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莊園·manor)은 자급자족적인 경제단위를 이르는 말이다. 중세시기 서양의 봉건제는 기사를 중심으로 유지되었고, 기사들은 장원의 경제적 토대를 소유하고 있었다. 장원에는 영주 직영지와 농노의 보유지를 합친 농경지와 공동목초지, 농노의 가옥, 기타 공동시설물이 있었다. 장원은 독립적인 경제단위다. 그러나 동양 문화권에서는 주택을 품고 있는 농지로서의 장원은 낯선 개념이다. 우리에게 집은 거주하는 곳이지, 경작지와 연계된 개념은 아니다. 따라서 종종 말해지는 조선시대의 장원은 단순히 양반의 넓은 농지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상류 주택은 가족의 살림살이와 솔거노비의 거주 외에 봉제사(奉祭祀)와 접빈객(接賓客)의 목적에 적합하게 지어져야 했다. 봉제사를 위해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주택 안에 둠으로써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곳이 되어야 했고, 양반과 솔거노비가 공존하는 곳이어야 했다. 솔거노비는 주인과 같은 곳에 거주하면서 직영지의 경작 등에 직접적인 노동력을 제공했다. 남자와 여자의 공간도 나뉘어야 했다. 안채에는 여자들이 사랑채에는 남자들이 기거했다. 손님을 위한 공간도 따로 있었다.
선교장(船橋莊)의 구조도 이러한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안채의 뒤쪽으로 선조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 있고, 그 앞쪽으로 가족의 주거 공간인 안채와 동·서 별당이 병렬로 배치되었으며, 사랑채인 열화당(悅話堂)과 누정인 활래정(活來亭) 그리고 방해정(放海亭, 경포호 인근에 별도 소재)은 손님을 위한 공간이었다. 현재는 일부만 남아 있는 초가는 솔거노비의 거주공간이자 작업공간이었다. 본래는 본채 앞에 솔거노비들이 거주하는 더 많은 수의 초가가 있었다. 이외에 선교장에는 자녀 교육을 위한 서재가 있었으며, 서별당은 서고 역할을 겸했다.
현재 남아 있는 선교장 본채의 규모는 건물 9동에 총 102칸뿐이다. 그러나 배다리골에 있었던 부속건물과 가랍집 초가까지 포함하면, 대략 300칸에 이르는 당시 조선에서 가장 큰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솔거노비들은 배다리골에 있는 경작지를 경작하고 선교장에서 소요되는 물품을 제작했다. 이로써 선교장은 독립된 경제단위라는 ‘장원’에 부합하는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이근우(李根宇, 1877-1938)는 선교장 주변의 솔밭을 조성하여 이가원(李家園)이라 명명하고, 경포호 주변의 홍장암(紅粧岩)이라는 바위에 ‘이가원주이근우(李家園主李根宇)’라는 글씨를 새겨넣음으로써 선교장이 장원임을 명시했다.
선교장을 장원으로 만든 계기는 두 가지다. 하나는 경제적 번영이다. 선교장은 영동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강원도 땅의 상당 부분을 소유하고 있었다. 수확물을 보관하기 위한 창고를 본가 외에도 북촌(현재의 주문진)과 남촌(현재의 묵호)에 따로 두어야 했을 정도다. 다른 하나는 가족이 분가하는 경우에도 같은 공간 내에 거주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선교장의 창립자인 이내번(李乃蕃, 1693-1781)의 현손 이용구(李龍九)는 안채 동쪽에 외별당을 지어서 동생 이의범(李宜凡)의 가족들이 기거할 수 있도록 했다. 이들은 토지 소유 등을 나누었지만,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함께 살았다.
선교장의 형식은 서양의 장원과 다르지 않다. 주택에 경작지가 포함되어 있었고 생활에 필요한 생활용품을 직접 제작했으며 경작인이 함께 거주했다. 하나의 독립된 자족적 경제단위였다. 그러나 배경에서 차이가 있다. 서양의 장원은 봉건제라는 제도적 힘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봉건제의 핵을 이루는 기사와 왕의 계약, 그리고 그런 계약의 대가로 주어지는 경제력의 제공이 서양에서 장원이 형성된 배경이다. 선교장의 경우는 다르다. 수 대에 이르는 성공적인 삶의 경영과 그에 수반된 가족의 확장을 주택에 담아내면서 자연스럽게 장원의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