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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이야기

풍암정

풍암정의 역사와 규모

풍암정(楓岩亭)은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 있는, 무등산 원효계곡(元曉溪谷) 하류에 위치한 정자이다. 계곡을 따라 무등산 길을 걷다 보면 ‘풍암(楓岩)’이라고 새겨진 큰 바위와 함께 풍암정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곳은 1990년에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풍암정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한 김덕홍(金德弘), 김덕령(金德齡)의 아우인 풍암(楓岩) 김덕보(金德普)가 지은 정자이다. 김덕보는 큰형 덕홍이 금산싸움에서 전사하고,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하던 작은형 덕령까지 억울한 죽음을 맞게 되자, 세상을 등지고 무등산 기슭의 풍암정에서 학문을 연구하며 평생을 살았다. 풍암정 시문이 쓰인 시기로 보아 정자는 왜란 이전에 이미 지어졌고, 이후 형들의 죽음을 기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1602년(선조 35)에 중수한 것으로 보인다. ‘풍암’이라는 이름은 ‘단풍과 바위가 어우러진 수려한 풍광’을 뜻하는 것으로, 그의 호(號)를 따서 붙인 것이다. 이름처럼 풍암정 주변에는 백여 그루의 단풍나무가 늘어서 있고, 수많은 기암괴석이 놓여 있다.

풍암정_정면

풍암정_정면

풍암정_남서

풍암정_남서

정자는 돌을 쌓아 만든 축대 위에 세워졌다. 건물은 정면 2칸, 측면 2칸으로 정면에서 우측 1칸은 온돌방 형태의 재실이고, 나머지는 판자 마루를 깔았다. 지붕은 골기와 팔작기와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큰 덤벙주초를 놓고 배흘림을 보이는 원형 기둥을 세웠는데, 중앙에만 팔각의 기둥을 세웠다. 천장은 연등천장이며 중앙은 우물천장으로 처리하였다. 정자에는 풍암정사(楓巖亭舍)라고 쓰인 현판과 정홍명(鄭弘溟)이 쓴 「풍암기(楓巖記)」, 그리고 임억령(林億齡), 고경명(高敬命), 안방준(安邦俊), 정홍명, 김덕보 등의 제영(題詠)을 새긴 판각 10여 개가 걸려 있다. 김덕보가 은거하기 전부터 이름난 문인들이 다녀간 것을 알 수 있다.

풍암정 관련 인물

풍암(楓岩) 김덕보(金德普, 1571~1627)는 임진왜란 때 활동한 전라도 광주 출신의 의병장이다. 일찍이 송강(松江) 정철(鄭澈)과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규합하여 전라도 곳곳에서 왜군을 격파하였다. 1592년(선조 25) 6월, 형인 김덕홍(金德弘)과 김덕령(金德齡)이 고경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노모 봉양을 위해 덕령은 돌아오고, 덕홍은 금산싸움에서 전사하였다. 1593년(선조 26) 노모가 세상을 떠나자 김덕령은 상을 다 치르기도 전에 김덕보에게 집안을 맡기고 다시 의병을 일으켰고, 상이 끝난 후 김덕보도 군사 계획에 합류하였다. 이후 김덕령이 무고로 옥사하자 김덕보는 고향인 석저촌(石底村)으로 돌아와 호를 풍암(楓岩)이라 하고, 풍암정으로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며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유일(遺逸)로 여러 차례 천거되어 별제(別提)를 제수받았지만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안방준(安邦俊)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건강이 나빠져 전쟁에 나서지는 못하고, 뒤에서 도움을 주고 사망하였다. 1728년(영조 4)에 두 형과 함께 의열사(義烈祠, 지금의 벽진서원)에 배향되었다.

은봉(隱峰) 안방준(安邦俊, 1573~1654)은 조선 중기 학자이자 의병장이다. 박광전(朴光前), 박종정(朴宗挺)에게 수학하였고, 성혼(成渾)의 문인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인 박광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광해군 즉위 후 이이첨이 등용하려 하였으나 거절하고, 1614년(광해군 6) 죽산 안씨(竹山 安氏)의 세거지인 우산리(牛山里)에 은거하며 후학 양성과 학문에 전념하였고,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국난을 당할 때마다 의병을 일으켰다. 효종이 즉위한 뒤 지평(持平), 장령(掌令), 공조 참의(工曹 參議) 등을 지냈으며, 평생을 학문에 힘써 성리학에 능통하였다. 진주성을 지키다 순절한 이들의 내막을 적은 『진주서사(晉州敍事)』나 조헌(趙憲)의 소장과 격문 등을 모은 『항의신편(抗義新編)』, 그리고 『호남의록(湖南義錄)』, 『이대원전(李大源傳)』, 『삼원기사(三寃記事)』 등 전란 관계 사실을 기록하여 조선시대 의병사와 당쟁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남겼다.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기암(畸庵) 정홍명(鄭弘溟, 1582~1650)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다. 송강 정철의 넷째 아들로, 어려서 송익필(宋翼弼)에게 글을 배우고, 약관에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들어가 『주역(周易)』과 『근사록(近思錄)』을 배웠다. 1616년(광해군 8)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가게 되었으나, 북인들의 반대로 귀향하여 독서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1623년(인조 1) 예문관검열을 거쳐 1627년(인조5)에 부제학, 대사성을 역임하고, 김제 군수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소모사(召募使)로 활약하였고,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 벼슬을 사양하였다. 1646년(인조 24) 대제학을 잠깐 지내고 귀향한 뒤 다시 대사헌, 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제자백가서에 정통하였고 고문(古文)에도 밝았으나, 김장생의 학통을 이어 경전을 으뜸으로 삼았다. 사후에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저서에 『기옹집(畸翁集)』과 『기옹만필(畸翁漫筆)』이 있다. 광주의 풍암정에 「풍암기(楓巖記)」를 써서 17세기 당시 풍암정 주변의 경관과 누정의 위상을 잘 드러내었다.

풍암정 관련 기록자료

풍암정에 남아있는 누정제영(樓亭題詠) 가운데 김덕보가 쓴 「만영(謾詠)」이라는 제목의 시가 현판에 새겨져 있다. 풍암정 주변의 풍광을 묘사하며 사계절 어느 시절을 지내도 좋은 곳임을 자랑하고, 마음 맞는 벗들과 학문하며 지내는 풍암정에서의 생활에 대해 쓴 시이다. 풍암정에 들어가 은둔하며 지내는 삶을 신선들이 사는 곳에 견줄 정도로 만족감을 드러내고 있다.

- 덕보(金德普)의 누정시 -

나이 들어 단풍 언덕에 지은 두어 칸 집 (晩結楓崖屋數間)
바위 앞엔 대숲이요 뒤엔 첩첩 산이로세 (巖前修竹後重巒)
볕 좋은 창문이라 겨울날에도 따스하고 (向陽簷牖三冬暖)
물가 정자라서 무더위에도 시원하구나 (臨水高臺九夏寒)
영약은 매번 좋은 벗들 따라 캐내고 (靈藥每從仙儷斲)
좋은 책은 가끔 시골 사람에게 빌려 보니 (好書時借野人看)
이내 몸 깃들기에 별나게 편안한 곳이라 (棲身別有安閒地)
바다 밖 봉래방장이 무슨 소용 있으리오 (何用蓬壺海外山)

덕보(金德普)의 누정시

덕보(金德普)의 누정시

풍암정의 누정시 가운데 정묘호란 때 함께 의병을 일으켰던 우산 안방준의 시가 남아있다. 안방준은 정묘호란 때 김덕보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던 인물인데, 김덕보와는 동년배로 막역한 사이로 지냈던 인물이다. 이 시는 오랜 시간 김덕보와 만나왔던 지난날을 돌아보며 둘의 우정을 회고하고,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김덕보의 고매한 인품을 기리는 내용이다. 제목은 ‘받들어 드린다’는 의미의 「봉정(奉呈)」이다.

- 안방준(安邦俊)의 누정시 -

고향에 남은 친구는 몇이나 될까나 (故里親朋問幾人)
그대와 나 조석으로 자주 만났었지 (與君朝暮往來頻)
쉬는 날 평상에서 담소도 나눴건만 (竹床暇日淸談會)
타향 가을바람에 머리만 샌 듯하이 (關路秋風白髮新)
변덕스런 속세 정이야 관포에 창피하나 (雲雨世情羞管鮑)
두터운 우리 우정은 뇌진도 가소롭다네 (漆膠心事笑雷陳)
부탁함세 게으르고 병든 풍암자여 (寄言懶病楓巖子)
기백 감춘 채 끝까지 수양하게나 (終始韜光學養眞)

안방준(安邦俊)의 누정시

안방준(安邦俊)의 누정시

풍암정을 읊은 「차풍암정운(次楓巖亭韻)」이라는 시도 있다. 이 시는 광주 출신의 의병장으로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제봉 고경명이 남긴 작품이다. 풍암정 주변의 숲과 기암괴석, 고죽과 매화가 조화를 이뤄 빼어난 자연경관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고경명은 1574년(선조 7) 양응정, 이안눌 등 당대 이름난 문인들과 5일간 무등산 일대를 유람하며 뛰어난 시문을 남겼는데, 이 작품은 그 당시 풍암정에 들러 지은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 전사한 고경명의 작품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풍암정의 건립 시기가 임진왜란 이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고경명(高敬命)의 누정시 -

숲은 더 푸르고 바위들도 더욱 기묘하니 (木益蒼蒼石益奇)
그윽한 자태가 이 같은 선경도 없고말고 (洞天無地不幽姿)
우연히 매화 그림자가 비친 곳에 왔다가 (偶來梅影橫斜處)
무심코 거꾸로 걸린 은하도 봤지 뭐요 (閑看銀河倒掛時)


고죽에 군을 더하니 절로 더욱 기이한데 (孤竹添君更自奇)
주변에 매화 있어 남다른 멋까지 있건만 (玉妃傍侍有餘姿)
수풀 건너 수천 봉우리에 떠야 할 달님이 (惜無林表千峯月)
술잔 가득 비치지 않아 아쉽기만 하구나 (照見山杯瀲灩時)

고경명(高敬命)의 누정시

고경명(高敬命)의 누정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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