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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이야기

선교장

선교장

자연의 공간이 있다. 자연인으로 태어나 문화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생활양식을 새겨넣음으로써 자연의 공간이 문화화된다. 자연과 문화의 미묘한 줄다리기 속에서 공간은 자연(自然)한 문화가 되고, 자연 속에 살아가는 문화인이 시간을 경영하면서 남긴 흔적이 역사가 된다. 건축에는 자연인이자 문화인인 동시에 역사인인 사람의 공간과 시간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야기를 찾는 이들의 여정에 놓임으로써 주택은 길의 이야기가 된다. 현재는 잊힌 이야기와 자연과 문화가 어울린 공간을 찾는 이들이 걷는 길에 선교장(船橋莊)이 있다.

경포호와 경포습지로 이어지는 선교장(船橋莊)1

경포호와 경포습지로 이어지는 선교장(船橋莊)1

경포호와 경포습지로 이어지는 선교장(船橋莊)2

경포호와 경포습지로 이어지는 선교장(船橋莊)2

사람에게 맞는 적소(適所)가 있다. 끝없이 이어져 있는 공간에서의 적소 찾기는 외부에 개방되어 있으면서도 내부의 포근함이 보존되는 터를 찾는 과정이기도 하다. 동아시아의 적소 찾기 문법이라고 할 수 있는 풍수(風水)는 바람길과 물길을 찾거나 피하기 위한 논리가 골간을 이룬다. 강릉의 사주산(四柱山) 중 하나인 시루봉에서 흘러내린 산줄기가 간간이 야트막한 능선을 이루는 선교장 터는 산을 등지고 있다. 새 둥지를 닮은 선교장 터는 본래 둘레가 12Km에 이르렀던 경호(鏡湖)에 접해있었고, 선교장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배로 놓은 다리를 건너야 했다. 그런 이유로 배다리 집 즉, 선교장(船橋莊)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물길에 접해있는 이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터를 외풍에서 막아주는 작은 두 개의 동산 사이에는 소로가 있어, 바람길 역할을 한다.

부친을 여의고 충주에서 외가가 있던 강릉에 와서 경포대(鏡浦臺) 저동(苧洞) 부근에 살고 있던 이내번(李乃蕃, 1693-1781)이 무심하게 한 무리의 족제비를 따르다가 적소를 찾았다. 전주이씨(全州李氏) 효령대군(孝寧大君)의 11세 손이 그 뒤로 수백 년 동안 가문을 이어나갈 자연의 공간을 찾은 셈이다. 이내번과 그의 어머니인 안동권씨에 의해 자연의 공간이 문화화되기 시작했고, 자연의 이야기에 사람의 이야기가 더해졌다.

삶의 내력이 공간이 문화화되는 향방을 정한다. 이내번은 강릉 일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 형태의 폐쇄된 저택을 지었다. 이 집은 안마당을 둘러서 안채와 사랑채, 아래채 등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배산임수의 풍수 논리에 맞는 적소에 건물이 들어섬으로써 사람의 문화가 스며들었다. 이내번의 손자인 이후(李垕, 1773-1832)는 13세에 부친 이시춘(李時春)이 별세하자, 두 동생 승조(昇朝)와 항조(恒朝)를 돌봐야 했다. 두 동생이 어린 조카들을 남긴 채 일찍 세상을 떠난 후에는 두 동생의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이후는 안채와 아래채를 증축해 승조의 가족을, 열화당을 지어 항조의 가족을 거처하게 했으며, 그 앞에 작은 사랑채를 지어 집안의 젊은이들이 이용하게 했다. 일반 주택이 장원(莊園)이라고 불릴만한 공간으로 확장되는 계기였다.

선교장(전경)

선교장(전경)

선교장(후경)

선교장(후경)

삶의 경영에 성공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게 되었다. 현재의 강릉 남대천 하구는 본래 작은 석호였다. 안동권씨와 이내번은 이곳에서 염전을 운영했는데, 염전은 날로 번창해서 선교장의 경제적 기틀이 되었다. 이후에 아들 이용구(李龍九)와 이의범(李宜凡)이 1825년과 1827년에 각각 생원시에 급제함으로써, 사회적 성취도 이뤘다. 이용구는 집안의 자녀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서별당을, 동생 이의범의 가족을 위해 외별당을 지었다. 외별당은 본채인 대택에 대한 소택에 해당한다. 이용구와 이의범은 주택과 토지를 나누었지만, 공간적으로 이어지는 건축을 통해 하나의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유지했다. 선교장의 장원 형식은 봉건적 토지 구획에 의해 이뤄진 것이 아니라, 가족의 울타리가 확장됨에 따라 자연스레 형성된 것이다.

보다 많은 사람을 품음으로써 건축에 담길 문화는 더 깊어지고 넓어지며, 그 결과 건축은 짙은 문화적 색채를 띤다. 두루 전국을 여행해서 마음의 품을 넓힌 은일지사(隱逸志士) 이후는 선교장 뒷산 송림에 팔각정을 짓고, 배다리골 입구에는 연못을 파고 활래정(活來亭)을 지었다. 연못 위에 지어진 작은 정자, 온돌시설이 있는 활래정에는 차를 끓여 낼 수 있는 다실(茶室)이 있다. 활래정은 풍류의 공간이었다. 은일지사로서 이후는 세상에 나가는 대신 문화인을 맞이했다. 경포호의 달은 아름답다. 활래정으로 들어가는 월하문(月下門)과 그 양쪽 기둥에 걸린 편액이 나그네를 적잖이 유혹했을 것이다. 선교장은 관동팔경의 중심, 금강산 유람을 소망하는 이들이 걷는 길 위에 있다. 많은 시인묵객들이 선교장을 방문했고, 이들이 남긴 서화는 선교장을 문화의 중심으로 변모시켰다.

월하문(月下門)

월하문(月下門)

활래정(活來亭)

활래정(活來亭)

문화인의 삶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역사가 된다. 시인묵객들이 방문해서 풍류를 즐기고 조선이 성취한 최고의 문화를 꽃피우던 이 공간도, 한말(韓末)부터 시작된 역사의 소용돌이를 겪어내야 했다. 한말 역사가 뒤틀릴 때, 이내번의 5세손 이근우(李根宇, 1877-1938)는 동진학교(東震學校)를 설립,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을 비롯한 당대의 지성인을 초빙해서 교육을 맡겼다. 학비를 비롯한 숙식비, 교복비, 교재비 등 전액을 선교장이 부담하면서 학생들이 학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했다. 이근우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맡았지만, 여운형과 이시영을 통해 백범(白凡) 김구(金九) 등과 접촉하면서 독립자금을 지원했다. 해방 이후 선교장에 상해임시정부 요인들이 방문했다. 그중에 백범 김구도 있었다. 백범의 편액이 최근 새롭게 판각되어 활래정에 걸렸다.

활래정(活來亭)에 걸려 있는 백범(白凡) 김구(金九)의 글

활래정(活來亭)에 걸려 있는 백범(白凡) 김구(金九)의 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다시 역사에 닿는다. 효령대군의 7세손으로 이내번의 고조부인 이성(李惺)은 이산해(李山海) 등과 대북파(大北派)를 주도한 인물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지지한 소북파(小北派)의 영수 유영경(柳永慶)의 옥사에 관여한 공으로 정운공신(定運功臣) 3등에 책록되고 완계군(完溪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유영경의 신원이 이뤄지면서 관직에서 물러났고 정운공신도 폐삭되었다. 그는 1624년 이괄(李适)의 난으로 인해 다시 화를 입었다. 흐름을 바꾸기는 어렵다. 충주에 세거하던 집안은 일거에 위기를 겪었고, 이성의 현손(玄孫) 이내번은 아버지인 이주화(李冑華)가 별세하자 어머니를 따라 외가가 있던 강릉으로 이주했다. 이 사건이 선교장 이야기의 시작이다.

선교장 둘레길(좌청룡과 우백호)1

선교장 둘레길(좌청룡과 우백호)1

선교장 둘레길(좌청룡과 우백호)2

선교장 둘레길(좌청룡과 우백호)2

사람은 이야기의 존재다. 나의 말과 타인의 말이 ‘나’를 구성하고, 구성된 여러 ‘나’가 모여 ‘우리’를 직조해낸다. 선교장은 이야기를 만들었지만, 동시에 이야기로 인해 선교장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먼저, 적소를 설명하기 위한 풍수의 이야기가 붙었다. 바람길과 물길에 조화로운 땅을 만들어준 두 개의 작은 산줄기에는 좌청룡과 우백호라는 이름이 붙었고, 수구가 너무 터져 있다고 해서 집터를 남서쪽으로 틀었다는 좀 더 세련된 설명이 가미됨으로써, 사람과 자연이 빚어내는 이야기를 더욱 풍요롭게 했다.

선교장을 꾸며 시인묵객들을 유혹한 결과, 선교장에서는 끝없이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선교장으로 이야기꾼들이 몰려들어 자신의 이야기를 시와 서 그리고 그림으로 남겼으며, 선교장이 지어낸 이야기는 조선의 정신을 살지게 만들었다. 선교장 이야기의 주인공은 조선의 문화인인 선비들이었다. 선교장을 방문한 선비들은 열화당과 활래정에서 시를 짓고 난을 치며 경호 주변 외진 배다리집을 조선을 대표하는 문화공간으로 변모시켰다.


사람은 자연인이다. 문화가 그리고 이어진 이야기가 역사를 만들었지만, 역사와 문화 무엇도 자연의 품을 떠나지 못한다. 선교장은 경포호에 이어지는 경포습지 옆에 있음으로써 그리고 시루봉에서 이어지는 산줄기 사이에 위치함으로써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곳이 될 수 있었다. 강릉의 자연이 품어준 적소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지어낸 이야기는 결국 자연의 이야기다. 2023년 4,000여 점에 달하는 선교장의 귀중한 문헌들이 율곡연구원으로 옮겨졌다. 전문연구자뿐 아니라 이야기를 좋아하는 누구나가 선교장의 오래된 이야기를 보다 가까이에서 들을 수 있게 된 셈이다. 율곡연구원 본관에 소재한 수장고에 들어가서 선교장 문헌이 있는 수장대를 지나노라면, 자연이 빚어낸 터에서 문화인이 지어내고 역사가가 정리한 자연의 이야기가 들리는 듯하다.


율곡연구원에서 경포습지를 건너면, 이 이야기의 원천인 선교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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