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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42년 류영선(柳永善)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壬午臘念日 族弟 永善 壬午臘念日 柳永善 柳重憲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42년 고창의 柳永善이 고흥의 족인 柳重憲에게 보낸 간찰 1942년 고창의 柳永善이 고흥의 족인 柳重憲에게 보낸 간찰. *원문: 阻仰餘伏拜下復就承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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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모년 전주 전주최씨(全州崔氏) 토정리추감기(土亭里秋藍記) 고문서-치부기록류-추수기 경제-농/수산업-추수기 全州崔氏門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모년에 전주 소양면 토정리에서 작성된 전주최씨문중의 추감기. 모년에 전주(全州) 소양면(昭陽面) 토정리(土亭里)에서 작성된 전주최씨문중(全州崔氏門中)의 추감기(秋監記)이다. 소양면에는 전주최씨의 재실(齋室)인 분동재(粉洞齋)가 있는 곳이다. 추감기는 전답과 소출량, 경작자 등이 기록된 문서로, 추수기(秋收記), 타조기(打租記), 색조기(色租記), 수세책(收稅冊) 등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이름으로 나온다. 이 문서는 학계에서 19세기 이후 지주제(地主制) 연구의 주요 자료로 흔히 이용되어 왔다. 이 문서에 지주가 작인들에게 소작을 둔 토지를 필지별로 전답의 소재지, 지적(두락), 작인 등과 함께 그 수확량이나 지대량을 매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풍흉이나 재해, 종자와 볏짚, 전세 등의 정보들을 기록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연유로 인하여, 토지경영의 실상을 담고 있는 추수기는 많은 연구자들이 지주제 연구와 관련된 주요 자료로 인식하고 활용하여 왔다. 이들 추감기에는 토지 소재지의 고을명과 지번, 지목, 지적, 경작료, 경작인 등이 차례로 적혀 있었다. 이러한 문서를 통해 전주의 유력 세족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의 당시의 경제적 실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이 토정리 추감기에는 토정리에 사는 이만암(李萬岩)과 최극로(崔極老) 두 사림이 경작한 토지와 도조가 실려 있다. 이만암은 2두락의 논을 경작하였는데 도조는 10두이며, 최극로는 3필지 2두락, 5두락, 4두락의 논을 경작하였는데 도조는 각각 7두, 15두, 8두씩이다. 그밖에 사래(賜來) 3두락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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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42년 류영선(柳永善)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壬午驚蟄翌日 族弟 永善 壬午驚蟄翌日 柳永善 柳重憲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42년 고창의 柳永善이 고흥의 족인 柳重憲에게 보낸 간찰 1942년 고창의 柳永善이 고흥의 족인 柳重憲에게 보낸 간찰. *원문: 伏拜下狀就審新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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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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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류인명(柳仁明)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戊申九月十四日 羅州 宗中 濟水 仁明 虎山 宗中 僉座下 戊申九月十四日 柳仁明 柳大錫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68년에 나주의 柳仁明이 고흥의 宗人 柳大錫 등에게 보낸 간찰 1968년에 나주의 柳仁明이 고흥의 宗人 柳大錫 등에게 보낸 간찰. *원문: 時維季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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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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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송계성(宋桂星) 등 3인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三月望日 宋桂星 申瑞求 丁龍秀 柳永舒 柳敬浚 柳重必 柳重燮 僉座 三月望日 宋桂星 柳永舒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宋桂星 등 3인이 柳永舒 등 4인에게 보낸 간찰 宋桂星 등 3인이 柳永舒 등 4인에게 보낸 간찰. *원문: 謹詢天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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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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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을사년 송재섭(宋縡燮) 혼서(婚書) 고문서-서간통고류-혼서 종교/풍속-관혼상제-혼서 十一月二十八日 十一月二十八日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을사년 송재섭(宋縡燮)이 혼인 날짜를 정하기 위해 신랑 측에서 고흥 류생원 댁에 보내는 사주단자(四柱單子) 을사년 11월 28일에 송재섭(宋縡燮)이 혼인 날짜를 정하기 위해 신랑 측에서 고흥 류생원 댁에 보내는 사주단자이다. 신랑의 생년월일은 갑신년 10월 7일 자시이다. 연결문서로 간찰 1점, 피봉(皮封) 1점, 重封 1점이 있다. 사주단자는 定婚을 한 뒤 신랑 측에서 신부 측으로 신랑의 사주를 적어서 보낸 簡紙이다. 간지는 5번이나 7번을 접어 백지에 싼 뒤 피봉에 넣으며, 피봉에는 사주라고 쓰고 봉하지 않는다. 신부 측에 보낼 때 가급적 손 없는 날에 보내는데, 다복한 사람을 보내는 것이 상례이나 중매인이나 하인이 가기도 한다. 신부 측에서는 대청에 돗자리를 깔고 그 위에 새 상을 두어 신부의 부모님이나 남자 형제가 개봉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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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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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정유년 최주홍(崔朱洪) 봉덕재기(奉德齋記) 고문서-시문류-기 교육/문화-문학/저술-기 丁酉冬 朱洪 丁酉冬 崔朱洪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정유년에 최주홍이 봉덕재의 재건을 바라면서 작성한 기문. 정유년에 최주홍(崔朱洪)이 봉덕재(奉德齋)의 재건(再建)을 바라면서 작성한 기문이다. 봉덕재는 최주홍의 10세조인 최선립(崔善立) 때 부안군 동진면 내기리에 건립되었다. 이곳은 서쪽으로는 봉악산이 서 있고, 동쪽으로는 영주(瀛州)로 나가고, 앞쪽으로는 전주최씨가의 선조들이 묻힌 석동산(席洞山)이 바라보이는 명당 터이다. 봉덕재는 단지 몸을 닦고 수련하는 곳뿐만 아니라 선조들이 쌓은 업적을 계승하고 그 덕업에 누를 끼치지 않을 목적으로 세워진 곳이었다. 이런 까닭에 후손들이 그동안 때마다 찾아오고 일년에 한 번 제사를 드리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중간에 변고가 생겨 묘재(墓齋)와 인사(人事)가 겨우 형태만 남아 내실이 없게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최주홍은, 기문의 끝에서 이제 오늘에 이르러 사나운 풍랑은 사라지고 평안한 시기가 찾아와 다시 대본(大本)을 떨칠 시점에 이르렀으니, 동족들끼리 사사로운 감정을 잊고 서로 격려하고 사랑한다면, 조상에 보답하고 후손을 번창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위의 최선립은 전주최씨(全州崔氏)로서 부안에 처음 들어온 옹암공(瓮菴公) 최생명(崔生明)의 현손(玄孫)이다. 최생명의 아들 고궁당(固窮堂) 최수손(崔秀孫)은 뒤에 도동서원(道東書院)에 배향되었을 만큼 이름난 학자였으며 부안 전주최씨의 재실인 유절암(留節庵)을 창건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또 그의 다섯 아들 가운데 둘이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넷이 생원 진사시에 합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 아들 중 최계성(崔繼成)이 최선립의 조부이며, 아버지는 최활(崔活)이다. 보통의 기문이 새로 지은 서재나 재실을 대상으로 그 재실의 주인되는 사람에게 찬사를 보내는 형식으로 쓰여진 것과는 달리, 이 봉덕재기는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훼손된 재실을 재건하려는 염원으로 쓰여졌다는 점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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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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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923년 전주최씨 청취서(聽取書)와 변무서(辨誣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장 법제-소송/판결/공증-소장 大正十二年十月五日 大正十二年十月五日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23년 전주최씨 청취서와 변무서. 1923년 10월 5일에 작성된 전주최씨(全州崔氏) 청취서(聽取書)와 변무서(辨誣書)이다. 김규상(金珪相) 측이 입증의 목적으로 제출한 '최관석(崔觀錫) 등의 소장(訴狀)'은 위조된 것임을 밝히기 위해서 조사를 받은 내용과 이를 변명하는 내용의 문서이다. 청취서 1건과 변무서 4건이 기록되어 있다. 청취서는 조사관이 부안군(扶安郡) 보안면(保安面) 우동리(牛東里)에 사는 최병욱(崔炳郁)과 부령면(扶寧面) 옹중리(瓮中里)에 사는 최기홍(崔基洪)에게 의견을 청취하고 작성한 것이다. 1923년 10월 3일에 최병욱에게는 주소와 성명, 나이, 입장(入葬)한 연대, 전적(典籍)의 유무, 김소윤(金少尹)의 입장 여부, 최계성(崔繼成)과의 관계, 분묘 수 등 12개 항목을 질문하였고, 최기홍에게는 산판(山坂) 분쟁을 하지 않은 이유, 벌채 사실, 산송 내력, 이완용(李完用) 판결 후 이의(異議), 장축(狀軸) 안에 기재된 자들이 일문(一門)인지 여부 등 17항목의 질문을 하였다. 최기홍은 소장 안에 기재된 사람이 최씨문중 사람인가 묻는 질문에 최관석 외에 22명은 본인 문중의 사람이고 나머지 사람은 본인 문중의 족인이 아니라고 답변하였다. 변무서(辨誣書) 1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에 사는 최병욱이 총독부기수출장소(總督府技手出張所)에 제출한 변무서이다. 김규상(金珪相) 측이 입증할 목적으로 최관석(崔觀錫) 등의 소장이라고 하면서 갑자기 제출한 문권을 보니 허위무근(虛僞無根)한 것이며 소송을 뒤집을 목적으로 꾸미고 변환시킨 것이었다. 소장 안에 열서(列書)한 사람 중에 94인 중 48인은 무증부지(無証不知)한 사람이고, 14명은 혹 100여 년, 혹 몇십 년 전에 사망한 사람과 15세 혹은 10세 미만의 어린아이를 기재한 것으로 보아 위조한 사실이 분명하다며 전주최씨족보(全州崔氏族譜)의 내용을 첨부하고 참고하라고 하였다. 변명서(辨明書) 2 김규상이 최관석(崔觀錫) 등의 의송(議送)이라며 무고한 사실을 변명하는 내용이다. 사실(事實)은 김규상 측이 증거로 제출한 경신년 12월 15일 최관석(崔觀錫) 등의 의송(議送) 1장은 모두 허위로 꾸민 것에 불과하다. 그 소장 안의 사실도 부당할뿐더러 아래 열거한 94인 중 48인은 무증부지(無証不知)한 최가이고, 46인은 우리 최씨 족보 안에 이름이 있으나 그 가운데서 10인은 혹 100여 년 전 혹은 10년 전에 죽은 사람이거나 15세, 혹은 10세 이내의 어린 아이를 나열하여 썼으니 의송장을 위조한 사실은 명백하여 의심할 것이 없다. 그 이유를 아래에 기록하니 참고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이후 내용은 중략되었으며 변무서 1의 내용이 중복 기록되어 있다. 변무서(辨誣書) 3 (1,2와 앞부분 같음) 94인 중에 47인은 무증부지(無証不知)한 최가를 기재하였고 14인은 100년전 혹은 수십 년전 사망자이거나 15세 미만인 자인데 입록하였으니 위조사실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변무서(辨誣書) 4 (1,2와 앞부분 같음) 94인 중에 15인은 최씨 족보에 있는 사람이고 그중 9명은 200년 혹은 수십년 전 사람인데 기재하고 15세, 4, 5세 어린아이도 입록하였으니 위조사실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참고자료로 무증부지(無証不知)한 최가 48인의 성명, 족보에 나오는 사망자 및 유치아의 성명; 『전주최씨족보(全州崔氏族譜)』 1권, 2권에 기록된 최생명(崔生明), 최수손(崔秀孫), 최순성(崔順成), 최위(崔渭), 최필성(崔弼成), 최해(崔海), 최종필(崔宗弼)에 대한 내용; 14대조고(최생명)~고(考 崔雲洪) 등의 제주(祭主); 전주최씨족보묘표(墓表) 최생명~최유인(崔有仁)의 자(字), 기일, 배우자, 무덤 위치와 형태를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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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제홍(柳濟弘) 회갑시(回甲詩)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高興郡面虎東里 柳濟弘 朴松泉 柳濟弘 朴松泉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柳濟弘이 朴松泉의 壽宴을 축하하기 위해 작성한 詩 柳濟弘이 朴松泉의 壽宴을 축하하기 위해 작성한 詩. *祝朴松泉壽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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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박경진(朴璟鎭) 야산옹장연문(野山翁長筵文)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庚辰首夏 朴璟鎭 庚辰首夏 朴璟鎭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40년 朴璟鎭이 축하하기 위해 보낸 野山翁長筵文 1940년 朴璟鎭이 축하하기 위해 보낸 野山翁長筵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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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고흥류씨종중대표(高興柳氏宗中代表)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丙午年十月日 高興柳氏宗中代表 丙午年十月日 高興柳氏宗中代表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66년 10월 高興柳氏宗中代表가 보내는 간찰 1966년 10월 高興柳氏宗中代表가 보내는 간찰. 英密公遺墟碑 제막식 관련 안내 내용 *국한문혼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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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위석한(魏錫漢)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魏錫漢 柳大錫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65년에 장흥의 魏錫漢이 고흥의 柳大錫에게 보낸 간찰 1965년에 장흥의 魏錫漢이 고흥의 柳大錫에게 보낸 간찰. *원문: 夙聞貴邑之儒風蔚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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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오주석(吳柱錫)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庚申七月二十四日 小生 吳柱錫 庚申七月二十四日 吳柱錫 柳大錫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80년 7월 24일에 오주석(吳柱錫)이 류대석(柳大錫)에게 보낸 간찰(簡札). 1980년 7월 24일에 오주석(吳柱錫)이 류대석(柳大錫)에게 보낸 간찰(簡札)이다. 돌아가신 류중헌(柳重憲)의 글을 모아 문집을 편찬하자는 내용 류중헌은 1873년(고종 10) 10월 5일에 태어났으며 1952년 9월 9일에 졸하였다. 자(字)는 사범(士範)이고 호(號)는 야산(野山)이다. 석농(石農) 오진영(吳震泳)과 학문을 교류하였다. 묘는 호산(虎山) 호서(虎西) 불암동(佛岩洞)에 있다. 부인은 송위희(宋胃僖)의 딸 남양송씨(南陽宋氏)이다. 1872년(고종 9)에 태어났으며 1947년 1월 13일에 졸하였다. 류대석은 1900년(광무 4) 8월 18일에 태어났으며 몰년은 알 수 없다. 초명(初名)은 기석(基錫)이다. 자(字)는 계언(桂彥)이고, 호(號)는 송은(松隱)이다. 부인은 박영진(朴璟鎭)의 딸인 진원박씨(珍原朴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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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류병헌(柳秉憲)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1982.3.28 1982.3.28 柳秉憲 柳大錫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82년에 柳秉憲이 고흥의 족인 柳大錫에게 보낸 간찰 1982년에 柳秉憲이 고흥의 족인 柳大錫에게 보낸 간찰. *국한문혼용, 편지지 2장에 연결, 가로 필기 *원문: 謹啓 陽春佳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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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년 전주최씨(全州崔氏) 사은재소서(沙隱齋小序) 고문서-시문류-서 교육/문화-문학/저술-서 戊寅三 戊寅三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무인년에 전주최씨의 누군가가 작성한 사은재소서. 무인년(戊寅年)에 전주최씨(全州崔氏)의 누군가가 재(齋)를 짓고 자신의 호를 따서 사은재(沙隱齋)라고 명명하고 지은 서(序)다. 저자는 이 소서에서 자신의 8세조 사포공(沙浦公)이 남원에서 이곳 하사리(下沙里)로 이거해 왔다고 하였다. 유절재 소장문서 가운데 '1940년 정기(鄭琦) 사포재기(沙浦齋記)'에 따르면, 사포재는 전주최씨(全州崔氏) 사포(沙浦) 최봉하(崔鳳河)와 부인 연안차씨(延安車氏)의 합장묘가 있는 승주(昇州) 관아 동쪽 앵무산 아래 월산 언덕에 있에다. 이곳에는 사포의 현손 남산(藍山) 최진홍(崔振弘)도 묻혀 있다. 일찍이 남원(南原) 주암(舟巖)에 있던 선조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의 고가(古家)에 살던 사포는 인조(仁祖) 때 불운하여 더 이상 출사(出仕)의 길이 열리지 않자 이곳 앵무산 아래 쪽으로 낙향하여 사포정(沙浦亭)을 짓고 시문과 경사 공부에 전념하였다. 사포 최봉하의 자(字)는 인서(麟瑞)로, 전주최씨 중에서는 남원(南原) 방계(芳磎)에서 승주(昇州)로 내려 온 첫 인물이었다. 이곳 승주에 사는 전주최씨의 시천조(始遷祖)인 셈이다. 추측컨대 사은재도 사포재 인근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사포공의 9대손이라고 한다면 귀산(龜山) 최춘호(崔春鎬)와 같은 항렬의 인물로 추정되지만 문서의 끝 부분이 훼손되어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서문의 내용은 문답식으로 작성되었다. 예컨대 자신이 별도로 재명(齋名)을 쓰지 않고 자신의 호(號)를 따서 지은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묻고, 이에 대하여 재와 재에서 살고 있는 자신이 한 몸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라고 자문자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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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1929년 이우면(李愚冕) 춘곡서(春谷序) 고문서-시문류-서 교육/문화-문학/저술-서 己巳冬十一月旣望 李愚冕 己巳冬十一月旣望 1929 李愚冕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29년에 이우면이 최병우의 호 춘곡에 대하여 작성한 서. 1929년 11월에 이우면(李愚冕)이 최병우(崔秉禹)의 호(號) 춘곡(春谷)에 대하여 작성한 서(序)다. 자신이 비록 늙고 병들어 붓을 놓은 지 오래되어 다른 사람의 호(號)에 대하여 감히 말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지만, 친구 정인소(鄭寅韶)의 얘기를 들어보니 최병우야말로 참다운 군자(君子)이니 사양할 수 없다면서 춘곡(春谷)이라는 호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봄(春)은 그 기운이 조화롭고 골(谷)은 그 땅이 깊고 깊어서, 골이 봄을 만나면 곧 만물이 발생하는 시작이 되니 그 나머지는 다 헤아릴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최병우가 호남의 뛰어난 명사라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자신은 늙고 아첨을 즐겨하지는 않지만 시를 지어 서를 쓴다고 하였다. 이우면은 이 시에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한유(韓愈)가 이원(李愿)을 반곡(盤谷)에 보내면서 지어 준 '송이원귀반곡서(送李愿歸盤谷序)'를 인용하면서 최병우가 은거지에서 군자의 생활을 보내면서 출유천교(出幽遷喬), 즉 깊은 골짜기에서 나와 높은 나무로 날아가듯이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이우면은 1881년(고종 18)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관에 들어가 홍문관 부수찬, 교리, 사헌부 장령을 지냈으며, 1885년 공조참의, 대사간, 형조참의를 지냈고, 1886년 이조참의, 호조참의, 대사성이 되었다. 그 뒤 승정원 우승지 등을 거쳐 1890년 호조와 병조의 참판을 지냈고, 1891년 한성부 우윤, 예조참판, 1892년 한성부 좌윤, 승정원 좌승지를 지냈다. 1896년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 비서원승(秘書院丞), 1898년 회계원경(會計院卿), 1902년 장례원경(掌禮院卿)이 되었다. 1905년 예식원장례경(禮式院掌禮卿), 임시서리 궁내부대신사무, 비서감경(秘書監卿)이 되어 을사조약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을사오적의 처형을 강력히 요청하였다. 1906년 궁내부특진관, 비서감경, 홍문관학사, 장례원경 등을 지냈다.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를 기사년으로 밝히고 있어서 이를 1929년으로 추정했으나, 이미 조선이 망한 뒤에 장례원경 홍문관학사라는 관직명을 그대로 기재하고 있는 점이 이상하다. 간지를 잘못 쓴 것으로도 보이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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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정묘년 [류]연표([柳]然彪)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丁卯元月七日 宗人 然彪(字 啓文) 丁卯元月七日 [柳]然彪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정묘년에 宗人 然彪가 보내는 간찰 정묘년에 宗人 然彪가 보내는 간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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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류대석(柳大錫)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丁未正月十九日 族從 大錫 丁未正月十九日 [柳]大錫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67년 정월 19일에 族從 大錫이 보내는 간찰 1967년 정월 19일에 族從 大錫이 보내는 간찰. *국한문혼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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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류대석(柳大錫)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丁未正月十九日 族從 大錫 丁未正月十九日 [柳]大錫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67년 정월 19일에 族從 大錫이 보내는 간찰 1967년 정월 19일에 族從 大錫이 보내는 간찰. *국한문혼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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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간찰(簡札) 피봉(皮封)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松峴 座省案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간찰피봉 간찰피봉. *연관된 세 간찰 중 어느 것의 피봉인지 알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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