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진사(進土) 최안손(崔顔孫) 묘갈명(墓碣銘) 고문서-시문류-묘문 개인-전기-묘문 丁酉仲春 全義李炳殷撰 丁酉仲春 李炳殷 崔顔孫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57년 음력 2월에 이병은이 작성한 최안손의 묘갈명 병서의 초안 1957년 음력 2월에 이병은(李炳殷)이 진사공 최안손(崔顔孫)의 평생 사적(事蹟)을 작성한 묘갈명(墓碣銘) 병서(幷序)의 초안(草案)이다. 최안손(崔顔孫)의 자는 술성(述聖)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그는 한훤(寒暄) 김굉필(金宏弼)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최안손은 어릴 때부터 기질이 강직하고 명민하였으며 고집이 세고 절개가 굳어 남에게 굴종하지 않았다.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에 모두 합격한 뒤에 학문에 매진하면서 당대의 석학인 복재(服齋) 기준(奇遵 1492-1521), 충암(冲菴) 김정(金淨 1486-1520)과 돈독히 교류하였다. 연산군(燕山君) 때 그가 사망하자 사림(士林) 모두 큰 건물의 대들보와 거목이 부러졌다고 탄식하였다. 최씨의 시조는 문성공(文成公) 아(阿)이며, 그의 선조 최심(崔深), 최구지(崔久之), 최석견(崔石堅) 등 3세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진사공의 부인은 예안김씨(禮安李氏)이며, 부부는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의 이름은 한두(漢斗)이고, 사위는 남양홍씨(南陽洪氏)와 순흥안씨(順興安氏)이다. 손자는 최천일(崔千一), 증손으로달효(達孝) 증효(曾孝) 창효(昌孝) 대효(大孝) 민효(民孝) 등 5명이다. 진사공의 묘는 완산의 서쪽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