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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이야기

서애종가

종가의 역사와 규모

서애종택(西厓宗宅)은 풍산류씨(豊山柳氏) 집성촌인 하회마을 서남쪽 끝에 남서향으로 터를 잡고 있다. 건너편에는 풍산류씨 대종가(大宗家)인 양진당(養眞堂)이 있다. 충효당(忠孝堂)이라는 당호는 평소에 자손들에게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고 강조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의 뜻을 받들어 이름 지었고, 1964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서애는 30여 년의 관직 생활을 마치고 귀향한 뒤 풍산 초미동의 초가삼간에서 생을 마쳤다. 종택은 서애의 손자인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 1597~1674)가 서애의 학덕을 기리고자 하는 유림의 힘을 모아 창건한 것이다. 그 후 증손인 우눌(愚訥) 류의하(柳宜河, 1616~1698)가 확장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행랑채는 서애의 8대손 일우(逸愚) 류상조(柳相祚, 1763~1838)가 병조판서를 제수받고 고향으로 내려와 있을 때 호위하던 군사들을 수용하고 병장고(兵仗庫) 및 식량창고로 쓰기 위해 급하게 지은 건물이라 한다. 이 행랑채를 '병조아문'(兵曹衙門)이라고 부른다.

서애종택(西厓宗宅)1

서애종택(西厓宗宅)1

서애종택(西厓宗宅)2

서애종택(西厓宗宅)2

종택은 정면에 행랑채 12칸이 길게 가로 놓여 있고, 조금 떨어진 뒤편에 口자형 안채 27칸과 안채 앞쪽 우측에 연결되어있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一자형 사랑채가 자리 잡고 있다. 안채는 다른 집의 안채에 비해 춤이 높다. 사랑채 뒤쪽에는 사당이 있고 그 오른쪽에 유물전시관인 영모각(永慕閣)이 있다. 솟을대문에 이어진 행랑채가 12칸의 규모로 꾸며져 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한국국학진흥원과 영모각에는 서애 류성룡의 유품 가운데 국보로 지정된 『징비록(懲毖錄)』과 보물로 지정된 류성룡 종가문적, 류성룡 종가유물 등이 보관되어 있다.

종가와 인물

서애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은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이자 외교관이다. 1566년(명종 21) 문과에 급제하고, 예문관 검열(藝文館 檢閱), 이조 좌랑(吏曹 佐郎), 대사헌(大司憲) 등의 벼슬을 거쳐 삼정승(三政丞)을 모두 지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서애는 1591년(선조 24)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알고 권율(權慄, 1537~1599)과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을 중용하도록 하였고, 전쟁에 대비할 방책을 건의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도체찰사(都體察使)로서 군무를 총괄하였고, 전쟁 이후 정비와 수습에도 많은 공을 세웠다. 관직 생활 중 여러 차례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면직되었는데, 1598년(선조 31) 탄핵을 받은 후에는 벼슬을 마다하고 은거하였다. 학문적으로는 21세에 퇴계(退溪)에게 『근사록(近思錄)』을 배운 뒤 퇴계의 수제자가 되어 영남학파를 이루었다. 평생을 청렴하게 살았던 청백리이자, 조선의 5대 명재상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서애의 후손들은 퇴계로부터 이어진 서애의 학풍을 계승하여 학문에 전념하고, 덕행으로 세간에 추앙받은 인물들이다.


서애의 장손인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 1598~1674)는 가르침을 받던 조부가 세상을 뜬 후 숙부인 수암(修巖) 류진(柳袗, 1582~1635)에게 가학을 익히고, 서애의 제자인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에게 수학하였다. 33세에 음보로 창락도찰방(昌樂道察訪)에 제수된 후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군자감 주부(軍資監 主簿), 황간 현감(黃澗 縣監), 진안 현감(鎭安 縣監) 등을 지냈다. 39세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안동의 의병장 이홍조(李弘祚)를 도와 크게 활약하였다. 퇴계의 이기설(理氣說)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고, 마음 수양을 위해 퇴계의 경(敬) 사상을 답습하였다. 역학에 몰두하여 「상수소설(象數小說)」, 「류권옹역도해(柳倦翁易圖解)」 등의 저술을 남겼고. 예설(禮說)에도 확고한 신념이 있어 「영남의례소(嶺南儀禮疏)」를 통해 드러냈다.

서애의 4대 종손 우눌재(愚訥齋) 류의하(柳宜河, 1616~1698)는 부친과 함께 일찍이 숙조인 류진과 정경세에게 수학하였다. 어릴 적부터 영특했으나 평생 과거를 보지 않았다. 1664년(현종 5) 조정의 천거로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을 제수받았고, 이후 사섬시직장(司贍寺直長), 봉화현감(奉化縣監)을 지냈다. 중년 이후 40년 동안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한 질만을 놓고 공부했다고 한다. 예법을 중시하여 행동거지가 바르고, 청렴결백하여 만년에 더욱 존경을 받았다.


서애의 5대손 주일재(主一齋) 류후장(柳後章, 1650~1706)은 조부인 류원지, 족숙인 류세명(柳世鳴, 1636∼1690)에게 학문을 배웠다. 스승으로 모신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 1620~1674)에게서 『주역(周易)』에 조예가 깊다는 평가를 받았고, 예학에도 밝았다. 학문과 덕행으로 명망이 높아 1689년(숙종 15) 건원릉 참봉(健元陵 參奉), 1691년(숙종 17) 익위사 부수(翊衛司 副率), 1693년(숙종 19) 시강원 자의(侍講院 諮議)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임하여 왕이 친서를 하사하였다. 류후장은 아버지 류만하(柳萬河)가 충효당에서 분가하면서 지은 집을 훗날 증축하고 자신의 호를 따서 주일재(主一齋)라 이름 지었다.

서애 관련 기록자료

서애 종가에 소장되어온 문헌과 각종 자료는 류성룡 종가 문적(柳成龍 宗家 文籍)이라는 이름으로 1963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진사록(辰巳錄)』 3책, 『난후잡록(亂後雜錄)』 2책, 『근폭집(芹曝集)』 2책 등 11종 22점의 일괄 자료이다. 보물 지정 당시 포함되어 있던 『징비록(懲毖錄)』 초본은 1969년 국보로 지정되면서 제외되었다. 이 문적들은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사적 자료들로, 현재 한국국학진흥원과 영모각에 보관되어 있다.

『징비록(懲毖錄)』은 1592년(선조 25)부터 1598(선조 31)년까지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7년간의 기록으로, 전쟁이 끝난 뒤 서애가 벼슬에서 물러나 귀향한 뒤 저술한 것이다. ‘징비(懲毖)’란 『시경(詩經)』의 「주송(周頌)」 소비장(小毖章)의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豫其懲而毖後患)”는 구절에서 딴 것이다. 이 책은 임진왜란 이전 일본과의 관계를 비롯하여 백성들의 항쟁, 명나라의 구원병 파견 및 제해권 장악에 대한 전황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임진왜란 전후의 상황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현재 4종이 전하는데, 저자의 친필 필사 원본인 『징비록』 초본과 16권으로 된 『징비록』, 2권으로 된 간본(刊本), 그리고 필사본이 있다.

징비록(懲毖錄)1

징비록(懲毖錄)1

『진사록(辰巳錄)』은 서애가 1592년(선조 25)과 1593년(선조 26)에 국왕 선조에게 올린 군국정무(軍國政務)에 관한 서장(書狀)을 베껴서 엮은 책이다. 임진년(1592년)의 '진(辰)'자와 계사년(1593년)의 '사(巳)'자를 따서 책의 이름을 지었다. 내용은 전쟁 수행에 관련된 각종 문제에 대한 대책 등을 조정에 보고하고 건의한 것이다. 서애의 자질(子姪)이나 문인들이 베낀 것을 서애가 교열하여 그 의견을 직접 기록해 놓고 있다. 초본에는 서장이 총 288편 수록되어 있고, 간행본에는 서장 178편이 수록되어 있다.

진사록(辰巳錄)1

진사록(辰巳錄)1

진사록(辰巳錄)2

진사록(辰巳錄)2

『난후잡록(亂後雜錄)』은 서애가 임진왜란 때 보고 들은 것을 전란 이후에 기록한 책이다. 2책으로 된 필사본으로, 작성 연대는 1602년(선조 35)에서 1607년(선조 40) 사이로 추정된다. 상권(上卷)에는 주로 임진왜란 7년에 얽힌 일을 기록하였고, 하권(下卷)에는 고려 및 조선 전기 명인의 전기와 인물평, 만필류(漫筆類)의 기록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임진왜란 전란사, 고려에서 조선 선조 때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화 등의 역사 기록뿐 아니라, 시문 초고도 여러 편 들어 있어 각 분야의 연구에 도움이 되는 귀중한 자료이다.

난후잡록(亂後雜錄)1

난후잡록(亂後雜錄)1

『근폭집(芹曝集)』은 서애가 1592년(선조 25)부터 1596년(선조 29)까지 국왕에게 올린 군국정무(軍國政務)에 관한 차자(箚子), 계사(啓辭)를 베껴서 엮은 책이다. '근폭(芹曝)'은 옛날 송나라 농부가 햇볕이나 미나리와 같은 하찮은 것도 임금에게 드리고자 했던 고사에서 가져온 말로, 관직을 떠나있으면서도 임금과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깊었음을 표현한 것이다. 2책으로 된 필사본으로 서애가 손수 베껴 쓴 차자 7편과 계사 87편이 실려 있는데, 「진군국기무십조(進軍國機務十條)」와 「신정연병규식(新定鍊兵規式)」의 두 글이 대표적이다.

근폭집(芹曝集)1

근폭집(芹曝集)1

근폭집(芹曝集)2

근폭집(芹曝集)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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