과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였다.


퇴계의 장손인 몽재(蒙齋) 이안도(李安道, 1541~1584)는 퇴계에게 직접 학문을 배워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던 인물이다. 퇴계의 학문과 덕행을 밝히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아 퇴계의 문집과 연보를 만들고 『성학십도(聖學十圖)』를 교정하였다. 그의 문집 『몽재집(蒙齋集)』에는 퇴계의 언행에 관한 「선생언행차록(先生言行箚錄)」과 「가정잡록(家庭雜錄)」, 그리고 퇴계의 임종 전 모습을 기록한 「고종기(考終記)」가 수록되어 있다. 조부의 유지를 받들고자 했던 그의 면모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에 비유될 만하다

퇴계의 6대 종손 이수겸(李守謙, 1674~1739)은 도산서원 원장 권두경이 추월한수정을 지을 때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퇴계가 살던 집터가 다른 가문에 넘어가 있던 것을 찾아오고, 70여 년 전의 일을 고문서에서 찾아 추월한수정의 축조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 추월한수정의 건립은 퇴계종택을 도산서원 근처로 이전하여 퇴계의 학문을 선양했다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수겸은 1728년(영조 4) 무신란(戊申亂)이 일어났을 때 의병대장으로 나서기도 하였다. 비록 반란군이 진압되어 군대를 일으키지는 못했지만, 현실 문제에 적극적이었던 퇴계의 뜻을 이어받은 것을 알 수 있다.


퇴계의 10대 종손 고계(古溪) 이휘녕(李彙寧, 1788~1861)은 오랫동안 관직에 있으면서도 가학을 계승하고자 학문에 주력했던 인물이다. 퇴계의 성리학에 전심하여 『십도집설(十圖集說)』을 통해 퇴계의 『성학십도』를 고증하고, 『퇴계선생예설유편(退溪先生禮說類編)』을 남겼다. 또, 퇴계를 중심으로 「팔고조도(八高祖圖)」를 그려 시조로부터 17세손까지의 계통을 밝히고 있다. 이휘녕은 향촌과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보여 병산서원의 『여강지(廬江志)』 편찬을 반대하거나, 국정 현안에 관한 상소를 여러 차례 올리기도 하였다.

퇴계 관련 기록자료

퇴계가 남긴 저작들과 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기록들은 퇴계종택과 도산서원에 보존되어 전해져 왔다. 그리고 현재 자료들 대부분은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 보관되어 『국학자료 목록집(상)』 「진성이씨 상계종택」 편에 고서 116종 792책, 고문서 258점이 자료로 정리되어 있다.


「퇴계선생문집 목판(退溪先生文集 木板)」은 1600년(선조 33) 도산서원에서 간행된 『퇴계선생문집』(경자본) 초간본을 인출해 낸 책판이다. 모두 1,075장이 판각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는 709장만이 남아 있다. 『퇴계선생문집』은 조선 중기 성리학을 독자적인 학문 체계로 수립한 퇴계의 학문관, 문학관 연구와 성리학의 사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이와 함께 「퇴계선생문집 목판」은 판본학적으로 귀중할 뿐 아니라 서지학 연구와 조선 중기 목판인쇄 문화연구에 중요한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두 자료는 2016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되었다.

퇴계 종가에 보존되어 온 다양한 판본의 문집 가운데에는 필사본으로 전하는 상계본(上溪本) 『퇴계집(退溪集)』이 있다. 1910년 이후 후손들에 의해서 편찬된 것으로 전한다. 이 본은 1869년(고종 6) 편찬한 필사본인 번남본(樊南本)을 대본으로 하여 도산서원 광명실(光明室)에 소장된 미수록 시문과 새로 발굴된 시문을 추가 정리한 것이다. 모두 96권 39책으로 편찬되어 도산서원 상계 광명실(光明室)에 보관되어 왔으나, 6.25 전쟁 때 일부가 유실되었다.


『선생문집개간일기(先生文集改刊日記)』는 1877년(고종 14) 퇴계의 문집을 보충해서 개간할 당시의 과정을 기록한 일기이다. 1877년 1월 5일부터 8월 12일까지의 기록으로 모두 32면이며, 해서와 행서‧초서를 섞어서 쓴 필사본이다. 『퇴계집』은 1600년(선조 33) 도산서원에서 목판으로 처음 간행한 후 세 번의 개간이 이루어졌다. 이 일기 자료는 이이순(李頤淳), 김갑련(金甲鍊) 등 58명이 모여 개간을 의논한 일부터 문집을 간행하기 위한 진행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선생문집개간일기1

선생문집개간일기1

퇴계가 남긴 저술 중에는 68세에 벼슬에서 물러나며 올린 특별한 상소문이 있다. 1568년(선조 1) 12월, 국왕에게 올린 『진성학십도차병도(進聖學十圖箚幷圖)』, 즉 『성학십도(聖學十圖)』가 그것이다. 성학(聖學)』은 제왕학(帝王學)을 말하는 것으로, 태극도(太極圖)·서명도(西銘圖)·소학도(小學圖) 등 10개의 도표를 가지고 군왕의 도에 관한 학문의 요체를 해설하고 있다. 퇴계는 17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선조가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푸는 성군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이 글을 올렸다.

성학십도(聖學十圖) 책판

성학십도(聖學十圖) 책판

퇴계는 자신의 인격 수양을 위해 유교 경전의 명구를 직접 써서 좌우명으로 삼았는데 「잠(箴)」에 해당하는 그 서판이 도산서원에 남아 있다. 경(敬)을 이루기 위한 실천 덕목으로 『논어(論語)』, 『중용(中庸)』, 『대학(大學)』, 『예기(禮記)』에서 각각 뽑은 ‘사무사(思無邪) 신기독(愼其獨) 무자기(毋自欺) 무불경(毋不敬)’ 3언(言) 12자(字)가 그것이다. ‘생각에 사특함이 없게 하고, 홀로 있을 때를 삼가며, 스스로를 속이지 말고, 공경하지 않음이 없게 하라’는 이 글귀를 벽에 붙여놓고 퇴계는 늘 마음에 새기고 실천했다고 한다.

사무사 서판(思無邪 書板)

사무사 서판(思無邪 書板)

무자기 서판(毋自欺 書板)

무자기 서판(毋自欺 書板)

종가의 고문서 기록자료

종가에 전해져온 고문서에는 퇴계의 자기 수양의 경지를 엿볼 수 있는 「유계(遺戒)」가 있다. 퇴계는 자신의 병세가 위중해지자 조카 이영(李寗)에게 자신이 죽은 뒤 처리할 일에 관하여 유계를 받아 적게 하였다. 그리고 사흘 뒤인 1570년(선조 3) 12월 8일, 누운 자리를 정리한 뒤 일어나 앉아 편안히 세상을 떠났다. 퇴계가 세상을 떠난 후 공개된 유계의 내용을 보면, 자신의 장례를 검소하게 치르기를 바라는 마음과 조상과 자손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퇴계(退溪)의 유계(遺戒)

퇴계(退溪)의 유계(遺戒)

문순공 시호 교지(文純公 諡號 敎旨)

문순공 시호 교지(文純公 諡號 敎旨)

퇴계가 문순공(文純公)의 시호(諡號)를 받은 것은 세상을 뜬 지 6년 뒤인 1576년(선조 9) 일이다. 그때 선조가 내린 교지가 종가에 보존되어 왔다. 퇴계의 시호에 관한 논의는 1572년(선조 5) 처음 발의된 후 여러 차례 검토 과정을 거쳐 1576년(선조 9) 12월에 교지가 내려졌다. 이때 불천지위(不遷之位) 교지를 함께 받아 퇴계는 영구히 사당에 모셔지게 되었다. 퇴계의 시호인 ‘문순(文純)’은 도덕이 높고 견문이 넓음을 일러 문(文)이라 하고[道德博聞曰文], 중정하고 정수한 것을 순(純)이라 한다[中正精粹曰純]에서 따온 말로, 퇴계의 인품과 학덕을 추숭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도산서원의 고문서 가운데는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할 것을 청하는 상소문이 있다. 퇴계의 후손인 이휘병(李彙炳, 李彙炳, 1819~?)이 소두(小頭)가 되어 10,094명의 영남 유생이 참여한 만인소(萬人疏)이다. 1855년(철종 6) 1월 27일, 도산서원에서는 90여 명의 영남 유생이 모여 도회를 열고, 사도세자의 추숭을 요구하고 임오의리(壬午義理)에 대해 재론하고자 하는 만인소를 작성하였다. 그러나 1792년(정조 16) 사도세자의 신원을 요구하는 영남만인소가 정조의 마음을 감동시켰던 것과는 달리 철종은 만인소를 승정원에 돌려주라고 하며 윤허하지 않았다. 비록 이 만인소는 임금에게 수용되지 못했지만 이후 영남 유생들이 결집하여 여러 차례 만인소를 올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855년 만인소(萬人疏)

1855년 만인소(萬人疏)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