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국학이야기

부용정

부용정의 역사와 규모

부용정(芙蓉亭)은 광주광역시 남구 칠석동에 위치한 정자이다.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이자, 광주지역에서 향약이 처음으로 시행된 뜻깊은 장소이다. 현재 국가무형문화재인 ‘고싸움놀이’ 테마파크 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1990년에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부용정은 조선 세종 때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김문발(金文發)이 1410년대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건립 당시에는 주변에 연못이 있어 경관이 수려했다고 하나, 일제강점기에 소송 문제로 빼앗겨 현재는 연못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김문발은 낙향하여 지역 인재들에게 강학을 하고 문인들과 학문을 논하며 시를 읊는 시회장(詩會場)으로 사용하고자 이 정자를 건립하였다. 이후에는 향촌 규율을 알리고 여론을 모으는 향약의 집회 장소로 활용되었다. 정자의 이름 ‘부용’은 북송시대 주돈이(周敦頤)가 「애련설(愛蓮設)」에서 연꽃을 꽃 중의 군자라고 칭송한 데서 따온 것으로, 김문발의 호(號)이기도 하다.

부용정(芙蓉亭)_정면

부용정(芙蓉亭)_정면

취부용정(芙蓉亭)_남서면

취부용정(芙蓉亭)_남서면

부용정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민도리집으로 우물마루를 깐 맞배지붕에 홑처마이다. 기단은 네모로 바른층막돌쌓기를 하였으며, 좌우 가운데를 제외하고는 자연석 덤벙주춧돌을 놓고, 민흘림기둥을 세웠다. 사방은 벽이 없이 개방되어 있고, 천장은 연등천장을 하였으며 연골벽은 회반죽으로 마감하였다. 천장에는 부용정 현판과 후손 김철희(金喆熙)의 「부용정기(芙蓉亭記)」, 후손 김봉현(金鳳鉉)이 남긴 「부용정중수기(芙蓉亭重修)」 그리고 양응정(梁應鼎), 고경명(高敬命), 이안눌(李安訥), 박제형(朴濟珩) 등 후대 학자들의 누정제영(樓亭題詠)을 새긴 편액 10여 개가 걸려 있다. 정자 주변에는 김문발이 심었다는 광주기념물 은행나무와 부용정의 내력이 기록된 <부용정석비(芙蓉亭石碑)>가 있다.

부용정 관련 인물

부용(芙蓉) 김문발(金文發, 1359~1418)은 고려 말, 조선 초에 왜구를 물리치는 데 활약한 무인으로 전라 감사(全羅 監司), 황해도 관찰사(黃海道 觀察使), 형조 참판(刑曹 參判) 등을 역임하였다. 고려 말 도평의 녹사(都評議 錄事)로 있을 때 전라도 남원, 보성 등지에서 왜구를 격퇴한 공으로 돌산 만호(突山 萬戶)가 되었고, 1394년(태조 3)에는 김빈길(金賓吉), 김윤검(金允劒) 등과 함께 왜적선 세 척을 포획한 공으로 왕으로부터 활, 화살, 은기(銀器) 등을 하사받았다. 1406년(태종 6) 전라도 수군단무사(全羅道 水軍團撫使)로서 왜적선 한 척을 포획하는 등 왜구 격퇴에 공이 컸던 인물이다. 1411년(태종 11) 충청도 수군절제사(忠淸道 水軍節制使)에 이르렀으나 병으로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부용정을 지었다. 1418년(태종 18) 황해도 관찰사에 제수되어 부임하였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이후 낙향하여 여씨(呂氏)의 남전향약(藍田鄕約)과 주자(朱子)의 백록동규약(白鹿洞規約) 등을 모방하여 향약을 시행하고 풍속을 교화하는 데 힘썼다. 이것이 광주 향약좌목(鄕約座目)의 유래가 되었다.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 1519~1581)은 조선 명종 때의 문인으로 1552년(명종 7)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1556년(명종 11) 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홍문관 부수찬(弘文館 副修撰), 예문관 봉교(藝文館 奉敎), 성균관 대사성(成均館 大司成) 등을 역임하였다. 어릴 적부터 학문과 문장에 뛰어났고 병법에도 능하여 임진왜란을 예견하기도 했다. 은퇴하여 나주에 살면서 정철(鄭澈), 백광훈(白光勳), 최경창(崔慶昌) 등의 뛰어난 제자를 길렀다. 시문에 능하여 선조 때 8문장의 한 사람으로 뽑혔으며, 그가 쓴 228수의 한시가 전하고 있다. 그는 광주 목사(光州 牧使)로 재직하던 1568년(선조 1) 봄 부용정에서 열린 시회에 참석해 이안눌(李安訥), 임억령(林億齡) 등과 교유하며 시를 남겼고, 1569년(선조 2)에는 광주 판관 양사기(楊士奇), 찰방 한무선(韓茂善) 등과 무등산을 유람하고 입석대(立石臺)에 금석문을 남겼다. 광주 목사였던 그의 선정을 기리는 <목사양공응정선정비(牧使梁公應鼎善政碑)>가 남아 있다.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은 조선 선조 때의 문인이자 의병장으로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 참전하여 전사하였다. 전라도 광주 출신으로 1552년(명종 8)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호조 좌랑(戶曹 佐郞),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을 거쳐 홍문관 교리(弘文館 校理)까지 올랐다. 1563년(명종 18)에 파직되어 낙향한 때로부터 1581년(선조 14) 영암 군수로 다시 나갈 때까지 18년간 고향인 광주에서 지내며, 부용정의 시회장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574년(선조 7) 여름에는 당시 광주목사였던 양응정(梁應鼎) 등 호남의 이름난 문인들과 함께 무등산을 유람하며 뛰어난 시문을 남겨 󰡔유서석록(遊瑞石錄)󰡕을 편찬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종후(高從厚), 인후(高因厚)와 함께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금산(錦山)에서 곽영(郭嶸)의 관군과 함께 왜군에 맞서 싸우다 둘째 아들 인후와 함께 전사하였다. 사후에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광주 원산동에 있는 포충사(褒忠祠)는 그를 기리기 위해 1601년(선조 34)에 지은 사당이다.

부용정 관련 기록자료

『광주읍지(光州邑誌)』 「누정(樓亭)」 편에는 부용정과 관련된 누정제영(樓亭題詠)이 여러 편 수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부용정의 주인인 김문발이 부용정을 건립하며 지은 시 「부용정원운(芙蓉亭原韻)」이 있다. 물가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었던 소망을 담아, 고향으로 돌아와 연못 근처에 정자를 짓고 한가롭게 지내는 삶을 그린 시이다. 현재는 사라진 연못의 존재를 이 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김문발(金文發)의 누정시 -

오랫동안 강호에 낚싯대 드리우길 꿈꾸다가 (久夢江湖一釣絲)
이제 옛 마을 돌아와 연꽃 연못에 세웠다네 (今歸故里築蓮池)
내가 본래 성격상 깊고 외진 곳을 좋아하니 (我曾性愛居幽僻)
산이 높아서 달이 늦게 뜨더라도 괜찮지 뭐 (不妨山高月上遲)

김문발(金文發)의 누정시

김문발(金文發)의 누정시

김문발이 세상을 떠난 지 150년 뒤인 1568년(선조 1) 비내리는 봄날에 광주의 선비들은 부용정에 모여 시회를 열었다. 당시 광주 목사였던 양응정과 낙향하여 고향에서 지내던 고경명, 그리고 고경명의 문인인 명암(鳴巖) 김형(金迥) 등 여러 문인들이 참석하였고, 광산 김씨 집안사람들도 자리를 함께했다. 그때 남긴 시편이 부용정에 현판으로 새겨져 있다.


양응정은 김문발의 시에 차운한 시 「부용정운(芙蓉亭韻)」을 남겼다. 이 시는 양응정의 문집인 『송천선생유집(松川先生遺集)』에 “칠석 모정에서 짓다[題漆石茅亭]”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는데, 부용정이 칠석동에 자리하고 있어 붙여진 제목으로 보인다. 시회를 열었던 당일의 풍경을 묘사하고, 시회에 참석한 문인들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담겨 있다.

- 양응정(梁應鼎)의 누정시 -

아침나절 실비 내리는가 싶더니 (朝來雨意欲絲絲)
석양의 맑은 빛 푸른 못에 그득하다 (向晩晴光蕩綠池)
좋은 만남 어이 하늘이 준 게 아니랴 (佳會豈非天所借)
나의 행차를 스스로 천천히 한다네 (使君行色自應遲)

양응정(梁應鼎)의 누정시

양응정(梁應鼎)의 누정시

고경명은 부용정의 시에 차운한 시 「근차부용정운(謹次芙蓉亭韻)」을 남겼다. 관의 업무를 처리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시회에 함께 해준 양응정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담고 있으며, 봄날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시이다.

- 고경명(高敬命)의 누정시 -

관부 문서에 실타래처럼 엮였다가 (官裏文書綴亂絲)
봄철 순시차 또 습가지에 왔다네 (行春又到習家池)
술에 취하려 수레를 멈춘 게 아니라 (非關泥酒停騶御)
버들과 꽃 찾느라 부러 굼뜬 거라네 (問柳尋花故作遲)

고경명(高敬命)의 누정시

고경명(高敬命)의 누정시

김형은 「복보(伏步)」라는 시를 통해 선배 시인들에 대해 추앙하는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김형은 시회에 함께 참석한 양응정, 이안눌, 고경명을 시선(詩仙)에 빗대어 표현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차운한 시를 쓰고 있다. 특히, 공무로 바쁜 양응정, 이안눌 두 지방관을 자주 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담고 있다.

- 김형(金迥)의 누정시 -

힘겹게 시선들 추억하느라 쉬 백발 되니 (苦憶詩仙鬢易絲)
괜히 남은 운치에 함지를 번갈아 읊는다네 (空留遺響軼咸池)
한 쌍 물오리 떠나 뒤엔 소식이 없는데 (雙鳧去後無消息)
그 어느 단구에서 느긋하게 있으려나 (何處丹邱白日遲)

김형(金迥)의 누정시

김형(金迥)의 누정시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