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기관별 검색

검색 범위 지정 후 검색어를 넣지 않고 검색버튼을 클릭하면 분류 내 전체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전체 으로 검색된 결과 84193건입니다.

정렬갯수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竹 敦睦吾宗自有名每逢安樂好相迎家門不意 胡爲病隣里凄然晩哭聲一死一生皆定理百 回百壽亦無情{艹+韱}歌類曲靑山路四顧彷徨睡 豈成 族姪 極煥 謹再拜 哭輓 松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권병국(權炳國)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권병국 李殷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권병국(權炳國)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권병국(權炳國)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들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권병국은 화산(花山), 곧 안동(安東)권씨의 후손이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933년 이철수(李喆壽) 사매공립보통학교(巳梅公立普通學校) 통신부(通信簿) 2 고문서-증빙류-증서 교육/문화-근대교육-성적표 昭和八年 月 日 巳梅公立普通學校 李喆儔 昭和八年 月 日 巳梅公立普通學校 李喆儔 전북 남원시 0.6*0.4 2개(적색, 타원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33년에 작성된 이철수(李喆壽)의 사매공립보통학교(巳梅公立普通學校) 통신부(通信簿). 남원(南原)의 사매공립보통학교(巳梅公立普通學校) 6학년 학생 이철수(李喆壽)의 1933년도 통신부(通信簿)이다. 이철수라는 이름으로 기재된 사매공립보통학교 통신부가 2건 전하고 있는데, 하나는 5학년의 기록이고 다른 하나는 6학년의 기록이다. 이 통신부는 6학년 때의 1학기와 2학기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통신부는 학생의 학업성적과 출석 상황 등 학교에서의 생활을 기록하여 학생의 가정으로 보내는 학생의 성적통지표이다. 이 통신부에는 학년의 과정을 수료하였음을 증명하는 증명서(證明書)와 수업증(修業證)이 인쇄되어 있다. 학업성적과 출석상황을 기록한 항목에는 1학기, 2학기, 3학기 등 세 학기로 나누어, 수신(修身), 국어(國語), 조선어(朝鮮語), 산술, 역사, 지리, 이과, 도화(圖畵), 창가(唱歌), 체조, 재봉(裁縫), 실업(實業), 평균, 조행(操行), 판정(判定) 등의 항목에 점수를 갑(甲), 을(乙) 등으로 매겼다. 다음으로 출석일수와 결석일수를 적었는데, 결석일수는 다시 병기(病氣), 사고(事故), 기인(忌引), 지참(遲參), 조퇴(早退) 등의 일수를 기록하였다. 이어 식일(式日)에는 출석, 결석 등을 기록했다. 이어서 주임훈도(主任訓導)와 보호자인(保護者印)의 도장을 찍어 확인하도록 하였다. 학업성적과 출석상황 다음으로는 신체의 상황을 1학년, 2학년, 3학년, 4학년, 5학년, 6학년 등으로 나누어, 검사월일, 연령, 신장, 체중, 흉위, 발육, 영양, 척주, 시력, 색신(色神), 안질, 청력, 치아, 질병, 개평(槪評) 등을 기록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통신부에는 신체의 상황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학교가정통신난, 시업시각(始業時刻), 수업료, 자수시간(自修時間) 등의 난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학교장과 보호자의 이름을 쓰는 난과 주소를 기입하는 난이 있었다. 보호자의 이름이 이용기(李容器)로 되어 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924년 이금강산(李金剛山) 보절공립보통학교(寶節公立普通學校) 1학년 수업증서(修業證書) 고문서-증빙류-증서 교육/문화-근대교육-졸업장 大正十三年三月卄七日 寶節公立普通學校 李金剛山 大正十三年三月卄七日 寶節公立普通學校 李金剛山 전북 남원시 3.5*3.5 1개(적색, 정방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24년 3월에 남원(南原)의 보절공립보통학교(寶節公立普通學校)에서 이금강산(李金剛山)에게 발급한 1학년 수업증서(修業證書). 1924년 3월 27일에 남원(南原)의 보절공립보통학교(寶節公立普通學校)에서 이금강산(李金剛山)에게 발급한 1학년 수업증서(修業證書)이다. 1학년의 전과정의 수료하였음을 증명하는 수료증명서인 셈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修業證書李金剛山大正六年十一月九日生普通學校第壹學年ノ課程ヲ修了セシコトヲ證ス大正十三年三月卄七日 [學校印]寶節公立普通學校第貳九號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안두섭(安斗燮) 만사(輓詞)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安斗燮 安斗燮 전북 남원시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죽계(竹溪) 안두섭(安斗燮)이 지은 만사(輓詞) 죽계(竹溪) 안두섭(安斗燮)이 지은 만사(輓詞)이다.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향리(鄕里)에서 오복(五福)을 누린 인물로 칭송을 받은 고인을 추모하고 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송암실기(松菴實記) 松菴實記 松菴實記 고서-집부-별집류 교육/문화-문학/저술-시 전북 남원시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송암(松菴) 박문수(朴門壽)의 문집 본 송암실기(松菴實記)는 박문수(朴門壽)의 문집이다. 송암은 박문수(朴門壽)의 호이다. 국한문혼용체(國漢文混用體)이며, 3권 1책의 단권(單卷)이다. 1967년에 연활자(沿活字)로 간행한 것이다. 하지만 어디서 인쇄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출판기(出版記)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책 말미(末尾)에 나오는 발문을 통하여 출판 시기를 알 수가 있다. 발문은 박문수의 후손인 박중식(박仲植)이 썼다. 말미를 보면 "세재정미원월하한 후손중식근식(歲在丁未元月下澣 後孫仲植謹識)"라고 나온다. 박문수는 본관이 죽산(竹山)이었는데, 죽산박씨의 시조가 바로 박문수였다. 박문수는 고려 말에 우의정(右議政)을 지낸 인물로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고려 왕조의 신하로서 절개를 지켰다. 오늘날 남원의 수지면(水旨面) 호곡리(好谷里)에 사는 홈실박씨들이 바로 이 박문수의 후손들이다. 그런데 박문수의 문집인 송암실기는 이미 두 차례나 발간된 적이 있었다. 첫 번째의 것은 1856년(철종 7) 목활자본(木活字本) 3권 1책으로, 이 책의 서문은 송래희(宋來熙)가 섰고, 발문은 오희상(吳熙常)이 썼다. 그러다가 1907년에 박주현(朴周鉉)의 발문을 붙여 다시 한 번 간행하였는데, 1907년본도 목활자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60년이 흐른 1967년에 와서 연활자본으로 다시 한 번 송암실기를 펴내게 된 것이다. 책의 내용은 전혀 바꾸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연활자본 송암실기의 표지 뒷 장을 모면 "백세풍송(百世風聲)"이라고 하는 네 글자가 인쇄되어 있는데, 이는 송암실기의 주인공 박문수의 명성이 백 세 동안 지속되기를 바라는 후손의 마음을 담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일석유고(一石遺稿) 一石遺稿 一石遺稿 고서-집부-별집류 교육/문화-문학/저술-문집 전북 남원시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생존한 학자 최병하(崔炳夏)의 시가(詩歌)와 산문(散文)을 엮어 1965년에 간행한 시문집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생존한 학자 최병하(崔炳夏)의 시가(詩歌)와 산문(散文)을 엮어 1965년에 간행한 시문집이다. 6권 2책의 석인본(石印本)이다. 최병하의 손자인 최성익(成翼)이 편집하고 간행하였다. 권말에 손자 성익의 발문이 있다. 권1∼4에는 시(詩) 722수, 권5에 기(記) 12편, 서(序) 7편, 발(跋) 1편, 제(題) 2편, 행장 2편, 비음기(碑陰記) 1편, 묘갈명(墓碣銘) 2편, 제문(祭文) 2편, 상량문(上樑文) 7편, 잡저(雜著) 2편, 권6에 부록으로 행장(行狀) 1편, 묘갈명 1편, 제문 2편, 만사(輓詞) 7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록된 글 중 주목되는 것은 "피발변입임실산중탄세연차염락운(避髮變入任實山中嘆世連次濂洛韻)"라는 제목의 시다. 이 시는 단발령(斷髮令)을 피해 전라북도 임실군의 산 속으로 들어가 세상을 탄식하며 지은 것이다. 그리고 "산당관조(山塘觀釣)"에서는 고기가 미끼를 탐하다가 잡히는 것을 보고, 벼슬을 탐하는 세상 사람을 풍자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잡저 중 "육탄(六歎)"은 우리의 고유 문화가 파괴되고 무분별한 외래문화가 유입되는 시태, 그리고 인재등용과 과거제도의 폐해 등 6가지 시폐를 지적한 글이다. 본 일석유고는 구한말의 학자인 최병하라는 인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一金 拾陸圓持去홈大正十一年壬戌十二月九日 宋柱益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모년(某年) 김창술(金昌述) 문기(文記) 고문서-명문문기류-가사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가사매매명문 金昌述 등 金昌述 등 전북 남원시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용현리에 있는 김창술(金昌述)과 송산리언(松山理彦) 소유의 가대(家垈)의 규모를 기록한 문기(文記) 용현리에 있는 김창술(金昌述)과 송산리언(松山理彦) 소유의 가대(家垈)의 규모를 기록한 문기(文記)이다. 가대의 매매를 위하여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용현리는 남원(南原)에 있는 지명으로 추정되지만, 어느 곳인지는 알 수 없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계약서

1932년 백문삼(白文三) 토지소작계약서(土地小作契約書) 고문서-명문문기류-계약서 경제-매매/교역-계약서 昭和七年三月十七日 白文三 李容器 昭和七年三月十七日 白文三 李容器 전북 남원시 0.9*0.9 1개(적색, 원형), 1.1*0.8 1개(적색, 타원형), 1.4*0.9 1개(적색, 타원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32년 3월에 백문삼(白文三)이 작성한 토지소작계약서(土地小作契約書) 1932년 3월에 백문삼(白文三)이 작성한 토지소작계약서(土地小作契約書)이다. 당시 백문삼은 남원군 보절면 도룡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 문서에 지주(地主)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지만, 이 문서가 남원의 전주이씨 소장문서이고, 같은 시기에 작성된 토지소작계약서에 지주를 이용기(李容器)로 밝히고 있는 것도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용기가 지주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용기는 관련문서에 따르면 남원군 보절면 신파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소작료 등 8개의 조항이 계약서에 적혀 있고, 토지소재, 지번, 지목, 지적, 지가, 적요 등 6개 항목을 정리한 표가 그려져 있었지만, 이것은 이미 인쇄된 서식에 지나지 않고, 소작료의 액수 등 구체적인 내용은 적혀 있지 않다. 다만, 소작인과 연대보증인 2인의 주소와 성명에 날인만 찍혀 있다. 요컨대 사실상 백지 계약서나 다름없는 토지소작계약서인 셈이다. 1920년대 일제는 산미증식계획에 따라 생산량의 증대를 꾀하면서 미곡의 본격적인 수탈에 나섰다. 연평균 미곡생산량이 증가하였지만 한국인의 1인당 미곡소비량은 1917∼1921년 평균 0.68석에서 1927∼1931년 평균 0.49석으로 감소하였다. 이는 산미증식계획이 한국 농민의 식량을 약탈하여 일본인들의 배를 채우는 제국주의 식량수탈정책의 표본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의 일환으로 시행된 토지개량사업은 대지주에게 실질적인 혜택이 돌아가는 수리조합 설치비용을 중소지주·자작농·자소작농, 심지어 소작농민들에게까지 전가함으로써 이들의 경제적 몰락을 촉진시켰다. 따라서 1920년대 농민층은 자작농→자소작농→소작농·화전민으로 하층분해되어 갔다. 소작농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든 것은 지주의 고율소작료 부과와 마름의 횡포였다. 소작인은 지주의 지시에 따라 소작계약서를 제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소작계약서에는 소작료의 납입방법과 기준, 계약기간 설정 등이 명시되어 있다. 이 기준에 의하면 소작인이 부담해야 할 소작료는 지대(地代)와 토지개량비, 영농에 필요한 자재비, 공과금을 포함한 것이다. 그밖에도 소작인들은 소작료 운반비와 종자대·수리조합비·비료대까지 부담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따라서 소작인들은 수리조합 구역 내에서는 수확량의 7∼8할까지도 소작료로 지불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마름은 지주를 대신한 소작지 관리인으로 농민들에게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이들은 소작계약 체결권을 악용하여 소작인들의 경작권을 위협했고, 소작료를 증액하며, 소작인들의 선물증여 등 물품공세 여부에 따라 소작권을 이동하는 등 각종 폐해를 자행하였다. 그 외에도 소작인에게서 받는 소작료와 지주에게 납부하는 소작료 사이의 차액을 가로채고, 추수 종사원들의 접대비를 소작인에게 전가시키며, 소작인에게 금전이나 곡물을 고리대로 빌려주거나 물자를 고가로 팔아 폭리를 취하였다. 따라서 1920년대 농촌은 산미증식계획에 따른 수리조합 건설비의 부담과 고율 소작료 등으로 농민층은 경제적으로 몰락하여 갔고, 거기에 더한 마름의 횡포로 인해 소작농민의 궁핍화는 가속화되었다.(1920년대의 대중운동, ?신편한국사? 49, 국사편찬위원회, 2002)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山 後我三春並此世奈何末路去先之髮膚不變先王法 禮貌無從俗世儀床瑟早年多憾歎泉坮是日倍傷悲善 家自古天應福藉藉鄕隣衆口碑 隔界友眞珠沈仁鐸謹 拜哭挽 水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仙 雪岺朝旭映丹旌哀輓飄飄祖馬鳴甑麓含悲流水咽 老楊垂淚白雲輕稀齡完福知天厚孝子能孫守 業明悅話溫容難復見下生空有不勝情 下生 金振石 謹再拜哭輓 佛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古云七十世皆稀公是九旬仙化歸吉地回龍衝海起上天 駕窩向雲飛苓年荊棣雖有感後日芝蘭正報輝問 구新元無恙過奎然何祟與吾違 陽界友 吉珠沈仁圭 謹拜哭輓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吁銅章觀象識得周天之常度度曆象記數推占歲日之運行則可以知朞三百有六旬有六日之義也何則天行健常一日一周而過一度日行遲雖一日一周而退一度是故周天之常度則有三百六十五度四分度之一也日之行則積三百六十五日九百四十分日之二百三十五而後與天會而爲一歲日行之數也然則周一歲之日數其非三百六十六日乎倘與天會而沕合天度則推可知周年之日數也旣麗天行而步驗天度則從可{目+制}朞年之日數也故古聖王置閏成歲之際嗟歎而告之曰朞三百有六旬有六日不其然乎是知每歲日數只有三百六十日而又有六日者日與天會而叶天之常度也一歲常數不過三百六旬而且有六日者合天度而得氣之盈數也乃所謂朞三百有六日者非耶知夫天垂象聖人則之故先後天而不違明之以周年之日數者是己仰天路而同軌告之以朞年之日數者亦是已苟非欽明之聖孰使之而明其然也執此以究則書義可{目+制}矣請申之盖朞者周一歲之謂也日與天行或過或退而會合天度則一歲之日數若是乎三百有六旬有六日也何以明之璇璣旋斡理會一天之度數玉管窺察推占三辰之躔度則進退疾徐之度過差會合之理各有分數而天有三百六十五度四分度之一也歲有三百六十五日四分日之一也以此推之朞三百六旬六日之數不難明矣然則稽古帝堯欽昊授時之餘置閏成歲之際明其周年之日數而咨汝羲和者有是夫大抵歲有十二月月有三十日而通計三百六十者一歲之常數也常數之外多五日九百四十分日之二百三十五者與天會而爲氣盈也月與日會而少五日九百四十分日之五百九十二者爲朔虗合氣盈朔虗而爲閏者所以消其盈息其虗之意也定時成歲之道在於置閏所以置閏之法在於朞年之日數則書經駕說不其宜乎嗚呼天日臨想象運行之度數而朞年之日數則千歲之日至可坐而致也噫雲過太虛至治無跡蓂庭午日餘輝尙存常想於千載之下而尤以以是多感焉吁 謹義(背面)義盈字軸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852년 박진환(朴震煥) 완문(完文) 고문서-증빙류-완문 정치/행정-명령-완문 壬子 박진환(朴震煥) 壬子 1852 전북 남원시 [署押] 6.5*6.5(정방형) 적색 7개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1852년(철종 3) 6월에 남원부사(南原府使)가 기지방(機池坊)에 사는 박진환(朴震煥)에게 내려 준 완문(完文) 1852년(철종 3) 6월에 남원부사(南原府使)가 기지방(機池坊)에 사는 박진환(朴震煥)에게 내려 준 완문(完文)이다. 문서에는 작성연대를 임자년으로 적고 있으나, 관련문서와 종이의 상태로 미루어 볼 때 1852년으로 추정된다. 기지방은 전라도 남원군(南原郡)에 속한 48방(坊)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므로 이 완문은 남원도호부사(南原都護府使)가 발급한 것이다. 완문이란 판결문을 의미한다. 민원인으로부터 어떤 요구가 있었을 때, 그에 대한 최종 판결을 이 완문을 통하여 통보해 주었던 것이다. 남원도호부사가 박진환에게 본 완문을 발급해 준 이유는 박진환이 억울함에 대한 호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진환에 따르면 자신과 10촌간이 되는 인석(仁錫)이라는 자가 지난 계미년(癸未年)에 어떤 산송(山訟) 사건에 패한 일로 인하여 포보(砲保) 사번(四番)의 역(役)에 부과되는 처벌을 받았다. 여기서의 계미년은 1823년을 가리키며, 산송 사건이란 투장(偸葬)으로 인해 벌어지는 송사(訟事)를 말하는 것이요, 투장은 남의 선산(先山)에 자신의 부모 묘를 몰래 조성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위 인석은 자신의 아버지나 혹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 분의 무덤을 남의 선산에 몰래 만들었다가 그 선산의 산주(山主)가 이를 알아차리고 인석을 관에 고발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인석은 투장한 무덤을 파가야 했으며 아울러 그 벌로 포보에 편입되는 벌칙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자 인석은 이러한 수령의 조처에 대해 여러 차례 소지를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였고, 수령으로부터 포보를 면제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 혜택을 받지 못하고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미 30년이나 지난 일인데, 그 30년 동안 인석에게 부과되었던 포보가 자신이 계속 부담하는 이른바, 족징(族徵)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에 박진환이 자신이 처한 억울함으로 호소하고 포보에 편입된 것을 해제해 달라고 하면서 소지를 올렸고 마침내 남원도호부사로부터 그 요구를 들어주라는 답변을 받아낸 것이다. 본 완문은 조선후기 향촌사회에서의 족징 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문서라고 할 수 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교령류

吏曺嘉慶十七年七月初七日奉敎啓功郞朴龍祜爲務功郎者嘉慶十七年七月 日權知承文院副正字壬七別加行判書 叅判 叅議臣鄭[署押] 正郎 佐郞(背面)吏吏 李基黙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芝德門公是一靈光仁善平生壽且康承先貽後傳基業保族齊家誦里鄕皓首八旬南極老鵑花二月悲邙所了債人間無餘憾芳蘭玉樹帶春長 侍生 眞珠沈相政 謹再拜哭輓蘭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최영연(崔永演)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崔永演 李殷弼 崔永演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최영연(崔永演)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최영연(崔永演)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고시체의 장문의 시였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인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최영연은 유학자로, 생전의 친구와 헤어짐이 안타까워 시를 지었다.

상세정보
84193건입니다.
/4210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