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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913년 김남석(金南石)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大正貳年三月八日 李己五 金南石 大正貳年三月八日 李己五 金南石 전북 남원시 [印] 3개 1.0*1.0 3개(적색, 원형), 1.2*0.8 2개(적색, 타원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13년 3월 8일에 이기오(李己五)가 장수군(長水郡) 상번암면(上番岩面) 상북리(上北里)에 있는 논을 김남석(金南石)에게 팔면서 함께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13년 3월 8일에 이기오(李己五)가 장수군(長水郡) 상번암면(上番岩面) 상북리(上北里)에 있는 논을 김남석(金南石)에게 팔면서 함께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이기오는 자신이 매득하여 여러 해 동안 농사를 지으며 먹고 살아 왔던 상북리 치구평(峙舊坪) 38번지 논 3야미 1두락을 김남석에게 10원에 팔았다. 거래 당시 신문기 1장을 매입자에게 건네주었다. 나중에 만약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로 증명하라고 하였다. 매매 당시 매주(賣主) 이기오와 매수인 김남석 그리고 보증인(保証人)으로 조백규(趙伯奎) 등 3인이 참여하여 함께 날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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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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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大正二年四月七日 前明文右明文事自己買得畓屢年耕食是多可以要用所致伏在長水郡上番岩面上北里長峙坪宙宇四0畓六夜味一斗三升落結一負長尺坪宙字六二畓四夜味二升落結三束㐣價折錢文貳拾円依數交易捧上是遣右前以新文一丈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說則以此文憑考事大正貳年七月卄六日長水郡上番岩面上北里一統一戶賣主 金永西[印]長水郡上番岩面上北里一統七戶買主 金南石[印]長水郡上番岩面下北里三統四戶保證人 趙伯奎[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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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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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九月十八日精租五十六斗 錫晥分米条收入靑播種一斗只分 種子肥料代四百円支拂精租七十八斗 明哲分米条收入洋菴四十二円五十戔 南原用七十円 葉代益壽条二千五百円 家錢借用 九月十六日洋菴条二千四百円 契約金条 十円 雲館二百五十円 掘?當▣費 二十円 歷玉代三百三十円 叺十介代 十円 雲館百五十円 白米運賃四円 郵票代五十円 獒樹市場費用八十五円 燒酒一甁代七円 唐黃代金千三百六十六円出給二百四十円 運賃八十円 路費千六八十六円內 二百五十円除 千四百三十六円◯九月南原行十四日宗里食糧事 五叺 二叺 吳榮聞 二叺二益南 一叺二洋器光州農牛放賣事翻德林野及垈地事 六叺 洋器處入◯元川省墓事求禮收入事土稅結定事利穀收入事土地放賣事債務正理事收支正確序算事內黃處理事收得稅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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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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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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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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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표곡실기(豹谷實紀) 豹谷實紀 豹谷實紀 고서-집부-별집류 교육/문화-문학/저술-시 豹谷實紀 池繼漼 전북 남원시 1.2*1.2 .개(적색, 정방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지계최(池繼漼)가 지은 표곡실기(豹谷實紀) 1933년 지계최(池繼漼)의 10대손인 지응현(池應鉉)이 편집하고 간행한 것이다. 2권 1책의 석인본(石印本)이다. 권두(卷頭)에 민병승(閔丙承), 김영한(金寗漢), 고광선(高光善), 안택승(安宅承) 등의 서문(序文)이, 권말(卷末)에는 지응현의 발문이 있다. 내용을 보면 우선 지계최의 유상(遺像)과 유상찬(遺像贊) 그리고 묘도(墓圖)가 있다. 권상(卷上)에는 교서(敎書) 1편, 유문(遺文)으로 소(疏) 1편, 부록으로 비지(批旨) 1편, 사제문(賜祭文) 1편, 만장(輓章) 7수, 행장(行狀), 장발(狀跋), 통문(通文), 소(疏) 각 1편, 찬(贊) 3편, 추모시(追慕詩) 13수, 권하(卷下)는 묘표(墓表) 1편, 사적비명(事蹟碑銘) 1편, 추모문(追慕文) 18편, 후학추모시(後學追慕詩) 397수 등이 수록되어 있다. 교서는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도원수 장만(張晩) 등과 안현(鞍峴)에서 크게 전공을 세우고 난을 평정한 데 대한 공훈으로 지계최를 진무공신(振武功臣)에 책록하고 은전(恩典)을 하사하라는 내용의 문서이다. 여기에는 장만을 비롯한 32인의 공신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유문인 「자원부적소(自願赴敵疏)」는 1631년(인조 9)에 올린 것으로서, 1624년 이괄의 난으로부터 1627년(인조 5) 병자호란(丙子胡亂) 때까지의 국내 사항과 당시 노적(奴賊)의 침해가 심하던 관서(關西) 지방의 토벌을 자원하는 내용이다. 부록의 비지는 저자(著者)의 자원상소(自願上疏)에 대하여 왕이 윤허를 내리는 내용이다. 「평안도열군유생상소(平安道列郡儒生上疏)」는 1733년(영조 9) 소두(疏頭)인 유학(幼學) 김이흠(金履欽) 등이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 공훈을 세우고 순국한 저자에 대하여 정려(旌閭)와 포상을 내려주기를 청원하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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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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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을사년(乙巳年) 견문록(見聞錄) 乙巳年 見聞錄 고서-사부-전기류 개인-생활-일기 乙巳 乙巳 1965 南原 全州李氏家 전북 남원시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을사년(乙巳年)과 병오년(丙午年) 중춘(仲春)에 남원(南原)의 전주이씨가(全州李氏家)에서 작성한 견문록(見聞錄) 을사년(乙巳年)과 병오년(丙午年) 중춘(仲春)에 남원(南原)의 전주이씨가(全州李氏家)에서 작성한 견문록(見聞錄)이다. 지질(紙質)이나 글씨로 보아 을사년은 1965년을, 병오년은 1966년을 가리킨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표지를 보면 임오산방(林悟山房)이라는 글자가 나오는데, 이는 본 견문록을 쓴 사람의 호(號)라고 판단된다. 하지만 임오산방이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다. 견문록(見聞錄)이란 일반적으로 여행 등의 과정에서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적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견문록이라면 본인의 저작을 수록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하지만 본 전주이씨가 견문록은 그와 조금 다르다. 임오산방의 작품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작품을 옮겨 적은 것이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본서에 실린 "퇴계금강산운(退溪金剛山韻)", "송시인영차 의재허백련설(宋詩人詠茶 毅齋許百鍊說)", "한석봉금산시(韓石峯金剛詩)", "송우암금강시(宋尤庵金剛詩)", " 매월당한계사운(梅月堂寒溪寺韻)", "영조시시인월암李匡呂(英祖時詩人月岩李匡呂)", " 순시시(李純信詩)" 등의 시들은 당연히 임오산방의 작품이 아니다. 임오산방은 위 시들을 일고 나름대로 기록해 두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듯하다. 그런가하면 임오산방에는 역사적 인물에 관한 간단한 이력을 정리한 것도 있다. 예를 들어 "운곡 원천석 자자정 원주인(耘谷 元天錫 字子正 原主人)", "박팽년 자인수 호취금헌(朴彭年 字仁叟 號醉琴軒)"이라고 한 부분이 그러한 예인데, 이런 예는 많이 있다. 본 견문록은 1960년대 지방 양반들의 관심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라고 판단된다. 전체 분량은 표지를 제외하고 21장 42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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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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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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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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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922년 송주익(宋柱益) 문기(文記) 고문서-증빙류-영수증 경제-회계/금융-영수증 大正十一年壬戌十二月九日 宋柱益 大正十一年壬戌十二月九日 宋柱益 전북 남원시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22년 12월 9일에 송주익(宋柱益)이 작성한 문기(文記) 1922년 12월 9일에 송주익(宋柱益)이 16원을 가져갔다고 확인하면서 작성한 메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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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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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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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

1932년 정창모(鄭昌謨) 토지소작계약서(土地小作契約書) 고문서-명문문기류-계약서 경제-매매/교역-계약서 昭和七年三月十七日 鄭昌謨 李容器 昭和七年三月十七日 鄭昌謨 李容器 전북 남원시 0.9*0.9 1개(적색, 원형), 1.1*0.8 1개(적색, 타원형), 1.4*0.9 1개(적색, 타원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32년 3월에 정창모(鄭昌謨)가 작성한 토지소작계약서(土地小作契約書) 1932년 3월에 정창모(鄭昌謨)가 작성한 토지소작계약서(土地小作契約書)이다. 당시 정창모는 남원군 보절면 도룡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 문서에 지주(地主)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지만, 이 문서가 남원의 전주이씨 소장문서이고, 같은 시기에 작성된 토지소작계약서에 지주를 이용기(李容器)로 밝히고 있는 것도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용기가 지주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용기는 관련문서에 따르면 남원군 보절면 신파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소작료 등 8개의 조항이 계약서에 적혀 있고, 토지소재, 지번, 지목, 지적, 지가, 적요 등 6개 항목을 정리한 표가 그려져 있었지만, 이것은 이미 인쇄된 서식에 지나지 않고, 소작료의 액수 등 구체적인 내용은 적혀 있지 않다. 다만, 소작인과 연대보증인 2인의 주소와 성명에 날인만 찍혀 있다. 요컨대 사실상 백지 계약서나 다름없는 토지소작계약서인 셈이다. 1920년대 일제는 산미증식계획에 따라 생산량의 증대를 꾀하면서 미곡의 본격적인 수탈에 나섰다. 연평균 미곡생산량이 증가하였지만 한국인의 1인당 미곡소비량은 1917∼1921년 평균 0.68석에서 1927∼1931년 평균 0.49석으로 감소하였다. 이는 산미증식계획이 한국 농민의 식량을 약탈하여 일본인들의 배를 채우는 제국주의 식량수탈정책의 표본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의 일환으로 시행된 토지개량사업은 대지주에게 실질적인 혜택이 돌아가는 수리조합 설치비용을 중소지주·자작농·자소작농, 심지어 소작농민들에게까지 전가함으로써 이들의 경제적 몰락을 촉진시켰다. 따라서 1920년대 농민층은 자작농→자소작농→소작농·화전민으로 하층분해되어 갔다. 소작농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든 것은 지주의 고율소작료 부과와 마름의 횡포였다. 소작인은 지주의 지시에 따라 소작계약서를 제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소작계약서에는 소작료의 납입방법과 기준, 계약기간 설정 등이 명시되어 있다. 이 기준에 의하면 소작인이 부담해야 할 소작료는 지대(地代)와 토지개량비, 영농에 필요한 자재비, 공과금을 포함한 것이다. 그밖에도 소작인들은 소작료 운반비와 종자대·수리조합비·비료대까지 부담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따라서 소작인들은 수리조합 구역 내에서는 수확량의 7∼8할까지도 소작료로 지불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마름은 지주를 대신한 소작지 관리인으로 농민들에게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이들은 소작계약 체결권을 악용하여 소작인들의 경작권을 위협했고, 소작료를 증액하며, 소작인들의 선물증여 등 물품공세 여부에 따라 소작권을 이동하는 등 각종 폐해를 자행하였다. 그 외에도 소작인에게서 받는 소작료와 지주에게 납부하는 소작료 사이의 차액을 가로채고, 추수 종사원들의 접대비를 소작인에게 전가시키며, 소작인에게 금전이나 곡물을 고리대로 빌려주거나 물자를 고가로 팔아 폭리를 취하였다. 따라서 1920년대 농촌은 산미증식계획에 따른 수리조합 건설비의 부담과 고율 소작료 등으로 농민층은 경제적으로 몰락하여 갔고, 거기에 더한 마름의 횡포로 인해 소작농민의 궁핍화는 가속화되었다.(1920년대의 대중운동, ?신편한국사? 49, 국사편찬위원회,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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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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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권오형(權五亨)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權五亨 李殷弼 權五亨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권오형(權五亨)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권오형(權五亨)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장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장을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예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칠언율시이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 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북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북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장을 지은 권오형은 유학자로,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그는 자신을 화산후인(花山后人)이라고 적고 있는데, 화산은 경상북도 안동시의 옛 별호이며 후인은 상대방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 자신을 낮추어 이르는 말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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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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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風全以生之全以歸不聞塵世是兼非前人孝友爲家法數畝田園忍歲饑佳兆長松環鬱鬱空樑落月照依依同鄕同契難忘誼執紼甑陽淚滿衣 花山后人權五亨謹拜哭輓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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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박은수(朴殷秀)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朴殷秀 李殷弼 朴殷秀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박은수(朴殷秀)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박은수(朴殷秀)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장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장을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예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칠언율시이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 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북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북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장을 지은 박은수는 유학자로, 본관은 강릉(江陵)이다. 만장에 임영후인(臨瀛后人)라 적었는데 여기서 '임영'은 강릉의 옛 지명이다. 후인은 상대방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 자신을 낮추어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박은수는 망자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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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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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松聞公礿訃感於前使我先君淚自然仁壽皆称姜八十齊家猶足范三千無窮傳世多孫列罔極呼天諸子賢仙界云何悲門外薤歌忽斷白雲邊 臨瀛后人生 朴殷秀謹再拜哭輓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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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松 寄生歸死理皆同八十二年摠夢中敦睦貴門猶作 棟康寧鄕黨孰如公靑氊舊業榮餘牘一孕寶蘭恨 未窮山寂寂芳人不見嗚呼此別向誰通 安東后人 戚弟 權鍾明 謹再拜哭輓 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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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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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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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김호준(金鎬俊)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金鎬俊 李殷弼 金鎬俊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김호준(金鎬俊)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김호준(金鎬俊)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고시체의 장문의 시였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인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김호준은 유학자로, 선산(善山)의 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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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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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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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이범철(李範澈)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李範澈 李殷弼 李範澈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이범철(李範澈)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이범철(李範澈)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장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장을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예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칠언율시이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 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북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북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장을 지은 이범철은 유학자로, 본관은 완산(完山)이다. 그는 자신을 시생(侍生)이라고 적고 있는데, 시생이란 웃어른을 대하여 자기를 낮추어 가리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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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권창섭(權昌燮)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權昌燮 李殷弼 權昌燮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권창섭(權昌燮)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권창섭(權昌燮)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장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장을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예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칠언율시이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 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북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북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장을 지은 권창섭은 유학자로,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그는 자신을 고종형(姑從兄)이라고 적고 있는데, 고종형이란 나이가 자기보다 위인 고종사촌을 의미한다. 따라서 권창섭은 망자와 사촌지간이며 망자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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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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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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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兄與弟也歲經年忽聞今朝已化仚千事萬念虛所意孫枝子葉正凄然無人古厔殘㬻月歸路前川鎖暮烟一去靑山何日逅哀聲數曲淚沾巾 地上 姑從兄 安東權昌燮 拜哭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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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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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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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松 高峯山下世同隣朝暮相從我作親甑峀淸風遊樂日鏡湖寒 月鉤罷濱於恭於敬孫有德觀志觀行子克仁非不侍湯誠孝薄 緣何所?未回春 侍生鷄林金正國謹拜哭輓 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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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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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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梅 生長一里在西東竹馬交馳志尙同侍酒接人多勝友睦 婣諸族有仁風趨庭文武悲哀極遺宅馨香世 代隆舊情益切相思日何日更逢恨不窮又歲後相逢 如昨日初聞蘭報覺春夢借問仙源何處是白雲流水碧山中 情友鷄林后人 金正珪 謹拜哭輓 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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