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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가정

취가정의 역사와 규모

취가정(醉歌亭)은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동쪽 북촌마을에 위치한 정자이다. 정자가 위치한 언덕 뒤편에는 광주의 누정을 대표하는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의 환벽당(環碧堂)이 있고, 인근에 식영정(息影亭), 소쇄원(瀟灑園), 독수정(獨守亭) 등이 자리 잡고 있어 이 일대를 일명 누정문화권이라 부른다. 취가정은 2014년에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취가정(醉歌亭)_정면

취가정(醉歌亭)_정면

취가정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을 기리기 위해 후손인 김만식(金晩植)이 중심이 되어 1890년(고종27)에 창건한 곳이다. 이후 1950년 6·25전쟁으로 불에 타서 없어졌으나 1955년 후손 김희준(金熙駿)과 친족들이 중건하여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충효동은 바로 김덕령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정자의 이름을 취가정이라 한 것은 석주(石洲) 권필(權韠)의 꿈과 관련이 있다. 어느 날 권필의 꿈에 김덕령이 술에 취한 모습으로 나타나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호소하는 「취시가(醉時歌)」를 읊었고, 권필은 그 원혼을 달래주기 위해 화답시를 지어주었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취가정(醉歌亭)_남서면

취가정(醉歌亭)_남서면

취가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골기와 팔작지붕으로 중앙에 온돌방이 1칸 있고, 방 앞과 좌우 양측에는 마루가 꾸며져 있다. 취가정 전면 네 개의 기둥에는 각각 주련(柱聯)이 걸려 있는데, 충장공의 충정과 기상을 드높이고 억울하게 죽은 넋을 위로하는 내용이다. (충성은 해와 달을 꿰뚫었고, 기개는 산과 강에 우뚝하네. 취해서 땅에서 노래 부르니, 그 소리 하늘도 듣는구나.[忠貫日月, 氣壯山河, 醉歌於地, 聲聞于天.])

이곳에는 설주(雪舟) 송운회(宋雲會)가 쓴 제액(題額)과 은진(恩津) 송근수(宋近洙)가 쓴 「취가정기(醉歌亭記)」, 김만식의 상량문(上樑文), 광산(光山) 김문옥(金文鈺)의 중건기(重建記), 그리고 권필의 「취시가(醉時歌)」와 화답시 등을 새긴 7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정자 왼편에는 2001년 광산김씨 충효종중에서 세운 <충장공 김덕령 장군 취시가비>가 있다.

취가정 관련 인물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 1567~1596)은 조선 중기의 의병장으로, 지금의 광주 충효동인 석저촌(石底村)에서 태어났다. 1587년(선조 20) 종조부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와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학문에 뜻을 두었다. 그러던 중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덕홍(德弘)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高敬命)과 전주까지 진군한 후 돌아왔다. 1593년(선조 26)에는 당시 전주에 내려와 있던 광해군을 구해 익호장(翼虎將)의 군호를 받았고, 권율(權慄)로부터 초승장(超乘將)의 군호를, 이듬해 1월 선조로부터 충용장(忠勇將)의 군호를 받았다. 나라에 크고 작은 공을 세우던 가운데 1596년(선조 29) 7월, 충청도 홍산(鴻山, 지금의 부여)에서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켜 토벌에 나섰는데, 이때 반란에 가담했다는 모함을 받아 투옥되었다. 이후 20여 일간 6차례에 걸친 혹독한 고문 끝에 그해 9월, 30세의 나이로 옥사하였다. 1661년(현종 2) 65년 만에 억울함이 밝혀져 관직이 복고(復古)되었으며, 1668년(현종 9)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다. 1788년(정조 12) 충장공의 시호가 내려지고, 김덕령이 태어난 석저촌을 충효의 고을이라 하여 충효리(忠孝里)로 바꾸도록 하였다.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는 그를 모시는 사당인 충장사(忠壯祠)가 있다.

석주(石洲) 권필(權糧, 1569∼1612)은 조선 중기 시인이자 성리학자이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에게 수학하였으며, 당대의 대표 문단인 목릉성세(穆陵盛世)에서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과 함께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받았다. 벼슬에는 뜻이 없어 산수를 방랑하며 풍자시를 주로 지었고, 뛰어난 시재로 자신의 울분을 토로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하기도 하였는데, 왜란 이후 세상에 대한 뜻을 접고 강화에 석주초당(石洲草堂)을 열어 후학을 양성하였다. 동료들의 추천으로 제술관(製述官)에 발탁되었으나, 당시 외척으로 부패를 일삼던 유희분(柳希奮)을 풍자한 「궁류시(宮柳詩)」를 지은 일로 유배되어 가던 중 객사하였다. 사후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되었고, 한문소설 「주생전(周生傳)」을 남겼다. 강화의 석주초당 터에 후손 권체가 세운 <석주권필유허비(石州權韠遺墟碑)>가 남아있다. 그의 문집 『석주집(石洲集)』에는 권필이 꿈에서 본 김덕령의 시집을 보고 썼다는 「취시가(醉時歌)」와 권필의 화답시가 수록되어 있다. 광주 취가정의 명칭은 권필의 꿈에서 유래한 것이다.


난실(蘭室) 김만식(金晩植, 1845~1922)은 전라도 광주 출신의 문인이다. 향시에서 세 번이나 장원을 했으나 문과에는 급제하지 못했다. 이후 관직에 나가지 않고, 평생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초학방향(初學方向)』을 저술하고, 이현규(李現圭)와 학규(學規)를 만들어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 1890년(고종 27)에 김덕령을 기리기 위해 친족들과 취가정(醉歌亭)을 창건하여 그 경위를 상량문으로 쓰고, 느낀 바를 시로 지어 「창립취가정유감(創立醉歌亭有感)」을 남겼다. 1965년 양자 김희준(金熙駿)이 간행한 『난실유고(蘭室遺稿)』가 전한다.

취가정 관련 기록자료

「취시가(醉時歌)」는 권필이 김덕령의 시집을 읽는 꿈을 꾸고 난 뒤 잠에서 깨어 지었다는 시이다. 권필의 문집인 『석주집(石洲集)』 7권에는 권필이 꿈에서 김덕령의 시집과 「취시가」를 읽게 된 경위와 「취시가」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마지막에 화답시를 쓰게 된 심경이 나와 있다. 「취시가」는 취해서 부른 노래라는 뜻으로, 이 시에는 김덕령이 나라에 큰 공을 세웠으나 모함을 받고 죽은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호소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에 권필은 화답하는 시를 지어 그의 원혼을 위로하였다.

- 취시가(醉時歌) -

취했을 때 노래하니 (醉時歌)
이 곡을 듣는 이 없겠지만 (此曲無人聞)
나는 꽃과 달에 취하고 싶지도 않고 (我不要醉花月)
나는 공훈도 세우고 싶지 않다 (我不要樹功勳)
공을 세우는 것은 뜬구름과 같으니 (樹功勳是浮雲)
꽃과 달에 취하는 것 또한 뜬구름이지 (醉花月也是浮雲)
취했을 때 노래하니 (醉時歌)
이 곡을 알아주는 이 없겠지만 (此曲無人知)
내 마음은 그저 장검으로 성상께 보답하는 거로세 (我心只願長釼報明君)

- 화답시 -

장군은 옛날 창을 잡았지만 (將軍昔日把金戈)
중도에 꺾인 장한 뜻 운명이니 어쩌겠소 (壯志中嶊奈命何)
지하 영령의 한없는 한스러움을 (地下英靈無限恨)
취시가 한 곡조로 분명하게 나타냈구려 (分明一曲醉峕歌)

취시가(醉時歌)

취시가(醉時歌)

「춘산곡(春山曲)」은 김덕령이 옥중에 있을 때 지은 시조이다. 김덕령의 행록과 시문 등을 수록한 『김충장공유사(金忠壯公遺事)』 권1에 실려 있다. 『김충장공유사』 권1에는 「춘산곡」과 함께 시(詩) 5수, 서(書) 4편, 격문 2편, 제문 1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작품은 나라를 위해 충정을 다했음에도 무고를 당해 옥살이를 하고 있는 자신의 억울한 심경을 담고 있다. 봄철 산에 난 불은 끌 수 있지만 자기 몸속에 붙은 연기 없는 불은 끌 수 있는 물조차 없음을 한탄하는 내용이다.

- 춘산곡 -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의 내 없는 불 일어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김충장공유사(金忠壯遺事)

김충장공유사(金忠壯遺事)

『김충장공유사』는 김덕령의 시문과 그와 관련된 자료들을 엮은 시문집이다. 3권 1책의 목판본으로 1694년(숙종 20)에 왕명에 따라 편찬되었는데, 1796년(정조 20)에 왕명으로 다시 간행되었다. 이때 정조가 내린 「어제김충장유사서(御製金忠壯遺事序)」, 「어제사제문(御製賜祭文)」, 「윤음(綸音)」이 추가되었다. 구성을 살펴보면, 권1은 김덕령의 시문, 권2는 연보, 권3은 기실(記實), 전(傳) 등 후인들이 남긴 글로 이루어져 있다. 부록에는 형인 덕홍(德弘)과 아우 덕보(德普)의 유적과 시문도 함께 실려 있다. 이 책은 임진왜란 관련 의병 항쟁 연구와 김덕령의 설화 배경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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