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년 부안 전주최씨(全州崔氏) 추감기(秋監記) 고문서-치부기록류-추수기 경제-농/수산업-추수기 辛亥八月日 辛亥八月日 全州崔氏門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신해년에 부안의 전주최씨문중에서 작성된 추감기. 신해년(辛亥年) 8월에 부안(扶安)의 전주최씨문중(全州崔氏門中)에서 작성된 추감기(秋監記)이다. 추감기는 전답과 소출량, 경작자 등이 기록된 문서로, 추수기(秋收記), 타조기(打租記), 색조기(色租記), 수세책(收稅冊) 등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이름으로 나온다. 이 문서는 학계에서 19세기 이후 지주제(地主制) 연구의 주요 자료로 흔히 이용되어 왔다. 이 문서에 지주가 작인들에게 소작을 둔 토지를 필지별로 전답의 소재지, 지적(두락), 작인 등과 함께 그 수확량이나 지대량을 매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풍흉이나 재해, 종자와 볏짚, 전세 등의 정보들을 기록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연유로 인하여, 토지경영의 실상을 담고 있는 추수기는 많은 연구자들이 지주제 연구와 관련된 주요 자료로 인식하고 활용하여 왔다. 특히 유절재는 부안의 유력한 씨족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의 재실(齋室)로, 각 파별로 다양한 계(契)를 설립하여 운영하여 왔다. 유절재에 소장된 회문(回文)을 통해서 드러난 계를 살펴보더라도 흥학계(興學稧), 처암공파계(處菴公派契), 봉사공파계(奉事公派契), 원재계(元齋契), 참봉공파계(叅奉公派契), 사문계(私門稧), 문중별청계(門中別廳稧) 등 다양하다. 이들 조직은 개별적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별도의 재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 재원은 다름 아닌 전답의 소유이다. 이들 계의 전답은 경영 과정에서 각 계마다 추수기 또는 추감기가 작성되었다. 이들 추감기에는 토지 소재지의 고을명과 지번, 지목, 지적, 경작료, 경작인 등이 차례로 적혀 있었다. 이러한 문서를 통해 부안의 유력 세족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의 당시의 경제적 실태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신해년의 이 추감기에는 부안의 묵교평(墨橋坪)과 통정평(通井坪), 해평리(海坪里), 덕산평(德山坪) 등에 있는 전답의 경작자와 두락 수와 도조(賭租) 등이 차례로 기재되어 있다. 묵교평에서는 허치문, 허문극, 최순구 등 3인이 각 1필지 15두락, 6두락, 7두락의 논을 각각 경작하여 각각 3석 18두, 2석 5두, 35두의 도조를 납부했다. 통정평에서는 최성도가 1필지의 논 5두락을 경작하여 1석 10두를 도조로 납부했다. 해평리에서는 김경문이 2필지 7두락, 3두락의 논을 경작하여 2석 12두, 12두의 도조를 각각 납부했고, 김경옥이 1필지 8두락을 경작하여 3석 7두의 도조를 납부했다. 덕산평에서는 최경국이 1필지의 3두락의 논을 경작하여 15두를 도조로 납부했다. 이 성책문서는 신해년의 추감기에 이어 다음해인 임자년의 도조기(賭租記)도 실려 있는데, 여기에는 허치문 등 6인의 소작경영한 내용이 적혀 있다. 이어서 이보다 조금 거슬러 올라가는 정미년의 추수기 기록 후에 뒤늦게 들어왔던 도조의 내용을 추록하고 있다. 그리고 성책문서의 맨끝에는 '참봉공파배전기(叅奉公派) 배전기(排錢記)'라는 제목을 쓰고, 고궁당공비(固窮堂公碑)의 공사비로 1백냥, 풍동(豊洞) 참봉(叅奉) 앞으로 1백냥 등 1백냥을 지출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고궁당은 옹암(甕菴) 최생명(崔生明)의 아들 최수손(崔秀孫)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