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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5년 송환기(宋煥箕) 연촌선생유사서(烟村先生遺事序) 고문서-시문류-서 교육/문화-문학/저술-서 崇禎後三乙丑孟冬 宋煥箕 崇禎後三乙丑孟冬 1805 宋煥箕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805년(순조 5)에 송환기가 ?연촌선생유사?의 간행을 축하하면서 작성한 서. 1805년(순조 5) 10월에 송환기(宋煥箕)가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 1384~1455)의 유문(遺文)을 모아놓은 ?연촌선생유사(烟村先生遺事)?의 간행을 축하하면서 작성한 서(序)다. 자신의 선조인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일찍이 '연촌선생유사발(烟村先生遺事跋)'을 지었지만 송환기는 그 유사를 본 적이 없어 항상 한스럽게 여겼는데, 어느 날 연촌선생의 후손 두 사람이 새 유사 한 권을 들고 찾아와 보여 주며 서문을 작성해 줄 것을 부탁했다. 살펴보니 곧 그 구본(舊本)을 중간(重刊)한 것이었다. 연촌이 남겼던 유고는 전란 통에 산일되어 권수(卷首)에 실려 있는 거라고는 소(䟽) 1편, 시 2편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연촌의 뛰어남을 충분히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전정지일련(全鼎之一臠)'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한 점의 고기에서 온 솥의 국맛을 안다는 말이다. 즉 훌륭한 문장이 다 전하지 않고 일부만 전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 전체를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책에는 또 제현(諸賢)의 시문이 함께 실려 있어서 연촌이 그 높은 덕망으로 세상의 추앙을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공원(貢院)에서 창화(唱和)한 시문들과 조정에서 물러나 귀향하면서 받은 시들과, 영암의 존양루(存養樓)에 걸려 있는 제영(題詠)은 연촌의 번성한 문학 세계를 보여준다. 권말에 부록으로 실려 있는 제발(題跋)은 또한 매우 진귀한 작품이다. 택당(澤堂) 이식(李植)은 연촌을 일컬어 순수한 덕행, 고상한 절개, 바른 학문이 있다고 칭송하였다. 우암도 연촌의 문자가 주서(朱書)의 어구에서 나온 것으로 정학(正學)의 일단(一端)이라고 하였다. 한편 서문의 저자인 송환기는 1766년(영조 42) 진사시에 합격하고 1772년 생원시에 합격했다. 그 뒤 관에 들어가 사도시주부(司䆃寺主簿), 사헌부 지평, 시헌부 장령, 군자감정을 거쳐 진산군수가 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1807년(순조 7) 형조참의와 예조참판을 지냈고, 1808년에 공조판서, 1811년에 의정부 우찬성을 지냈다. 『성담집(性潭集)』이라는 저서가 있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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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년 소양면(昭陽面) 분동재(粉洞齋) 추감기(秋監記) 고문서-치부기록류-추수기 경제-농/수산업-추수기 己巳三月 日 己巳三月 日 全州崔氏門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기사년에 소양면 분동재에서 작성된 추감기. 기사년(己巳年) 3월에 소양면(昭陽面) 분동재(粉洞齋)에서 작성된 추감기(秋監記)이다. 분동재는 전주시 소양면에 있는 전주최씨(全州崔氏) 재실(齋室)이다. 추감기는 전답과 소출량, 경작자 등이 기록된 문서로, 추수기(秋收記), 타조기(打租記), 색조기(色租記), 수세책(收稅冊) 등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이름으로 나온다. 이 문서는 학계에서 19세기 이후 지주제(地主制) 연구의 주요 자료로 흔히 이용되어 왔다. 이 문서에 지주가 작인들에게 소작을 둔 토지를 필지별로 전답의 소재지, 지적(두락), 작인 등과 함께 그 수확량이나 지대량을 매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풍흉이나 재해, 종자와 볏짚, 전세 등의 정보들을 기록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연유로 인하여, 토지경영의 실상을 담고 있는 추수기는 많은 연구자들이 지주제 연구와 관련된 주요 자료로 인식하고 활용하여 왔다. 특히 유절재는 부안의 유력한 씨족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의 재실(齋室)로, 각 파별로 다양한 계(契)를 설립하여 운영하여 왔다. 유절재에 소장된 회문(回文)을 통해서 드러난 계를 살펴보더라도 흥학계(興學稧), 처암공파계(處菴公派契), 봉사공파계(奉事公派契), 원재계(元齋契), 참봉공파계(叅奉公派契), 사문계(私門稧), 문중별청계(門中別廳稧) 등 다양하다. 이들 조직은 개별적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별도의 재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 재원은 다름 아닌 전답의 소유이다. 이들 계의 전답은 경영 과정에서 각 계마다 추수기 또는 추감기가 작성되었다. 이들 추감기에는 토지 소재지의 고을명과 지번, 지목, 지적, 경작료, 경작인 등이 차례로 적혀 있었다. 이러한 문서를 통해 부안의 유력 세족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의 당시의 경제적 실태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기사년의 이 추감기에는 부안의 통정리(通井里), 연곡리(蓮谷里), 산징리평(山澄里坪), 석동(席洞) 도동(道洞) 등 다섯 곳에 있는 전답의 경작자와 두락수, 그리고 조(租) 등이 차례로 기재되어 있다. 통정리에 있는 논은 1필지 7두락으로 조는 정조(正租) 10두이다. 조 중에서 5두와 20원이 문중으로 들어왔다. 연곡리는 2필지 7두락 5승락으로 조는 3석 5두이다. 산징리평은 1필지 밭 1두락이며 조는 6두이다. 석동은 신전(新田) 1필지 2두 5승락이며 조는 3두 7승락 5홉이다. 그리고 도동은 신전(新田) 1필지 1두 5승락으로 조는 2두 2승 5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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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년 부안 전주최씨(全州崔氏) 참봉공파(叅奉公派) 추감기(秋監記) 고문서-치부기록류-추수기 경제-농/수산업-추수기 己未秋 己未秋 全州崔氏門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기미년에 부안의 전주최씨 참봉공파에서 작성된 추감기. 기미년(己未年) 9월에 부안(扶安)의 전주최씨(全州崔氏) 참봉공파(叅奉公派)에서 작성된 추감기(秋監記)이다. 추감기는 전답과 소출량, 경작자 등이 기록된 문서로, 추수기(秋收記), 타조기(打租記), 색조기(色租記), 수세책(收稅冊) 등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이름으로 나온다. 이 문서는 학계에서 19세기 이후 지주제(地主制) 연구의 주요 자료로 흔히 이용되어 왔다. 이 문서에 지주가 작인들에게 소작을 둔 토지를 필지별로 전답의 소재지, 지적(두락), 작인 등과 함께 그 수확량이나 지대량을 매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풍흉이나 재해, 종자와 볏짚, 전세 등의 정보들을 기록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연유로 인하여, 토지경영의 실상을 담고 있는 추수기는 많은 연구자들이 지주제 연구와 관련된 주요 자료로 인식하고 활용하여 왔다. 특히 유절재는 부안의 유력한 씨족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의 재실(齋室)로, 각 파별로 다양한 계(契)를 설립하여 운영하여 왔다. 유절재에 소장된 회문(回文)을 통해서 드러난 계를 살펴보더라도 흥학계(興學稧), 처암공파계(處菴公派契), 봉사공파계(奉事公派契), 원재계(元齋契), 참봉공파계(叅奉公派契), 사문계(私門稧), 문중별청계(門中別廳稧) 등 다양하다. 이들 조직은 개별적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별도의 재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 재원은 다름 아닌 전답의 소유이다. 이들 계의 전답은 경영 과정에서 각 계마다 추수기 또는 추감기가 작성되었다. 이들 추감기에는 토지 소재지의 고을명과 지번, 지목, 지적, 경작료, 경작인 등이 차례로 적혀 있었다. 이러한 문서를 통해 부안의 유력 세족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의 당시의 경제적 실태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기미년의 참봉공파 추감기에는 부안의 묵교평(墨橋坪)과 통정평(通井坪)에 있는 전답의 경작자와 두락 수와 도조(賭租) 등이 차례로 기재되어 있다. 묵교평에서는 허익로가 3두 5승락의 논을 경작하여 16두의 도조를 납부했고, 최응수가 3두 5승락의 논을 경작하여 13두의 도조를 납부했다. 통정평에서는 최성도가 5두락의 논을, 최경직이 2두락의 논을, 최경원이 10두락의 논을, 최경국이 4필지 12두의 논을 각각 경작하여, 도조로 1석 5두, 10두, 2석, 4석 40두를 각각 납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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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찰(簡札) 피봉(皮封)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虎山 五章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虎山 五章이 받은 簡札의 皮封 虎山 五章이 받은 簡札의 皮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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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축년 부안 전주최씨(全州崔氏) 추감기(秋監記) 고문서-치부기록류-추수기 경제-농/수산업-추수기 癸丑九月 日 癸丑九月 日 全州崔氏門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계축년에 부안의 전주최씨문중에서 작성된 추감기. 계축년(癸丑年) 9월에 부안(扶安)의 전주최씨문중(全州崔氏門中)에서 작성된 추감기(秋監記)이다. 추감기는 전답과 소출량, 경작자 등이 기록된 문서로, 추수기(秋收記), 타조기(打租記), 색조기(色租記), 수세책(收稅冊) 등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이름으로 나온다. 이 문서는 학계에서 19세기 이후 지주제(地主制) 연구의 주요 자료로 흔히 이용되어 왔다. 이 문서에 지주가 작인들에게 소작을 둔 토지를 필지별로 전답의 소재지, 지적(두락), 작인 등과 함께 그 수확량이나 지대량을 매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풍흉이나 재해, 종자와 볏짚, 전세 등의 정보들을 기록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연유로 인하여, 토지경영의 실상을 담고 있는 추수기는 많은 연구자들이 지주제 연구와 관련된 주요 자료로 인식하고 활용하여 왔다. 특히 유절재는 부안의 유력한 씨족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의 재실(齋室)로, 각 파별로 다양한 계(契)를 설립하여 운영하여 왔다. 유절재에 소장된 회문(回文)을 통해서 드러난 계를 살펴보더라도 흥학계(興學稧), 처암공파계(處菴公派契), 봉사공파계(奉事公派契), 원재계(元齋契), 참봉공파계(叅奉公派契), 사문계(私門稧), 문중별청계(門中別廳稧) 등 다양하다. 이들 조직은 개별적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별도의 재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 재원은 다름 아닌 전답의 소유이다. 이들 계의 전답은 경영 과정에서 각 계마다 추수기 또는 추감기가 작성되었다. 이들 추감기에는 토지 소재지의 고을명과 지번, 지목, 지적, 경작료, 경작인 등이 차례로 적혀 있었다. 이러한 문서를 통해 부안의 유력 세족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의 당시의 경제적 실태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계축년의 이 추감기에는 부안의 해평리(海坪里)과 묵교평(墨橋坪), 통정리평(通井里坪), 풍동(豊洞)에 있는 전답의 경작자와 두락 수와 도조(賭租) 등이 차례로 기재되어 있다. 해평리에서는 김경옥이 3필지의 논 8두락, 7두락, 2두락을 각각 경작하여 2석 16두, 2석 16두, 18두씩의 도조를 납부했다. 묵교평에서는 허치문이 2필지의 논 15두락을 경작하여 3석 15두의 도조를 납부했다. 그리고 최운경이 1필지의 논 7두락을 경작하여 1석 15두의 도조를 납부했고, 최응수는 1필지의 논 6두락을 경작하여 1석 10두의 도조를 납부했다. 통정리평에서는 최성도가 1필지의 논 5두락을 경작하여 1석 105를 도조로 납부했다. 풍동평에서는 최경선이 1필지의 3두락의 논을 경작하여 18두를 도조로 납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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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술년 이연호(李然浩)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甲戌八月二十六日 記下 李先達然浩 甲戌八月二十六日 李然浩 柳碩士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갑술년 李然浩이 고흥 柳碩士에게 보낸 간찰 갑술년 李然浩이 고흥 柳碩士에게 보낸 간찰. *상태: 하단이 오염 *원문: 隨事斗護之意載書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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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오진영(吳震泳)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壬午四月晦 吳震泳 壬午四月晦 吳震泳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42년에 吳震泳이 고흥 虎山으로 보내는 간찰 1942년에 吳震泳이 고흥 虎山으로 보내는 간찰. 보내주신 便紙에 감사하다는 내용의 답장 *연결문서: 별지 1, 피봉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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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류중익(柳重益)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壬午七月晦日 族弟 重益 壬午七月晦日 [柳]重益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42년 7월 京城府 東元旅館에서 族弟 柳重益이 高興郡 虎東里에 있는 族兄 柳重憲에게 보내는 간찰 1942년 7월 京城府 東元旅館에서 族弟 柳重益이 高興郡 虎東里에 있는 族兄 柳重憲에게 보내는 간찰. *拜謝日… *상태: 내용연결 간찰 총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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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류형규(柳瀅圭)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丁未正月二十六日 族孫 柳瀅圭 丁未正月二十六日 柳瀅圭 柳大錫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67년에 柳瀅圭가 고흥의 족인 柳大錫에게 보낸 간찰 1967년에 柳瀅圭가 고흥의 족인 柳大錫에게 보낸 간찰. *국한문혼용, 노트 용지에 필기 *원문: 拜承惠椷感荷萬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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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류대석(柳大錫)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丁未二月十日 族弟 大錫 丁未二月十日 [柳]大錫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67년 2월 10일에 族弟 大錫이 보낸 간찰 1967년 2월 10일에 族弟 大錫이 보낸 간찰. *국한문혼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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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류영선(柳永善)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己卯六月十四日 族弟 永善 己卯六月十四日 柳永善 柳重憲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39년 고창의 柳永善이 고흥의 족인 柳重憲에게 보낸 간찰 1939년 고창의 柳永善이 고흥의 족인 柳重憲에게 보낸 간찰. *원문: 久阻之餘忽伏拜下狀就承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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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년 부안 전주최씨(全州崔氏) 추감기(秋監記) 고문서-치부기록류-추수기 경제-농/수산업-추수기 辛酉九月 日 辛酉九月 日 全州崔氏門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신유년에 작성된 부안 전주최씨문중의 추감기. 신유년(辛酉年) 9월에 부안(扶安)의 전주최씨문중(全州崔氏門中)에서 작성된 추감기(秋監記)이다. 추감기는 전답과 소출량, 경작자 등이 기록된 문서로, 추수기(秋收記), 타조기(打租記), 색조기(色租記), 수세책(收稅冊) 등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이름으로 나온다. 이 문서는 학계에서 19세기 이후 지주제(地主制) 연구의 주요 자료로 흔히 이용되어 왔다. 이 문서에 지주가 작인들에게 소작을 둔 토지를 필지별로 전답의 소재지, 지적(두락), 작인 등과 함께 그 수확량이나 지대량을 매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풍흉이나 재해, 종자와 볏짚, 전세 등의 정보들을 기록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연유로 인하여, 토지경영의 실상을 담고 있는 추수기는 많은 연구자들이 지주제 연구와 관련된 주요 자료로 인식하고 활용하여 왔다. 특히 유절재는 부안의 유력한 씨족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의 재실(齋室)로, 각 파별로 다양한 계(契)를 설립하여 운영하여 왔다. 유절재에 소장된 회문(回文)을 통해서 드러난 계를 살펴보더라도 흥학계(興學稧), 처암공파계(處菴公派契), 봉사공파계(奉事公派契), 원재계(元齋契), 참봉공파계(叅奉公派契), 사문계(私門稧), 문중별청계(門中別廳稧) 등 다양하다. 이들 조직은 개별적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별도의 재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 재원은 다름 아닌 전답의 소유이다. 이들 계의 전답은 경영 과정에서 각 계마다 추수기 또는 추감기가 작성되었다. 이들 추감기에는 토지 소재지의 고을명과 지번, 지목, 지적, 경작료, 경작인 등이 차례로 적혀 있었다. 이러한 문서를 통해 부안의 유력 세족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의 당시의 경제적 실태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신유년의 이 추감기에는 부안의 묵교평(墨橋坪)과 통정평(通井坪), 정해평(井海坪), 마전평(麻田坪) 등에 있는 전답의 경작인과 두락 수, 도조(賭租) 등이 차례로 기재되어 있다. 묵교평에서는 최응수가 7두락을 경작하여 2석을 조로 납부했으며, 통정평에서는 최경도가 5두락을 경작하여 1석 15두를 조로 납부했다. 정해평에서는 최경선이 5두락 1곳과 4두락 3곳 등 4필지 17두락을 경작하여 5석 40두를 조로 납부했다. 마전평에서는 최경직이 2두락을 경작하여 10두를 조로 납부했으며, 이명언이 7두락 1곳과 3두락 1곳을 경작하여 모두 5석 18두를 조로 납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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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년 부안 전주최씨(全州崔氏) 추감기(秋監記) 고문서-치부기록류-추수기 경제-농/수산업-추수기 甲申九月 日 甲申九月 日 全州崔氏門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갑신년에 부안 전주최씨문중에서 작성된 추감기. 갑신년(甲申年) 9월에 부안(扶安)의 전주최씨문중(全州崔氏門中)에서 작성된 추감기(秋監記)이다. 추감기는 전답과 소출량, 경작자 등이 기록된 문서로, 추수기(秋收記), 타조기(打租記), 색조기(色租記), 수세책(收稅冊) 등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이름으로 나온다. 이 문서는 학계에서 19세기 이후 지주제(地主制) 연구의 주요 자료로 흔히 이용되어 왔다. 이 문서에 지주가 작인들에게 소작을 둔 토지를 필지별로 전답의 소재지, 지적(두락), 작인 등과 함께 그 수확량이나 지대량을 매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풍흉이나 재해, 종자와 볏짚, 전세 등의 정보들을 기록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연유로 인하여, 토지경영의 실상을 담고 있는 추수기는 많은 연구자들이 지주제 연구와 관련된 주요 자료로 인식하고 활용하여 왔다. 특히 유절재는 부안의 유력한 씨족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의 재실(齋室)로, 각 파별로 다양한 계(契)를 설립하여 운영하여 왔다. 유절재에 소장된 회문(回文)을 통해서 드러난 계를 살펴보더라도 흥학계(興學稧), 처암공파계(處菴公派契), 봉사공파계(奉事公派契), 원재계(元齋契), 참봉공파계(叅奉公派契), 사문계(私門稧), 문중별청계(門中別廳稧) 등 다양하다. 이들 조직은 개별적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별도의 재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 재원은 다름 아닌 전답의 소유이다. 이들 계의 전답은 경영 과정에서 각 계마다 추수기 또는 추감기가 작성되었다. 이들 추감기에는 토지 소재지의 고을명과 지번, 지목, 지적, 경작료, 경작인 등이 차례로 적혀 있었다. 이러한 문서를 통해 부안의 유력 세족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의 당시의 경제적 실태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갑신년의 이 추감기에는 부안의 통정리(通井里), 연곡리(蓮谷里), 산징리평(山澄里坪), 석동(席洞)과 도동(道洞) 등 다섯 곳에 있는 전답의 경작자와 두락수, 그리고 조(租) 등이 차례로 기재되어 있다. 통정리에 있는 논은 1필지 7두락으로 조는 정조(正租) 10두이다. 조 중에서 5두와 20원이 문중으로 들어왔다. 연곡리는 2필지 7두락 5승락으로 조는 3석 5두이다. 산징리평은 1필지 밭 1두락이며 조는 6두이다. 석동은 신전(新田) 1필지 2두 5승락이며 조는 3두 7승락 5홉이다. 그리고 도동은 신전(新田) 1필지 1두 5승락으로 조는 2두 2승 5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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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간찰(簡札) 피봉(皮封)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十月二十九日 十月二十九日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0월 29일에 보낸 簡札의 皮封 10월 29일에 보낸 簡札의 皮封. *특징: 泰仁条 三千円라 적혀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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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년 이식(李植) 연촌선생가전시문록후서(烟村先生家傳詩文錄後叙) 고문서-시문류-서 교육/문화-문학/저술-서 崇禎丙子七月之望 李植 崇禎丙子七月之望 李植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636년(인조 14) 7월에 이식이 연촌 최덕지의 가전시문록에 쓴 후서. 1636년(인조 14) 7월에 이식(李植)이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 1384~1455)의 가전시문록(家傳詩文錄)에 쓴 후서(後叙)이다. 최덕지는 1405년(태종 5)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관에 들어가 사관(史官), 교서관(校書館) 정자(正字), 김제군수(金堤郡守), 남원부사(南原府使) 등을 지냈다. 문종이 즉위한 후 예문관(藝文館) 직제학(直提學)에 기용되었으나,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당시 그의 나이 아직 70이 되지 않았을 때였다. 임금을 비롯하여 조정의 신료들이 그에게 머물러 있기를 바랐으나, 연촌은 전라도 영암에 존양(存養)이라고 이름 지어놓은 소당(小堂)이 있다면서 이제는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말하면서 귀향의 뜻을 분명히 하였다. 연촌이 귀향할 때 조정의 명사(名士)들이 시부(詩賦)를 지어주며 전별했으며, 존양루에도 제문을 지어주었다. 또 장수를 누리고 많은 후손을 두고 있는 연촌의 부친 월당(月塘) 최담(崔霮, 1346~1434)을 칭송하는 시문도 많이 지어 주었다. 전주최씨 문중에서는 이들 시문을 오래도록 소중하게 지켜왔지만 정유왜란을 거치면서 존양루가 훼손되고 시문도 산일되는 비운을 겪었다. 이제 향리의 사람들이 연촌을 위하여 사당을 지어 제사를 드리고 있으며, 연촌의 7대손 전 참봉 최정(崔珽)은 남아 있는 시문 90여 수를 수습하여 시문집을 간행하면서 이식에게 발문을 지어주기를 부탁하였다. 이식은 연촌이 순실하고 순덕한 학자로 백세(百世)의 사표가 되는 분이라고 하였다. 또한 당대에 고관에까지 올라 장래가 촉망되었지만 갑자기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결과적으로는 곧바로 불어닥칠 문종의 죽음과 노산군의 양위(讓位)에 이르는 어려운 시기를 모면할 수 있었으니, 얼핏 보기에는 기미를 알아채고 화를 피했다고 볼 수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명석하다고 하여 어찌 그같은 천수(天數)를 미리 헤아릴 수 있었겠는가? 이식은 ?주역(周易)?의 겸괘(謙卦) 단사(彖辭)에서 "천도는 차서 넘치면 허물어뜨리고 겸허하면 더해 주며, 지도는 차서 넘치면 변화시키고 겸허하면 계속 흘러가게 하며, 귀신은 차고 넘치면 재앙을 내리고 겸허하면 복을 주며, 인도는 차고 넘치면 싫어하고 겸허하면 좋아한다.[天道虧盈而益謙 地道變盈而流謙 鬼神害盈而福謙 人道惡盈而好謙]"라는 구절과, ?시경(詩經)? 대아(大雅) 한록(旱麓)에서 "화락하신 군자님은 신명이 보우한 바이로다.[豈弟君子 神所勞矣]"라고 한 구절을 인용하여, 이 모든 일이 연촌의 순수한 덕성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관계에서 갑자기 물러난 것은 연촌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형 최광지(崔匡之)와, 최광지의 아들 옹암(甕菴) 최생명(崔生明)도 마찬가지였다. 세속적인 명리를 추구하다가 단종대와 세조대에 패가망신한 사람들과 가문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니 전주최씨의 오늘이 있었던 것도 어떻게 보면 연촌을 비롯한 선대의 올바른 처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후서를 지은 이식은 본관이 덕수(德水)이며,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 남궁외사(南宮外史), 택구거사(澤癯居士) 등이다. 1610년(광해군 2)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관에 들어가 설서(說書), 북평사(北評事), 선전관(宣傳官) 등을 지냈다. 1618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관직에서 물러나 경기도 지평(砥平)으로 낙향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이조좌랑에 기용되었으며, 뒤에 대사간(大司諫), 대사성(大司成), 예조참판, 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이식은 1642년에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청나라를 배척할 것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중국의 심양(瀋陽)으로 잡혀갔다가 그 뒤 탈출하여 귀국했다. 1643년 대사헌과 형조·이조·예조의 판서 등 조정의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이식은 문장이 뛰어나 신흠(申欽)·이정구(李廷龜)·장유(張維)와 함께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로 꼽힌다. 문집으로는 『택당집(澤堂集)』이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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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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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계축년 권용현(權龍鉉)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癸丑三月上旬 權龍鉉 柳斯文 座下 癸丑三月上旬 [1913, 1973] 權龍鉉 柳斯文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계축년 權龍鉉이 柳斯文에게 보내는 간찰 계축년 權龍鉉이 柳斯文에게 보내는 간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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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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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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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갑인년 부안 전주최씨(全州崔氏) 추감기(秋監記) 1 고문서-치부기록류-추수기 경제-농/수산업-추수기 甲寅 甲寅 全州崔氏門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갑인년 이후 4년간에 걸쳐 부안의 전주최씨문중에서 작성된 추감기. 갑인년(甲寅年) 이후 4년간에 걸쳐 부안(扶安)의 전주최씨문중(全州崔氏門中)에서 작성된 추감기(秋監記)이다. 표제(標題)는 '甲寅乙卯兩年秋監記'로 되어 있지만, 갑인년, 을묘년, 병진년, 정사년 등 4년간의 추감기가 차례로 실려 있다. 추감기는 전답과 소출량, 경작자 등이 기록된 문서로, 추수기(秋收記), 타조기(打租記), 색조기(色租記), 수세책(收稅冊) 등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이름으로 나온다. 이 문서는 학계에서 19세기 이후 지주제(地主制) 연구의 주요 자료로 흔히 이용되어 왔다. 이 문서에 지주가 작인들에게 소작을 둔 토지를 필지별로 전답의 소재지, 지적(두락), 작인 등과 함께 그 수확량이나 지대량을 매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풍흉이나 재해, 종자와 볏짚, 전세 등의 정보들을 기록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연유로 인하여, 토지경영의 실상을 담고 있는 추수기는 많은 연구자들이 지주제 연구와 관련된 주요 자료로 인식하고 활용하여 왔다. 특히 유절재는 부안의 유력한 씨족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의 재실(齋室)로, 각 파별로 다양한 계(契)를 설립하여 운영하여 왔다. 유절재에 소장된 회문(回文)을 통해서 드러난 계를 살펴보더라도 흥학계(興學稧), 처암공파계(處菴公派契), 봉사공파계(奉事公派契), 원재계(元齋契), 참봉공파계(叅奉公派契), 사문계(私門稧), 문중별청계(門中別廳稧) 등 다양하다. 이들 조직은 개별적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별도의 재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 재원은 다름 아닌 전답의 소유이다. 이들 계의 전답은 경영 과정에서 각 계마다 추수기 또는 추감기가 작성되었다. 이들 추감기에는 토지 소재지의 고을명과 지번, 지목, 지적, 경작료, 경작인 등이 차례로 적혀 있었다. 이러한 문서를 통해 부안의 유력 세족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의 당시의 경제적 실태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갑인년 9월에 작성된 추감기에는 부안의 묵교평(墨橋坪)과 신평리(新坪里), 묵정평(墨丁坪), 마전평(麻田坪)에 있는 전답의 경작자와 두락 수와 도조(賭租) 등이 차례로 기재되어 있다. 묵교평에서는 최운경과 최응수가 각각 6두락의 논을 경작하여 1석 16두와 2석 2두의 도조를 각각 납부했다. 신평리에서는 최성도가 5두락의 논을 경작하여 1석 5두의 도조를 내야하는데 납부하지 않았다. 묵정평에서는 김경옥이 4두락, 3두락, 7두락 등 3필지의 논을 경작하여 1석 12두, 16두, 3석 3두의 도조를 각각 납부했다. 그리고 백한서가 4두락의 논을 경작하여 1석 16두의 도조를 납부했다. 마전평에서는 최경국이 3두락, 4두락, 5두락 등 3필지의 논을 경작하여 15두, 1석, 1석 10두의 도조를 각각 납부했으며, 최성일이 5두락의 논을 경작하여 1석 5두의 도조를 납부했다. 한편 을묘년 9월에 작성된 추감기의 현황을 살펴보면, 묵교리평에서는 최응수와 최운경이 모두 13두락의 논을 경작하여 2석 17두의 도조를 납부했다. 통정평에서는 최성도가 5두락의 논을 경작하여 1석 5두의 도조를 납부했다. 정해평에서는 최경국이 2필지의 논 9두락을 경작하여 2석 15두의 도조를 납부했으며, 최성일이 5두락의 논을 경작하여 1석의 도조를 납부했다. 덕산평에서는 최경국이 3두락의 논을 경작하여 10두의 도조를 납부했다. 묵정평에서는 김경옥이 2필지의 논 9두락을 경작하여 2석 33두의 도조를 납부했다. 백한서와 김존중은 각각 4두락의 논을 경작하여 1석 2두씩 도조를 납부했다. 병진년 10월에 작성된 추감기의 현황을 살펴보면, 묵정평에서는 김재중, 김완겸, 백한서 등이 4필지 17두락의 논을 경작하여 3석 51두의 도조를 납부했다. 묵교평에서는 최응수와 최운경이 2필지의 논 13두락을 경작하여 3석 4두의 도조를 납부했다. 통정리평에서는 최성직이 5두락의 논을 경작하여 1석 15두를 도조로 납부하여야 하지만 5두를 내지 못했다. 정해평에서는 최경선이 2필지의 논 8두락을 경작하여 2석 13두의 도조를 납부했다. 그리고 최성일은 5두락의 논을 경작하여 1석 5두의 도조를 납부했다. 정사년 8월 27일에 작성된 추감기의 현황을 살펴보면, 하장평(下長坪)에서는 김경옥, 김재중, 이경일 등이 18두락의 논을 경작하여 7석 18두의 도조를 납부했다. 행안면 묵교리평에서는 최운경 등이 13두락의 논을 경작하여 2석 34두의 도조를 납부했다. 상서 통정평에서는 최경원이 5두락의 논을 경작하여 1석 10두의 도조를 납부했다. 하서 정해평에서는 최성일이 5두락의 논을 경작하여 1석 5두의 도조를 납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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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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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신사년 송병규(宋秉奎)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辛巳十月卄三日 宋秉奎 辛巳十月卄三日 [1941] 宋秉奎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신사년 10월에 宋秉奎가 보내는 간찰 신사년 10월에 宋秉奎가 보내는 간찰. 宋秉奎는 小名을 京待라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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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유형 :
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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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66년 류연술(柳衍述)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丙午臘月念一日 族從 衍述 丙午臘月念一日 柳衍述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66년 12월 21일에 류연술(柳衍述)이 류대석(柳大錫)에게 보낸 간찰(簡札). 1966년 12월 21일에 류연술(柳衍述)이 류대석(柳大錫)에게 보낸 간찰(簡札)이다. 1964년 8월에 호남문헌비교간소(湖南文獻備敎刊所)에서 보낸 통문(通文)이 동봉되어있다. 간찰의 내용을 살피면 종중(宗中)에서 성출금이 미납되었으니 보내달라는 내용이 있으며 11인 분의 돈이 사람당 6500원이라고 하며 남은 돈에 대해서는 별도로 보내달라고 하였다. 문집과 관련된 돈을 1차로 보내고 추후에 독촉하여 다시 보내겠다고 하며 문집에 관련된 자세한 비용은 별도로 첨부한 통문의 내용을 살펴보라고 하였다. 통문에는 호남문헌비교간소에서 문집을 만드는 데 필요한 범례가 적혀있다. 문집의 목차는 어떤 순서로 진행되는지, 문은 한 글자당 1원, 7언율시는 한 수당 100원, 5언율시는 한 수당 70원을 받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류대석은 1900년(광무 4) 8월 18일에 태어났으며 몰년은 알 수 없다. 초명(初名)은 기석(基錫)이다. 자(字)는 계언(桂彥)이고, 호(號)는 송은(松隱)이다. 부인은 박영진(朴璟鎭)의 딸인 진원박씨(珍原朴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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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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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64년 호남문헌비교간서(湖南文獻備敎刊所)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甲辰八月 日 湖南文獻備敎刊所 甲辰八月 日 湖南文獻備敎刊所 湖南文獻備敎刊所印(3.2×3.3)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64년 8월에 湖南文獻備敎刊所에서 柳大錫에게 보낸 通文 1964년 8월에 湖南文獻備敎刊所에서 柳大錫에게 보낸 通文. 湖南文獻備敎刊所에서 문집을 만드는 데 필요한 범례를 적어 보낸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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