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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인년 정재훈(鄭在勳) 위장(慰狀)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甲寅七月初三日 內從 鄭在勳 甲寅七月初三日 1914 鄭在勳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갑인년 7월 초3일에 內從 鄭在勳이 모친상을 당한 외종사촌에게 보내는 慰狀. 갑인년 7월 초3일에 內從 鄭在勳이 모친상을 당한 외종사촌에게 보내는 위문편지이다. 편지 내용은, 뜻밖의 흉변으로 先夫人 丁氏가 色養(어버이 안색을 살펴 孝養함)을 갑자기 버리셨으니 부고를 받고서 놀라고 슬픈 마음을 그칠 수 없다고 하면서 효심이 순수하고 지극한 상대방이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를 묻고, 세월이 흘러 어느덧 장례를 지내게 되었으니 애통함과 망극함을 어찌하겠느냐, 모친상을 당한 뒤로 기력은 어떠한지, 억지로 죽이라도 먹고 禮制를 따르기를 바란다는 뜻을 전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집에 얽매여 직접 달려가 위로할 길이 없는 처지라 괴롭다고 하였다. 편지 봉투가 남아있지 않아 수신자를 알 수 없으나 고흥류씨가에 소장된 문서임을 볼 때 편지 수신인은 柳敬浚(1855~1935)이고, 돌아가신 모친인 先夫人 丁氏는 柳永蒔의 부인인 영광정씨이며, 편지 작성일인 갑자년은 1924년으로 추정된다. 이 편지는 전형적인 위장 형식을 갖추고 있는 서간문으로 작은 글씨로 정서하였으며 서두는 "頓首再拜言"이라는 용어로 시작된다. 위장은 일반 서간에 비해 특별한 서식을 갖추고 있는데, 일반 서간에 비해 글씨를 작게 쓰고 초서가 아닌 정서를 쓰며 지면의 상단을 확연하게 띄워 쓴다. 용어 역시 수취인이 喪人일 경우 哀座下, 哀座前, 哀座, 哀次 등의 용어를 쓰고, 그가 머물고 있는 곳을 孝廬, 廬所, 廬下, 廬次, 廬史 등으로 쓴다. 편지 문두에는 稽顙, 稽顙再拜, 頓首, 頓首再拜, 省禮, 省式 등의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 용어들 역시 발급인 또는 수취인의 당시 상황이나 위계관계 등에 따라 구분하여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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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오년 학면(學勉)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庚午元月十二日 弟從兄 學勉 松峴 庚午元月十二日 學勉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경오년에 弟從兄 學勉이 보내는 간찰 경오년에 弟從兄 學勉이 보내는 간찰. *배면: 松峴 靜案 入納 雁洞追謝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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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진(朴璟鎭)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卽 査弟 朴璟鎭 卽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곧바로 査弟 朴璟鎭이 보내는 간찰 곧바로 査弟 朴璟鎭이 보내는 간찰. *상태 : 배면에 낙서 흔적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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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홍(永洪)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卽日 四從侄 永洪 卽日 永洪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卽日에 四從侄 永洪이 보내는 간찰 卽日에 四從侄 永洪이 보내는 간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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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연술(柳衍述) 간찰(簡札) 피봉(皮封)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全北 高敞郡 高敞邑 內里 柳衍述 全南 高興郡 高興面 虎山里 柳大錫氏 柳衍述 柳大錫 1顆(흑색, 원형)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柳衍述이 고흥의 족인 柳大錫에게 보낸 간찰 피봉 柳衍述이 고흥의 족인 柳大錫에게 보낸 간찰 피봉. *찢기고 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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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未詳) 간찰(簡札) 피봉(皮封)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高興郡高興面 ▣…▣同耕作組合長 高興郡高興面 ▣…▣同耕作組合長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高興郡高興面에서 ▣…▣同耕作組合長에게 보낸 簡札의 皮封 高興郡高興面에서 ▣…▣同耕作組合長에게 보낸 簡札의 皮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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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 류정하(柳珵夏) 등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庚辰四月八日 譜所內 族從 珵夏 等 8名 庚辰四月八日 柳珵夏 高興柳氏??公譜? 1顆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40년 4월 8일에 譜所內 族從 柳珵夏 등이 柳重憲에게 보내는 간찰. 1940년 4월 8일에 譜所 內 族從 柳珵夏 등이 柳重憲에게 보내는 간찰이다. 고흥류씨보소에 있는 류정하 등이 고흥군 고흥면 虎東里에 사는 류중헌에게 보낸 것으로 편지의 내용은 譜事의 일로 認可 절차를 거쳐야 하므로 各派 合單이 시급하니 정리한 單草를 가지고 방문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연결문서로 피봉 1건이 있다. 류중헌(柳重憲)은 자가 사집(士執), 호가 야산(野山), 본관이 고흥이다. 1873년(고종 10)에 태어나 1952년 9월 9일에 사망하였다. 배우자는 南陽宋氏 宋冑僖의 딸이다. 품성이 영민하고 효성스러웠으며, 經史와 義理에 밝았다. 고조부 류일영이 편찬한 ?信庵實記?를 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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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류병춘(柳秉春)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辛丑十二月九日 族姪 秉春 柳大錫 辛丑十二月九日 柳秉春 柳大錫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61년 12월에 族姪 秉春이 柳大錫에게 보내는 간찰 1961년 12월에 族姪 秉春이 柳大錫에게 보내는 간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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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정재성(丁在聲) 등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壬寅正月九日 門中代表 丁在聲 等 2名 高興面虎東里 柳桂彦 壬寅正月九日 丁在聲 丁一聲 柳桂彦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62년 丁在聲 等이 고흥 호동리 柳桂彦에게 보내는 간찰 1962년 丁在聲 等이 고흥 호동리 柳桂彦에게 보내는 간찰. *상태: 간찰 총 2장 *국한문혼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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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송정헌(宋廷憲)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丁巳二月二十七日 宋廷憲 丁巳二月二十七日 [1977] 宋廷憲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77년 2월에 大德郡 宋廷憲이 雲谷祠儒會所로 보내는 간찰 1977년 2월에 大德郡 宋廷憲이 雲谷祠儒會所로 보내는 간찰. 雲谷祠 春香祭 祭官之望에 대한 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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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류제수(柳濟水)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戊午正月二十二日 柳濟水 戊午正月二十二日 柳濟水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78년 정월에 族姪 柳濟水가 보내는 간찰 1978년 정월에 族姪 柳濟水가 보내는 간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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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상근(柳相根)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十二月十三日 族人 相根 十二月十三日 柳相根 柳重憲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柳相根이 고흥 호동의 족인 柳重憲에게 보낸 간찰 柳相根이 고흥 호동의 족인 柳重憲에게 보낸 간찰. *원문: 謹未審至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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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安洛顯【載性】 頓首拜言。聞兄怛然在憂。亦有年矣。以躬以書。幷至遷就。此豈情禮。病未躬唁。兄已鑑燭。不煩多謝。而至若書慰。決不可後於人。而尙此滯違。亦豈無由一病類聚。百種敗症。內外侵凌。神耗氣削。不省人事久矣。轉眄之頃。歲忽代謝。不審孝心純至。思慕號絶。尤復何居。惟順變節哀。俯從禮制。毋或犯古人傷孝之戒是望。達煥病情如右。不須煩溷。而强作把毫。非只疎畧失禮辭涉醜差躁迫。良覺膏肓誤人。無所不至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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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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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又 鄭義林 嗚呼。大樸一散。氣運不齊。善者未必獲福。仁者未必得壽。而誰謂君之止於斯耶。體相之端粹。風儀之慈祥。雅量之宏厚。踐履之愼密。志節之剛方。才性之穎悟。固已得於天資。而出入遊從。親賢取端。加之以講討問辨。濟之以存養省察。門路旣正。鞭策方張。眼目日以開廣。脚跟日以展拓。酬應紛沓而不以經心。遭遇險苦而不以介懷。見於色者。未見有暴戾狷忿之態。發於心者。未見有忌克殘忍之意。接人而和氣薰人。應物而誠意動物。若使假之以年。而勉其所未至。則以若天資之美。好學之篤。必將究極精微。出治光彩。而斯文世道之責。其不有在乎。嗚呼。天理之難諶。人事之倒置。一至於此耶。吾與君。不可謂非少年朋知。而至於開心見誠。定爲義理之交。則自十餘年前而始焉。密勿之情。膠漆而不足以喩其深。諧和之義。宮商而不足以喩其至。自顧平生。無一事可況於古人。而惟以吾兩人。擬之於管鮑雷陳之契。則所不辭也。見我飢困。傾囷倒廩。見我疾病。尋醫問藥。見我患厄。撤食吐哺。一日而不見。則輒書而問之。一義而未瑩。則輒聚而辨之。至於楊堤夕陽。山樓夜月。或吟哦徜徉。或酣醉慷慨。悠然有千萬人不悉之情。千萬古不盡之懷。雖時象日非。世變叵測。而以爲死則以節義同歸。生則以學問相終。豈知君不少留。而棄我如遺耶。甲午之亂。同時奔竄於永平之地。丙申之變。携手逃匿於山陽福川之間。前頭風浪。如有甚焉。則周旋急難。更與何人共之耶。入無所聊。出無所適。踽踽凉凉。萬事已矣。山長水闊。此恨何極。述哀告訣。淚落懸泉。嗚呼痛哉。靈其知否。尙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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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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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又 尹相麟梁在源曺弼承 鳴呼天乎。胡至於斯。我日新先生。倡道尒陵。遠近章掖。望門以趍之。如渴赴泉。無慮數百人。而其信之篤。守之固。若公者幾希。先生平昔之所期者何如吾林今日之所賴者何如。而乃中途而奄逝耶。追慕蘆翁而私淑之。景仰勉老而服事之。且與松沙艾山。爲道義之交。而其平生莫逆。我先生爲最。胡爲乎遄歸。使先生有獨行踽踽之歎也耶。嗚乎。金玉之相。松筠之操。不可復覩於斯世矣。蒙士有疑兮。何所就而析焉。邪說滋漫兮。孰能爲之拒焉。雨雪滿塗兮。將與誰而携手焉。藐余鯫生。辱交最殊。奬余期余。有非常調之比。今焉至此。萬事已矣。天乎天乎。此何人斯。尊靈不昧。倘鑑我懷於冥漠之中耶。嗚呼哀哉。尙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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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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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905년 최만년(崔萬年) 등 수기(手記) 1 고문서-증빙류-수기 경제-회계/금융-수기 乙巳三月十七日 崔萬年 등 3명 崔檉 崔光玉 崔鎭極 乙巳三月十七日 1905 崔萬年 崔檉 崔光玉 崔鎭極 전라북도 부안군 (手決) 4개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05년 3월에 부안에 사는 최만년 등이 작성한 수기. 1905년 3월에 부안(扶安)에 사는 최만년(崔萬年), 최석년(崔碩年), 최응두(崔應斗) 등이 작성하여 종중의 어른인 최정(崔檉)과 최광옥(崔光玉), 그리고 최진극(崔鎭極)에게 건네 준 수기(手記)이다. 종중에서는 산 아래의 전답을 번갈아가며 서로 팔았던 위 세 사람에게 그 전답 값을 납부하라고 지시를 하였지만, 이들은 그 전답을 팔았던 게 이미 아버지와 할아버지 그 윗대에 있었던 일일뿐만 아니라, 지금 자신들도 백척간두에 있는 어려운 형편이어서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뒷날 힘이 닿는 대로 우선적으로 납부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이 수기를 작성하였다. 그런데 같은 달 위 최만년, 최석년, 최응두를 포함하여 최억년(崔億年), 최응규(崔應奎) 등 5인이 종중에 또 다른 수기를 작성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이 일찍이 문중에서 빌린 산 아래 시장(柴場)을 다시 문중에 반납하고 별유사(別有司)를 정하여 이 시장을 금양(禁養)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로 미루어 보면 당시 최씨문중은 이때에 와서 문중의 재산을 대대적으로 정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위 문서를 보면, 3인 가운데 최석년은 상중이어서 수결(手決)하지 않았으며, 다른 두 사람은 모두 수결하였다. 그리고 문서의 작성은 최응규(崔應奎)가, 증인은 최학흥(崔學興)이 맡아서 하고 수결하였다. 이 수기에는 문제의 전답의 구체적인 내역이 '묘하전답초(墓下田畓草)'라는 제목 아래 쓰여진 별지(別紙)가 점련되어 있다. 19곳 총 86두락에 이르는 넓은 면적으로, 밭의 위치와 시인(時人), 즉 소작자의 이름, 매매 내력 등이 구체적으로 적혀져 있다. 어떤 곳은 여전히 소작인을 통해 경작 중인 곳도 있지만, 빚 때문에 전당을 잡힌 곳도 있으며, 소작인이 죽은 다음에 진전(陳田)으로 버려진 곳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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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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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62년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장계(狀啓) 초(抄) 고문서-소차계장류-계 국왕/왕실-보고-계 1862 全羅道觀察使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862년(철종 13)에 전라도관찰사가 조정에 올릴 목적으로 작성한 장계의 초안. 1862년(철종 13)에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조정에 올릴 목적으로 작성한 장계(狀啓)의 초안(草案)이다. 이 문서에는 작성년대가 적혀 있지 않고 문서의 끝 부분도 훼손되어 있으며, 관인도 찍혀 있지 않다. 그러나 19세기 중엽에 부안(扶安)에 살고 있었던 부안김씨(扶安金氏)와 전주최씨(全州崔氏) 사이에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산송(山訟)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를 관련 고문서들과 비교하여 검토해 보면 1862년에 작성된 문서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전라도관찰사가 이 장계에서 거론하고 있는 것은, 김정황(金禎璜) 등 부안김씨 일족이 부안 석동산(席洞山)에 있는 전주최씨의 선산 묘 7기를 무단으로 파내고 1만여주의 송추(松楸)를 마구 베어버린 사건이었다. 이 때문에 최씨가의 묘에서는 해골이 드러나기까지 하였다. 이 사건이 일어난 것은 1861년(철종 12)의 일로, 그해 2월 철종(哲宗)이 남묘(南廟)에 행행(幸行)하였을 때 최영권(崔榮權) 등 전주최씨 일족이 격쟁(擊錚)을 하고 이어서 순찰사에게 소를 올리면서 이 사건이 표면화되었다. 부안현감은 석동산에 있는 전주최씨가의 분묘를 사굴(私掘)한 혐의로 김정황과 김방제(金邦濟) 등 12명을 옥에 가두고 국문하여 자백을 받아냈다. 부안현감은 이 문제로 여러 차례 전라도순찰사에게 첩보와 서목(書目)을 올렸으며, 현재 관련문서가 남아 있다. 이들 고문서를 통해 이 문제를 좀더 자세히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최영권 등의 격쟁으로 인하여 김정황 등의 사굴(私掘) 혐의에 대한 전라도 순찰사의 조사는 이 해 1862년에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순찰사는 3월에 부안현에 감결(甘結)을 보내, 최영권의 격쟁 원정(原情)에 대한 조사관으로 김제군수를 임명하여 파견하면서 원정에서 거론된 김방제 등을 미리 대기시키라고 부안현에 지시하였다. 4월에 이르러 김방제와 김성풍(金性豊) 등은 부안현감에게 원정을 올려, 최영권의 격쟁으로 김정황이 사굴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지만, 부안현 석동산은 부안김씨들이 금양(禁養)한 지 13대째가 되는 곳이라고 반박하였다. 그해 5월에는 부안에 사는 최관석(崔觀錫)과 최겸석(崔謙錫) 등 118명이 순찰사에게 상서를 올렸다. 이에 따르면, 부안현에 사는 김방제와 김홍제 등이 4백 년 동안이나 수호한 최씨측의 선산을 빼앗으려고 하여 지난 해 봄에 격쟁을 벌여 "조사를 하라"는 판교(判敎)를 받았고 순찰사의 제음(題音)도 받았으나 무슨 곡절인지 처결을 받지 못하였다. 그 해 가을에 최관석 등은 다시 조정에 상소하여 법에 따라 처치하라는 판결을 받았는데 전 순찰사 김시연(金始淵)이 이를 거행하지 않았다. 다행히 금년에 신임 순찰사 정헌교(鄭獻敎)가 부임했으니 상세히 살펴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윤8월에 부안현감과 태인현감이 순찰사에게 첩보를 올려, 죄인 김방제의 고핵관(考覆官)으로 차정(差定)된 자신들이 순찰사의 명에 따라 김방제를 취조하여 최씨 무덤 7총을 파게 된 정황과 신원을 보고하였다. 김정황이 묘를 팠고 김방제는 이를 따랐다는 자백을 받았으니 법에 따라 처리하자고 하였다. 그 해 최씨가의 선산 묘 7기가 파헤쳐지고 만여 주의 나무가 마구 베어진 사건에 대한 조사 결과, 김방제 등 5명은 사형(死刑)에 처하고 김문제(金文濟) 등 5명은 원배(遠配)하라는 조처가 내려졌다. 관에서는 소송을 멈추기 위하여 경계를 정해 양측이 각자 이를 수호하고 소나무는 최씨측이 맡기로 결정하였다. 위의 장계 초안은 바로 이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라감사는 이 장계에서 사굴을 주도했던 김정황, 김방겸, 김홍겸 등 부안김씨에 대한 형벌을 각각 결정하여 건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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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67년 류대석(柳大錫) 등 편지(便紙)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丁未三月日 萬宗齋修理推進委員 柳大錫 等 5名 丁未三月日 柳大錫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67년에 만종재수리추진위원회(萬宗齋修理推進委員) 류대석(柳大錫) 등이 보내는 편지. 1967년 3월에 만종재수리추진위원회(萬宗齋修理推進委員) 류대석(柳大錫) 등이 보내는 편지이다. 만종재 수리와 관련해 방명비(芳名碑)를 건립하는데 각 군의 의연금(義捐金)이 상당 부분 미납되어 사업에 차질이 생겼으니 의연금을 빨리 보내 사업에 차질이 없게 해달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추진위원회에는 류대석, 류재학(柳在學), 류호석(柳浩錫), 류제수(柳濟水), 류이근(柳貳根)이 있었다. 이 문서는 국한문 혼용으로 적혀 있으며, 문서의 뒷면에 간찰의 초(草)가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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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85년 고흥향교(高興鄕校) 안내장(案內狀)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一九八五年三月二十一日 高興鄕校 典校 申穰雨 一九八五年三月二十一日 申穰雨 柳大錫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85년 3월 21일에 高興鄕校에서 柳大錫에게 보낸 案內狀 1985년 3월 21일에 高興鄕校에서 柳大錫에게 보낸 案內狀. 春期大祭를 거행하니 참석부탁드린다는 내용 *특징: 국한문혼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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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82년 송자종친회(宋子宗親會) 편지(便紙)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壬戌年陰八月日 宋子宗親會 壬戌年陰八月日 宋子宗親會 柳大錫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82년 음 8월에 송자종친회(宋子宗親會)에서 류대석(柳大錫)에게 보낸 편지. 1982년 음 8월에 송자종친회(宋子宗親會)에서 류대석(柳大錫)에게 보낸 편지이다. 전국유림(全國儒林) 및 당사자(當事者) 귀하(貴下)라는 제목이 달려있다. 편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당시 운곡사(雲谷祠)의 대노사유회(大老祠儒會) 원장과 유사(有司)가 독단적으로 유회와 제사를 소집하였는데 종친회에서는 이러한 행동을 용납할 수 없다고 하였다. 서로 협의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멋대로 운영을 지속하고 본인들의 뜻만 옳다고 다른 유림을 현혹 시키려고 하니 이러한 행위는 우리나라 어떤 서원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라 하였다. 더욱이 이번 8월 25일에 추향(秋享) 봉행(奉行)한다고 통지하였다고 하니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하였다. 류대석은 1900년(광무 4) 8월 18일에 태어났으며 몰년은 알 수 없다. 초명(初名)은 기석(基錫)이다. 자(字)는 계언(桂彥)이고, 호(號)는 송은(松隱)이다. 부인은 박영진(朴璟鎭)의 딸인 진원박씨(珍原朴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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