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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종가

종택의 역사와 규모

학봉종택(鶴峰宗宅)은 예로부터 천 년 동안 쇠하지 않는 땅[千年不敗之地]이라 불리던 안동 서후면 금계마을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이 마을은 지세가 거문고처럼 생겼다 하여 ‘금지(琴地)’라 불렀는데,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 이곳으로 옮겨온 후 금계(金溪)로 고쳐 그곳 방언으로는 검제(黔堤)라 부른다. 종택은 1995년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학봉은 1582년(선조 15) 45세 되는 해에 의성김씨(義城金氏) 종택이 있던 안동 임하면 내하마을을 떠나 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가 살던 금계마을로 이주하였다. 지금의 종택은 학봉의 손자 단곡(端谷) 김시추(金是樞, 1580~1640)가 터를 잡고 풍뢰헌(風雷軒)을 지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 터는 지대가 낮아 자주 침수되어 1762년(영조 38)에 8대손 김광찬(金光燦)이 종택에서 100m 가량 떨어진 소계서당(邵溪書堂)으로 종택을 옮기고 종택의 자리에는 소계서당을 지었다고 한다. 이후 1964년에 집터의 문제를 보완하고, 종택과 소계서당을 원래의 자리대로 바꾸었다.

학봉종택(鶴峰宗宅)1

학봉종택(鶴峰宗宅)1

학봉종택(鶴峰宗宅)2

학봉종택(鶴峰宗宅)2

종택은 2,000여 평의 땅에 사랑채, 안채가 있는 ㅁ자형 본채와 학봉을 모신 사당, 별채인 풍뢰헌, 유물관인 운장각(雲章閣), 그리고 학봉기념관까지 100여 칸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학봉종택은 김시추가 터를 잡을 때부터 풍뢰헌이 중심이었다. 대대로 종손들은 자신의 호를 따서 정근재(定跟齋, 4대손 김규), 철토재(撤土齋, 7대손 김주국), 탄와(坦窩, 10대손 김진화)라고 풍뢰헌의 당호를 붙였다. 운장각에는 학봉 친필 원고를 비롯하여 유물과 고서, 고문서 503점이 보물로 지정되어 보관되고 있다. 최근에는 종택 바깥에 학봉기념관을 지어 학봉의 유품을 전시 중이다.

종가와 인물

학봉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로, 의리의 상징이 된 충신이다. 1568년(선조1) 문과에 급제하여 대간(臺諫), 홍문관 부제학(弘文館 副提學) 등 요직을 두루 거쳤고,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그는 퇴계의 적전고제(嫡傳高弟)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영남학파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고, 많은 제자를 양성하여 새로운 학통을 형성하였다. 1590년(선조 23) 통신부사로 일본을 다녀와서 일본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파직되었다. 이후 경상도 초유사(慶尙道 招諭使)로 임명되어 의병을 규합하고 전투력을 강화하는 데 힘을 쏟았다. 1593년(선조 26) 경상우도 순찰사(慶尙右道 巡察使)가 되어 각 고을의 왜군 항전을 독려하던 중 병을 얻어 진주 공관에서 생을 마쳤다.


학봉의 종손들은 학봉의 학문 세계뿐만 아니라 의리 정신을 이어받아 국난 극복에 앞장섰다.


학봉의 장손인 단곡(端谷) 김시추(金是樞, 1580~1640)는 1601년(선조 34) 생원시에 합격한 뒤 동몽교관(童蒙敎官), 의금부 경력(義禁府 經歴)을 지낸 문인이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를 스승으로 모셨는데, 어릴 적부터 성품이 반듯하고 꼿꼿하여 조부인 학봉을 빼닮았다는 칭송을 받았다. 1621년(광해군 13) 나라를 혼란에 빠뜨린 이이첨(李爾瞻, 1560~1623)을 처단하자는 만인소(萬人疏)를 올릴 때, 영남 유생의 소두(小頭)로 추대되어 세 번의 상소를 올렸다.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에는 의병대장에 추대되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는 유진장(留鎭將)이 되어 활약하였다.

학봉의 11대 종손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1827~1899)은 영남 유림을 대표하는 한말(韓末)의 유학자이자 안동지역 의병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1845년(헌종 11)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1777~1861)의 문인이 되어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1627~1704),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 1781)으로 이어진 영남학파의 주요한 학통을 이어받았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아 임명에 늘 응하지 않았고, 학문에만 전심하여 「초학잠(初學箴)」, 「외천설(畏天說)」, 「입학오도(入學五圖)」 등 많은 글을 남겼다. 최초의 항일 의병인 ‘안동갑오의병’을 일으켰고, ‘을미의병’과 ‘병신의병’을 총지휘하여 안동부를 점령했다. 학자, 의병, 독립운동가 등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였고, 그의 문인 705명이 기록된 『보인계첩(輔仁稧帖)』을 남겼다.


학봉의 13대 종손 김용환(金龍煥, 1887~1946)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어릴 적부터 조부 김흥락의 영향을 많이 받아 1908년 이후 수많은 의병항쟁에 참가하였다. 1921년에는 비밀 독립운동 단체인 의용단에 가입하여 독립군의 자금을 지원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여러 차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겪었다. 그 후 김용환은 세 번이나 학봉종택을 팔아 노름판에서 날렸는데, 이것은 독립군 자금을 마련하고자 일부러 파락호 행세를 한 것이다. 1922년에는 학봉종가와 임천서원(臨川書院)의 재산을 모두 처분하여 독립군 자금으로 지원하였다. 그러나 그는 죽기 전 끝내 이러한 행적을 밝히지 않았고, 1995년에서야 조부와 함께 건국훈장을 추서 받았다.

학봉 관련 기록자료

학봉 종가에 소장되어온 문헌과 각종 자료는 김성일 종가 전적(柳成龍 宗家 典籍)이라는 이름으로 1987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 등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문헌 28종 176책과 『퇴계사전초((退溪史傳抄)』, 『해사록(海槎錄)』 등 필사본 28종 85책이 일괄 지정되었다. 이 전적들은 임진왜란 이전의 활자체를 연구하고, 임진왜란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자료들이다. 현재 한국국학진흥원과 학봉종택의 운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학봉선생해사록(鶴峰先生海槎錄)』은 1590년(선조 23) 3월 학봉이 통신부사로 일본에 사행을 가서 이듬해 2월 귀국할 때까지의 일을 기록한 사행록이다. 총 3책 5권으로 된 자필본이다. 주로 일본의 지리, 풍물을 읊은 시와 수창시(酬唱詩) 130여 수, 학봉이 쓴 편지글 등이 실려 있는 시문집으로 책의 끝에는 1797년(정조 21) 학봉의 9대손 김종수(金宗壽)가 쓴 후지(後識)가 있다. 현재는 시(詩) 11수, 사(辭) 1편, 서(書) 1편이 수록된 1책만이 종가에 보존되어 있다. 이 책은 당시 일본의 실상과 조선과 일본의 관계 그리고 일본에 대한 조선 관원의 인식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학봉선생해사록1

학봉선생해사록(鶴峰先生海槎錄)1

『학봉일기초(鶴峰日記草)』는 1570년(선조 3)에서 1573년(선조 6)까지 학봉이 예문관의 검열, 대교, 봉교 등을 지내며 사관을 겸하고 있을 때 경연(經筵)에 입시하여 기록한 사초이다. 총 54철(綴) 35권 35책으로, 『경연일기(經筵日記)』라고도 부른다. 4년 동안에 31일의 기사만 현존하고 일부 해당 연월일이 확인되지 않는 철도 있으나, 16세기 경연 운영의 실상과 정치·사회 및 관리 임명, 형옥 처결 등을 두루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선조실록(宣祖實錄)』 기사에 빠진 당시의 국정 상황이 기록되어 있어 임진왜란 이전의 부족한 사료를 보완할 수 있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학봉일기초(鶴峰日記草)1

학봉일기초(鶴峰日記草)1

『퇴계사전초(退溪史傳草)』는 학봉이 스승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전기(傳記)를 기록한 1책의 친필 초고본(草稿本)이다. 초서로 작성되었고, 작성 연대는 알 수 없다. 말미의 내용으로 보아 퇴계의 세계(世系), 이력, 행덕을 기술하여 퇴계를 문묘에 종사시키기 위한 전기 자료로 쓴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퇴계의 행덕 뿐만 아니라 퇴계와 학봉의 사제 간의 깊은 관계를 살필 수 있고, 나아가 학봉의 학문관, 문장력 및 필체를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학봉집(鶴峰集)』에는 「퇴계선생사전(退溪先生史傳)」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퇴계사전초(退溪史傳草)1

퇴계사전초(退溪史傳草)1

퇴계사전초(退溪史傳草)2

퇴계사전초(退溪史傳草)2

『기묘일기부북정일기(己卯日記附北征日記)』는 학봉의 자필 일기로, 1579년(선조 12) 1월 1일부터 4월 12일까지의 귀향일기인 『만력칠년기묘세일기(萬曆七年己卯歲日記)』와 1579년(선조 12) 9월 21일부터 12월 12일까지 함경도 순무어사(咸境道 巡撫御史)를 지낼 때의 관직일기인 『북정일록(北征日錄)』이 합철(合綴)된 것이다. 『기묘일기』는 당시 이조 정랑(吏曹 正郎)으로 있던 학봉이 휴가를 얻어 경상북도 영양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고 귀경할 때까지의 일기로, 조정의 대소사건, 역로(歷路)의 풍물, 자신의 일상생활이 담겨있다. 『북정일기』는 북도(北道)의 각 진보(鎭堡)·역참·창고 등의 실태와 산천도리(山川道里) 등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어 16세기 함경도 지방의 사회, 경제, 국방, 지리 등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기묘일기부북정일기(己卯日記附北征日記)1

기묘일기부북정일기(己卯日記附北征日記)1

기묘일기부북정일기(己卯日記附北征日記)2

기묘일기부북정일기(己卯日記附北征日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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