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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년 류방용(柳芳鏞)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戊辰十二月十三日 弟 柳芳鏞 戊辰十二月十三日 [1928, 1988] 柳芳鏞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무진년 12월에 弟 柳芳鏞이 보내는 간찰 무진년 12월에 弟 柳芳鏞이 보내는 간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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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임인년 운곡사(雲谷祠)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壬寅三月 日 雲谷祠 壬寅三月 日 雲谷祠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임인(壬寅)년 3월에 운곡사(雲谷祠)에서 보낸 간찰(簡札). 임인(壬寅)년 3월에 운곡사(雲谷祠)에서 보낸 간찰(簡札)이다. 중건 후 백 년간 제사를 지내지 못해 한이 남아있었는데 이번달 15일에 운곡사를 중건하여 호산(虎山)에서 이번 달 15일에 제사를 지낼 예정이니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주시고 함께 추모하여 주시기를 바란다는 내용이다. 운곡사는 전라남도 고흥군 고흥읍 호동리 730번지에 있는 사당으로, 고흥유씨와 남양송씨 15위를 모시고 있다. 여산송씨 송간(宋侃), 송대립(宋大立), 송심(宋諶)과 고흥유씨 유탁(柳濯), 영광정씨 정연희(丁運熙)를 배향하기 위하여 1785년(정조 9) 현재의 전라남도 고흥군 두원면 운곡리에 창건한 사당이다. 1796년(정조 20) 여산송씨 문중에서 서동사(西洞祠,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155호)로 송간·송대립 등의 위패를 모셔갔고, 같은 해에 남양송씨 송인(宋寅)과 영광정씨 정걸(丁傑) 등이 운곡사에 추배되었다.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0년 유덕산 기슭의 고흥유씨 집성촌인 고흥읍 호동리에 복원되었다. 경내에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설화문학의 대가였던 유몽인에게 광해군이 내린 교서인 '유몽인 위성공신교서(衛聖功臣敎書, 보물 제1304호)'가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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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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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1932년 최민렬(崔敏烈) 한벽당중수기(寒碧堂重修記) 고문서-시문류-기 교육/문화-문학/저술-기 壬申二月 日 十八代孫敏烈 壬申二月 日 1932 崔敏烈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32년 2월에 최민렬이 작성한 한벽당중수기. 1932년 2월에 최민렬(崔敏烈)이 작성한 한벽당중수기(寒碧堂重修記)이다. 한벽당(寒碧堂)은 태종 4년(1404)에 월당(月塘) 최담(崔霮, 1346~1434)이 지은 건물로, 1971년 12월 2일 전라북도의 유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었다.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에 있으며, 전주팔경의 하나이다. 최담은 고려말 우왕 때 예부시(禮部試)에 급제하여 관로에 들어가 집현전 제학을 지냈다. 1398년 중훈대부 진수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1400년에 낙향하여 전주에 한벽당을 짓고 이곳에서 시와 글을 지으며 말년을 보냈다. 정자의 이름은 처음에는 월당루(月塘樓)라고 한다. 그 뒤 깎아 세운 듯한 암벽과 누정 밑을 흐르는 물을 묘사한 '벽옥한류(碧玉寒流)'라는 글귀에서 한벽당이라 이름이 후대에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이곳 한벽당에는 시인과 묵객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시를 읊고 풍류를 즐겼다. 건물은 1683년(숙종 9)과 1733년(영조 9), 1828년(순조 28), 1897년 등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이 중수기를 보면, 신미년, 즉 기문을 쓰기 한 해 전인 1931년 가을에 전주최씨가의 후손들이 힘을 모아 중수를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듬해 공사가 완성되자 최민렬이 이 기문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기문의 맨 끝에는 윤월구(尹月求)가 1933년에 글씨를 썼다고 밝히고 있다. 한벽당 중수기에는 이 기문 외에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1833~1906)이 1897년에 지은 글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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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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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문서

1909년 최병욱(崔炳郁) 등 지적보고(地籍報告) 고문서-소차계장류-청원서 정치/행정-보고-청원서 隆熙三年四月 隆熙三年四月 崔炳郁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09년 최병욱 등의 지적보고 1909년 4월 최병욱(崔炳郁) 등 22명이 부안군수에게 올린 지적보고(地籍報告)이다. 이 문서에 이어 1909년 4월에 최봉수(崔鳳洙) 등이 부안군수에게 올린 청원서(請願書)가 실려 있다. 최병욱과 최학홍(崔鶴洪)은 전라북도 부안군(扶安郡) 하동면(下東面)의 석동산(席洞山) 최씨 산에 있는 분묘와 면적 12정(町) 6반(反) 15(步)의 삼림을 토지가옥소유권증명규칙(土地家屋所有權証明規則) 제 1조 의하여 지적(地籍)을 부안군수에게 보고하였다. 1909년 최봉수의 청원서는 1909년 4월에 부안군 하동면 갈촌리에 사는 최봉수(崔鳳洙) 등 24인이 부안군 상동면 신흥리에 사는 김동용(金東容)등을 상대로 부안군수에게 올린 것이다. 부안군 하동면 석동산에 있는 최봉수 등의 14대, 400년이 된 선산의 서쪽 언덕에 있는데 1679년(숙종 5)에 김지택(金之澤)이 자신의 증조묘라고 송사를 일으켰다. 김연(金珽)은 김언방(金彦邦)의 묘라고 하고 김응위(金應渭)는 원대(遠代)의 소윤(少尹) 묘라고 주장하였으므로 관에서 일묘삼조(一墓三祖)라 하여 김씨측이 낙과(落科)하였다. 또 1788년(정조 12)에 김지택의 손자 김광일(金光逸) 등이 소송하였으나 전관의 일묘삼조의 제사 때문에 낙과한 적이 있다. 1860년(철종 11)에 김광일의 손자 김방제(金邦濟) 등이 다시 산송을 벌였다. 당시 부안현감 홍철주(洪澈周)가 최씨 4인을 가두고 전후 송첩(訟牒)을 모두 소각하였으며 김방제 등은 송추(松楸) 5~6만 주를 한꺼번에 베어냈다. 1861년(철종 12)에는 김방제등이 최씨문중의 7개 묘를 몰래 파내었으므로 최씨문중이 3차의 판하(判下)를 받아 산지를 도로 찾고 파헤쳐진 묘를 도로 봉분하였다. 그런데 1871년(고종 8)에 김씨들이 다시 묘를 파헤치고 산지를 빼앗고 정려를 부수려고 하였으므로 형조(刑曹)와 전라감영에 정소(呈訴)하여 완문(完文)과 입안(立案)을 받았다. 1897년(고종34)에 김씨들이 또 기소하여 1898년(고종35)에 순찰사가 친심하고 양가가 대질하여 양가의 송첩을 모두 소각하고 경계를 정한다는 판결서를 받았다. 1909년 측량하는 날에 최씨산을 김동용(金東容) 산이라고 기록하였으니 김동용, 김유상(金有相), 김병술(金秉述) 등을 잡아다 자세히 조사하여 처결해달라고 호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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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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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류희석(柳熙錫)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五月七日 五月七日 柳熙錫 柳大錫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柳熙錫이 고흥의 족인 柳大錫에게 보낸 간찰 柳熙錫이 고흥의 족인 柳大錫에게 보낸 간찰. *국한문혼용, 편지지 2장에 연결하여 필기 *뒷장 편지에 족보 收單名單과 금액이 적힘 *원문: 伏惟初夏之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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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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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류중섭(柳重涉)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六月十九日 族從 重涉 六月十九日 柳重涉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6월에 族從 柳重涉이 벌교 보성여관에 있는 柳德山에게 보내는 간찰 6월에 族從 柳重涉이 벌교 보성여관에 있는 柳德山에게 보내는 간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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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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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子 父主前 上白是 父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아들이 아버지에게 보낸 간찰 아들이 아버지에게 보낸 간찰. 수신인과 발신인이 표기되지 않음 *원문: 父主前 上白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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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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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簡札 필사본으로 추정 簡札 필사본으로 추정. *원문: 恭惟淇園古種涓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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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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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간찰(簡札) 피봉(皮封)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柳重憲 柳重憲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柳重憲이 받은 簡札의 皮封 柳重憲이 받은 簡札의 皮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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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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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1451년 이예(李芮) 연촌선생퇴휴시송별시서(烟村先生退休時送別詩序) 고문서-시문류-서 교육/문화-문학/저술-서 景泰二年辛未仲冬上澣 李芮 景泰二年辛未仲冬上澣 1451 李芮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451년(문종 1)에 향리로 물러나는 연촌 최덕지를 송별하며 이예가 작성한 시서. 1451년(문종 1) 겨울에 향리로 물러나는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 1384~1455)를 송별하며 이예(李芮, 1419-1480)가 작성한 시서(詩序)이다. 최덕지는 1405년(태종 5)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관에 들어가 사관(史官), 교서관(校書館) 정자(正字), 김제군수(金堤郡守), 남원부사(南原府使) 등을 지냈다. 문종이 즉위한 후 예문관(藝文館) 직제학(直提學)에 기용했으나,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당시 그의 나이 아직 70이 되지 않았을 때였다. 임금을 비롯하여 조정의 신료들이 그에게 머물러 있기를 바랐으나, 연촌은 전라도 영암에 존양(存養)이라고 이름 지어놓은 소당(小堂)이 있다면서 이제는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말하면서 귀향의 뜻을 분명히 하였다. 그가 귀향할 때 동료들이 시부(詩賦)를 지어 주었다. 그리고 그 송별시에 서문을 써달라고 부탁을 받고 이예가 쓴 것이 바로 이 글이다. 이예는 본관이 양성(陽城)으로, 1438년(세종 20) 진사시에 합격하고, 1441년(세종 23)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관에 들어가 군기시(軍器寺) 직장(直長), 종부시(宗簿寺) 직장(直長) 등을 거쳐 집현전(集賢殿)에 들어가 ?의방유취(醫方類聚)? 등 의서(醫書)와 ?고려사(高麗史)? 편찬에 참여하였다. 성종 때 외직으로 나가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이후 이조참판, 대사헌, 개성유수, 공조판서, 한성부 판윤 등을 지내고 형조판서로 있다가 죽었다. 박학(博學) 다문(多聞)으로 명망이 높았다. 시호는 문질(文質)이다. 이 글은 후대에 누군가가 원문에서 베껴 쓴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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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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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신해년 부안 전주최씨(全州崔氏) 추감기(秋監記) 고문서-치부기록류-추수기 경제-농/수산업-추수기 辛亥八月日 辛亥八月日 全州崔氏門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신해년에 부안의 전주최씨문중에서 작성된 추감기. 신해년(辛亥年) 8월에 부안(扶安)의 전주최씨문중(全州崔氏門中)에서 작성된 추감기(秋監記)이다. 추감기는 전답과 소출량, 경작자 등이 기록된 문서로, 추수기(秋收記), 타조기(打租記), 색조기(色租記), 수세책(收稅冊) 등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이름으로 나온다. 이 문서는 학계에서 19세기 이후 지주제(地主制) 연구의 주요 자료로 흔히 이용되어 왔다. 이 문서에 지주가 작인들에게 소작을 둔 토지를 필지별로 전답의 소재지, 지적(두락), 작인 등과 함께 그 수확량이나 지대량을 매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풍흉이나 재해, 종자와 볏짚, 전세 등의 정보들을 기록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연유로 인하여, 토지경영의 실상을 담고 있는 추수기는 많은 연구자들이 지주제 연구와 관련된 주요 자료로 인식하고 활용하여 왔다. 특히 유절재는 부안의 유력한 씨족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의 재실(齋室)로, 각 파별로 다양한 계(契)를 설립하여 운영하여 왔다. 유절재에 소장된 회문(回文)을 통해서 드러난 계를 살펴보더라도 흥학계(興學稧), 처암공파계(處菴公派契), 봉사공파계(奉事公派契), 원재계(元齋契), 참봉공파계(叅奉公派契), 사문계(私門稧), 문중별청계(門中別廳稧) 등 다양하다. 이들 조직은 개별적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별도의 재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 재원은 다름 아닌 전답의 소유이다. 이들 계의 전답은 경영 과정에서 각 계마다 추수기 또는 추감기가 작성되었다. 이들 추감기에는 토지 소재지의 고을명과 지번, 지목, 지적, 경작료, 경작인 등이 차례로 적혀 있었다. 이러한 문서를 통해 부안의 유력 세족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의 당시의 경제적 실태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신해년의 이 추감기에는 부안의 묵교평(墨橋坪)과 통정평(通井坪), 해평리(海坪里), 덕산평(德山坪) 등에 있는 전답의 경작자와 두락 수와 도조(賭租) 등이 차례로 기재되어 있다. 묵교평에서는 허치문, 허문극, 최순구 등 3인이 각 1필지 15두락, 6두락, 7두락의 논을 각각 경작하여 각각 3석 18두, 2석 5두, 35두의 도조를 납부했다. 통정평에서는 최성도가 1필지의 논 5두락을 경작하여 1석 10두를 도조로 납부했다. 해평리에서는 김경문이 2필지 7두락, 3두락의 논을 경작하여 2석 12두, 12두의 도조를 각각 납부했고, 김경옥이 1필지 8두락을 경작하여 3석 7두의 도조를 납부했다. 덕산평에서는 최경국이 1필지의 3두락의 논을 경작하여 15두를 도조로 납부했다. 이 성책문서는 신해년의 추감기에 이어 다음해인 임자년의 도조기(賭租記)도 실려 있는데, 여기에는 허치문 등 6인의 소작경영한 내용이 적혀 있다. 이어서 이보다 조금 거슬러 올라가는 정미년의 추수기 기록 후에 뒤늦게 들어왔던 도조의 내용을 추록하고 있다. 그리고 성책문서의 맨끝에는 '참봉공파배전기(叅奉公派) 배전기(排錢記)'라는 제목을 쓰고, 고궁당공비(固窮堂公碑)의 공사비로 1백냥, 풍동(豊洞) 참봉(叅奉) 앞으로 1백냥 등 1백냥을 지출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고궁당은 옹암(甕菴) 최생명(崔生明)의 아들 최수손(崔秀孫)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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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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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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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송기호(宋麒浩) 덕촌공휘희정사실발(德村公諱希汀事實跋) 고문서-시문류-발 교육/문화-문학/저술-발 宋麒浩 宋麒浩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송기호가 덕촌 최희정의 사적을 모아 엮은 책자에 쓴 발문. 송기호(宋麒浩)가 덕촌(德村) 최희정(崔希汀)의 사적을 모아 엮은 책자에 쓴 발문이다. 후손 최용성(崔龍性)이 덕촌의 사적을 모아 책자를 엮고 송기호에게 발문을 부탁하자 이에 응답하여 지은 글이다. 최희정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정지(汀之)이고 덕촌(德村)은 그의 호다. 월당(月塘) 최담(崔霮, 1346~1434)의 후손으로,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었으며, 중종 때 무과에 급제한,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인재였다. 여진족인 속고내(速古乃)가 군사를 거느리고 침략하자 종성판관에 임명되어 병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적을 대파하였다. 그 뒤 조정에서 논공행상을 하려고 하였으나 덕촌은 사양하고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 임금이 이를 가상하게 여겨 그가 사는 곳 근처의 동축산(東笁山) 일대를 하사하였다. 그는 부모가 죽은 뒤 6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충과 효를 모두 극진히 한 셈이었다.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두문불출하면서 성리학을 공부하며 일생을 마쳤다. 1878년(고종 15) 12월에 이르러 그의 뛰어난 충절을 기려 조정은 그를 병조참판에 증직하였다. 덕촌은 고부(古阜)의 서산사(書山祠)에 제향되었다. 이곳에서는 조선 중기의 학자 권극중(權克中)을 제향하고 있었는데, 1844년(헌종 10)에 덕촌을 추배(追配)한 것이다. 그러나 서산사는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으며, 지금은 유허비만 남아 있다. 발문을 지은 송기호는 1828년생으로 고부(古阜) 출신이며, 1852년(철종 3)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에 정언(正言)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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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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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1931년 부안 전주최씨(全州崔氏) 거호금수봉책(醵戶金收捧冊) 고문서-치부기록류-밧자기 경제-회계/금융-밧자기 辛未十月六日 辛未十月六日 1931 崔漢洪 扶安 全州崔氏 門中員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31년에 부안의 전주최씨문중에서 문중원에 보낸 경고문과 이에 따라 문중원들로부터 거두어들인 출연금과 출연자의 내역을 기록한 문서. 1931년에 부안(扶安)의 전주최씨문중(全州崔氏門中)에서 문중을 운영하고 선산(先山)을 관리하기 위하여 문중원들에게 출연금(出捐金)을 요청하는 경고문(敬告文)과, 이에 따라 문중원들로부터 거두어들인 출연금(出捐金)과 출연자(出捐者)의 내역을 기록한 문서이다. 문서의 맨 앞에는 신미년, 즉 1931년 10월 6일에 최한홍(崔漢洪) 등 22명이 연명하여 작성한 경고문이 실려 있으며, 이어서 '座目及金額'이라는 제목 아래 문중에 돈을 출연한 문중원들의 성명과 금액이 차례로 적혀 있다. 경고문에는 문중이 그동안 겪었던 어려운 사정이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다. 즉, 경신년에 변(變)이 일어난 뒤에 문중의 재산이 완전히 고갈되었으며, 그동안 여러 차례 자손들이 성금을 출연하면서 도움을 주었지만 부채가 늘어나 천여 원에 이르렀으며 이자도 갈수록 늘어났지만 갚을 길이 없었다. 결국에는 재직(齋直)의 사답(賜畓)과 대지(垈地)까지 저당을 잡혔고 그것도 기한이 지나 경매에 들어가게 되었다. 궁리 끝에 문중에서 회의를 하여 문중원들의 빈부(貧富)나 자가(自家) 보유 여부를 따지지 않고, 호세등급(戶稅等級)의 2배로 기준을 정하여 문중원 가가호호마다 돈을 거두기로 하였다는 사정을 전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선산의 터가 당할지도 모르는 곤혹스러운 상황을 면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위에서 경신년의 변이라고 한 것은, 1920년에 일제가 공동묘지법을 만들어 전면 시행한 것을 가리킨 것으로 추정된다. 이 법이 발효되면서 어느 누구도 자신의 선영에다 매장을 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한편 문중에 돈을 출현한 사람들은 140원을 낸 주산면 백석리의 최재홍(崔在洪)을 비롯하여 45명이었다. 이들 중 최재홍은 혜릉참봉(惠陵參奉)을 역임했고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의 문인으로 태인의병(泰仁義兵)에도 동참하였던 인물이다. 그의 생몰년대(1865~1937)를 통해서 문서의 작성연대 신미년을 1931년으로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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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간찰(簡札) 피봉(皮封)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豆原雲之亭留 邑內面虎東松峴 柳先生 野山 柳重憲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野山 柳重憲에게 보내는 簡札皮封 野山 柳重憲에게 보내는 簡札皮封. *상태: 연필 낙서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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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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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류희석(柳喜錫) 간찰(簡札) 피봉(皮封)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天安郡廣德面大德 柳喜錫 [20세기] 柳喜錫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柳喜錫이 보내는 簡札皮封 柳喜錫이 보내는 簡札皮封. *상태: 봉투 배면만 남아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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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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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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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55년 김윤동(金潤東) 엽서(葉書)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乙未正月二十四日 金潤東 柳大錫 乙未正月二十四日 金潤東 柳大錫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55년에 서울 金潤東이 고흥 柳大錫에게 보내는 엽서 1955년에 서울 金潤東이 고흥 柳大錫에게 보내는 엽서. 柳重彬의 방문으로 先親遺文을 받아 감사하다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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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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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67년 장원택(張元澤) 우편엽서(郵便葉書)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丁未九月十五日 求禮郡 求禮邑 鳳棲里 張元澤 高興郡 高興邑 虎山里 柳大錫氏 丁未九月十五日 張元澤 柳大錫 1顆(흑색, 원형)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67년에 구례의 張元澤이 고흥 柳大錫에게 보낸 우편 엽서 1967년에 구례의 張元澤이 고흥 柳大錫에게 보낸 우편 엽서. *원문: 向者修書尊門以尋常置之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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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치부기록류

경신년 유절재(留節齋) 추감기(秋監記) 고문서-치부기록류-추수기 경제-농/수산업-추수기 庚申八月二十三日 庚申八月二十三日 全州崔氏門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경신년에 작성된 부안 유절재의 추감기. 경신년(庚申年) 8월 23일에 부안(扶安)의 유절재(留節齋)에서 작성된 추감기(秋監記)이다. 추감기는 전답과 소출량, 경작자 등이 기록된 문서로, 추수기(秋收記), 타조기(打租記), 색조기(色租記), 수세책(收稅冊) 등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이름으로 나온다. 이 문서는 학계에서 19세기 이후 지주제(地主制) 연구의 주요 자료로 흔히 이용되어 왔다. 이 문서에 지주가 작인들에게 소작을 둔 토지를 필지별로 전답의 소재지, 지적(두락), 작인 등과 함께 그 수확량이나 지대량을 매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풍흉이나 재해, 종자와 볏짚, 전세 등의 정보들을 기록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연유로 인하여, 토지경영의 실상을 담고 있는 추수기는 많은 연구자들이 지주제 연구와 관련된 주요 자료로 인식하고 활용하여 왔다. 특히 유절재는 부안의 유력한 씨족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의 재실(齋室)로, 각 파별로 다양한 계(契)를 설립하여 운영하여 왔다. 유절재에 소장된 회문(回文)을 통해서 드러난 계를 살펴보더라도 흥학계(興學稧), 처암공파계(處菴公派契), 봉사공파계(奉事公派契), 원재계(元齋契), 참봉공파계(叅奉公派契), 사문계(私門稧), 문중별청계(門中別廳稧) 등 다양하다. 이들 조직은 개별적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별도의 재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 재원은 다름 아닌 전답의 소유이다. 이들 계의 전답은 경영 과정에서 각 계마다 추수기 또는 추감기가 작성되었다. 이들 추감기에는 토지 소재지의 고을명과 지번, 지목, 지적, 경작료, 경작인 등이 차례로 적혀 있었다. 이러한 문서를 통해 부안의 유력 세족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의 당시의 경제적 실태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경신년의 이 추감기에는 부안의 하서면(下西面) 석상리평(石上里坪)과 통정리평(通井里坪), 행안면(幸安面) 신기리(新基里) 후평(後坪) 등 세 곳에 있는 전답과 도조(賭租), 소작인(時作)이 기재되어 있다. 석상리평은 전답 7필지 30두락지로 5석 40두를 세로 거두었으며, 시작(時作)은 최경원(崔敬元), 최경선(崔敬先) 두 사람이다. 통정리평은 1필지 5두락은 1석 5두를 세로 거두었으며, 시작은 최성도(崔成道)이다. 행안면 신기리 후평은 1필지 7두락으로 1석 10두를 세로 거두었으며, 시작은 최응수(崔應守)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치부기록류

기축년 유절재(留節齋) 추감기(秋監記) 고문서-치부기록류-추수기 경제-농/수산업-추수기 己丑八月 日 己丑八月 日 全州崔氏門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기축년에 작성된 부안 유절재의 추감기. 기축년(己丑年) 8월에 부안(扶安)의 유절재(留節齋)에서 작성된 추감기(秋監記)이다. 추감기는 전답과 소출량, 경작자 등이 기록된 문서로, 추수기(秋收記), 타조기(打租記), 색조기(色租記), 수세책(收稅冊) 등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이름으로 나온다. 이 문서는 학계에서 19세기 이후 지주제(地主制) 연구의 주요 자료로 흔히 이용되어 왔다. 이 문서에 지주가 작인들에게 소작을 둔 토지를 필지별로 전답의 소재지, 지적(두락), 작인 등과 함께 그 수확량이나 지대량을 매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풍흉이나 재해, 종자와 볏짚, 전세 등의 정보들을 기록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연유로 인하여, 토지경영의 실상을 담고 있는 추수기는 많은 연구자들이 지주제 연구와 관련된 주요 자료로 인식하고 활용하여 왔다. 특히 유절재는 부안의 유력한 씨족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의 재실(齋室)로, 각 파별로 다양한 계(契)를 설립하여 운영하여 왔다. 유절재에 소장된 회문(回文)을 통해서 드러난 계를 살펴보더라도 흥학계(興學稧), 처암공파계(處菴公派契), 봉사공파계(奉事公派契), 원재계(元齋契), 참봉공파계(叅奉公派契), 사문계(私門稧), 문중별청계(門中別廳稧) 등 다양하다. 이들 조직은 개별적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별도의 재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 재원은 다름 아닌 전답의 소유이다. 이들 계의 전답은 경영 과정에서 각 계마다 추수기 또는 추감기가 작성되었다. 이들 추감기에는 토지 소재지의 고을명과 지번, 지목, 지적, 경작료, 경작인 등이 차례로 적혀 있었다. 이러한 문서를 통해 부안의 유력 세족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의 당시의 경제적 실태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기축년의 이 추감기에는 부안의 석동평(席洞坪) 내 각 마을, 즉 연곡리와 통정리 등지에 있는 전답의 지번과 지목, 지적, 경작료, 경작인 등이 차례로 기재되어 있다. 연곡리에 있는 전답은 14곳이며, 통정리는 1곳이다. 경작인 중 안복동(安福同)이 연곡리 내 8곳을 경작했으며, 황종술(黃鍾述)이 4곳을 경작했다. 연곡리의 전답은 모두 5,860평이며, 통정리의 논은 1,517평이다. 이 성책문서의 끝에는 기축추향제수전기(己丑秋享祭需錢記)와 경인월삼십일문회(庚寅九月三十日門會), 경인년석동위토답관평기(庚寅年席洞位土畓觀坪記) 등이 차례로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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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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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간찰(簡札) 피봉(皮封)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柳生員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柳生員이 받은 簡札의 皮封 柳生員이 받은 簡札의 皮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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