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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簡札)省式言 秋雨腦人 懷仰政苦 料外得拜○惠䟽感極之至 謹審侍奠餘棣候 連衛萬支 諸節亦勻穩 哀慰賀區區不任之至 弟依昔潰潰 而京直從亦安過 然近遭覺里喪變 昨日還家耳 示中一顧之惠 尤極感極感 而若待世累小間則 何時其然也 奉呵奉呵 四貫同 依○敎伴送 考領如何 餘萬來伻立促姑不備䟽禮庚戌七月念六日 弟 辛載坤 謝䟽(皮封)玉溪○哀座○回納茅坪謝䟽 謹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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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년 정치헌(鄭致憲)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鄭致憲 李生員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무자년 3월 23일에 정치헌이 사돈 이 생원에게 지금 사위를 맞이할 계획이므로 이때 사돈도 함께 와주실 것을 권유하는 내용 등을 전한 간찰 무자년 3월 23일에 정치헌이 사돈 이 생원에게 지금 사위를 맞이할 계획이므로 이때 사돈도 함께 와주실 것을 권유하는 내용 등을 전한 간찰이다. 상대방의 편지는 받아 보았으나 직접 뵙지 못하여 새로 사돈의 우호를 맺은 입장에서 그립고 서글픈 심정 형언하기 어렵다는 내용, 늦봄에 사돈 형제분들과 부모님 모시고 사는 사위의 생활이 평안한 지 안부를 묻는 내용, 자신은 갯버들 같은 약한 체질로 가을도 되기 전에 먼저 쇠약해져 한탄스럽지만 딸이 사돈의 보호 아래 무사히 편안하게 지내고 있어 다행이라는 내용, 지금 사돈 사촌의 생신을 맞아 서로 응해 와서 경사스러울 텐데 자신은 마침 병이 들어 참석하지 못해 한스럽다는 내용, 사위를 지금 막 맞이해 올 계획이므로 사돈도 함께 자신의 집에 와주시기를 권하는 내용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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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6년 의인이씨(宜人李氏) 분급문기(分給文記) 1 고문서-명문문기류-분재기 宜人李氏 羅晩命 羅斗冬<着名>, 金珝<着名>, 金瓚<着名>, 金珽<着名>, 羅晩運<着名> □…□(4.5×4.8), □…□ 2顆(5.3×5.0)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1137_001 1706년 2월 27일에 재주인 계모 의인이씨가 가옹의 대상을 마친 뒤에 가옹이 미처 처리하지 못한 재산 등을 가옹의 유지에 따라 가옹의 부모·가옹 내외·전처에게서 낳은 죽은 아들의 제위조 및 전처에게서 낳은 두 딸과 양자에게 각 몫을 나누어 지급하면서 작성한 재산상속 문서 1706년(숙종 32) 2월 27일에 재주(財主)인 계모(繼母) 의인이씨(宜人李氏)가 가옹(家翁)의 대상(大祥)을 마친 뒤에 가옹이 미처 처리하지 못한 재산 등을 가옹의 유지(遺旨)에 따라 가옹의 부모·가옹 내외·전처(前妻)에게서 낳은 죽은 아들의 제위조(祭位條) 및 전처에게서 낳은 두 딸과 양자에게 각 몫을 나누어 지급하면서 작성한 재산상속 문서이다. 의인이씨의 가옹이 세상을 떠나고 세월이 흘러 이제 막 대상까지 끝나 차마 말할 수 없이 비통하였다. 가옹에게는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딸만 있고 후사(後嗣)가 없었는데 늦은 나이에 양자(養子)를 얻어 선조(先祖)의 제사를 의탁할 곳이 있게 되었으나 미처 집안 일을 다 처리하지 못하였다. 가옹이 임종할 때에 제위조 및 자녀에게 나누어 줄 땅과 노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누이의 아들인 김찬(金瓚)에게 글자를 쓰게 하게 하여 조목별로 열거해 놓았다. 이에 한결같이 가옹이 남긴 뜻에 따라 각 자녀에게 몫을 나누어 상속하고 분재기를 작성하였는데, 전처에게서 낳은 죽은 아들인 만복(晩復) 또한 제위조가 없어서는 안되기에 그의 제위조를 후록(後錄) 하였다. 각 제위조와 각 자녀별 상속내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옹 부모의 제위조는 여종 1구, 종 1구, 논 15마지기 68짐, 밭 21마지기 등 97짐 9뭇이다. 이 제위조는 전에 이미 구획하여 정해 놓았으나 문서로 작성하지 않아 이 문서에 함께 기록해 두었다. 가옹 부부의 제위조는 종 1구, 논 21마지기 88짐 5뭇이며, 전처에게서 낳은 죽은 아들 만복의 제위조는 논 2마지기이다. 장녀의 남편 학생 고경(高璟)의 몫은 여종 1구, 종 1구, 논 10마지기 30짐 9뭇, 밭 3말 5되지기, 차녀 남편 유학 김수익(金壽益)의 몫은 여종 덕이(德伊) 1구, 논 10마지기 25짐 7뭇, 밭 4말 2되지기 7짐 6뭇이다. 이중 여종 덕이는 사위 이름으로 산 것이지만 가옹이 살아있을 때에 값을 지급하여 사게 한 것이므로 지금 이 몫 안에 기록하니 나중에 의심하지 말 것을 추록하였다. 양자 만명(晩命)의 몫은 종 4구, 여종 2구, 논 28마지기 등 54짐 1뭇이다. 이중에 가옹 남매가 몫으로 받은 전답과 노비는 모두 가옹의 어머니가 처분한 것을 따라 나눈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러나 세월만 보내다가 미처 문서를 작성하지 못하여 지금 이 문서를 작성할 때에 강옹의 여러 누이의 아들들이 함께 참여하여 착명(着名)하므로 마땅히 이 문서로 훗날의 증거로 삼을 것을 추록하였다. 또 도망 노비는 소명(小名)으로 문서 왼쪽 아래에 열거해서 적어두므로 내외 자손 중에서 추심한 자가 반을 갖고 그 나머지 반은 손자에게 갖도록 하되 1구만을 추심한 경우에는 모두 손자가 갖도록 하였다. 도망 노비의 수는 종 4구, 여종 2구이며, 이노곡(伊老谷)에 있는 약간의 전답은 몫으로 나누기에는 양이 너무 적고, 죽은 아들 만복의 장지는 너무 먼 곳에 있어 영원히 외로운 혼으로 만들었으므로 너무 불쌍하다. 이에 장차 선산의 산기슭으로 묘를 옮길 계획이므로 그때 이장 비용으로 이노곡을 팔아서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내용을 문서 끝에 기재하였다. 이 문서를 작성할 때 참여한 사람은 재주인 계모 의인이씨를 비롯하여 증인으로 가옹의 동성(同姓) 8촌 동생인 생원 나두동(羅斗冬), 이성(異姓) 3촌 조카인 유학 김후(金珝), 유학 김찬(金瓚), 유학 김정(金珽) 등 4인 및 이 문서를 작성한 필집 가옹의 동성 7촌 조카 유학 나만운(羅晩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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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光二十九年 月日 羅州牧考己酉成籍戶口帳內荷衣島於恩村住第二統第六戶閒良金聖仁故代達五年四十一己巳 本 金海父閒良 聖仁祖閒良 弼奉曾祖閒良 尙巾外祖閑良 朴得大 本密陽妻黃姓年三十六甲戌 本長水父閑良 碩用祖閑良 憲曾祖閑良 無知外祖閑良 鄭美 本慶州率弟達表年二十四丁亥 丙午戶口相凖 [周俠 字改印][羅州牧使之印]牧使[署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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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년 나성채(羅成采)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靈巖郡守 羅成采 行郡守<押> □…□(6.5×6.5),周挾字改印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1120_001 1819년(순조19)에 영암군(靈巖郡)에서 나성채(羅成采, 39세)에게 발급한 준호구(準戶口). 1819년(순조19)에 영암군에서 북일시면 냉천동(현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에 사는 나성채에게 발급해준 준호구이다. 나성채는 39세이고, 신축년(1781)생이며, 본관은 나주이다. 아버지는 나언회(羅彦晦)이고, 조부는 나종유(羅宗有)이며, 증조부는 나두남(羅斗南)이다. 외조부는 정익성(鄭益成)이고,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아내는 김씨(金氏)로, 나이는 41세이고, 기해년(1779)생이며, 본관은 김해이다. 김씨의 아버지는 김운흥(金運興)이고, 조부는 김윤상(金胤商)이며, 증조부는 통덕랑(通德郎) 김시규(金始圭)이다. 외조부는 김이서(金履瑞)이고, 본관은 면성(綿城, 현 전라남도 무안)이다. 아들은 나용득(羅龍得)으로 나이는 12세이고, 무진년(1808)생이다. 노비는 앙역(仰役)노비 1명이고, 이름은 채덕(采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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嘉慶二十四年己卯月日 靈巖郡考丙子戶口成籍帳內 北一始面永保冷泉洞里 第一統統首羅成采第一戶 幼學羅成采 年三十九辛丑 本羅州父學生彦晦祖學生宗有曾祖學生斗南外祖鄭益成 本晉州妻金氏齡四十一己亥 本金海父學生運興祖學生胤商曾祖通德郞始圭外祖學生金履瑞本綿城率子龍得年十二戊辰賤口秩 仰役婢采德年三十等 丙子戶口自首者行郡守[署押][周挾字改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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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나도신(羅燾臣)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羅州牧使 羅燾臣 牧使<押> □…□(7.0×7.0),周挾改字印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1120_001 1894년(고종31)에 나주목(羅州牧)에서 나도신(羅燾臣, 48세)에게 발급한 준호구(準戶口). 1894년(고종31)에 나주목(羅州牧)에서 나주목 신촌면 용두리(현 전라남도 나주시 안창동)에 사는 나도일에게 발급해준 준호구이다. 나도운(羅燾雲)은 42세이고, 정미년(1847)생이며, 본관은 나주이다. 아버지는 나후집(羅厚集)이고, 조부는 나시완(羅時完)이며, 증조부는 나성채(羅聖采)이다. 외조부는 이현빈(李顯彬)이고, 본관은 함풍(咸豊)이다. 아내는 정씨(鄭氏)로, 48세이고, 정미년(1847)생이며, 본관은 나주이다. 정씨의 아버지는 정인혁(鄭仁赫)이고, 조부는 정기표(鄭基杓)이며, 증조부는 정인운(鄭麟運)이다. 외조부는 양석포(梁錫圃)이고, 본관은 제주이다. 아들은 나휘서(羅徽瑞)이고, 무진년(1868)생이다. 노비는 앙역(仰役)노비 1명이고 이름은 영덕(永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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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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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緖二十年 月 日 羅州牧考甲午成籍戶口帳內新村面龍頭里住第一統第一戶幼學羅燾臣年四十八丁未 本羅州父學生厚集祖幼學時完曾祖學生聖采外祖學生李顯彬 本咸豊妻鄭氏齡四十八丁未 籍羅州父幼學仁赫祖學生基杓曾祖學生麟運外祖學生梁錫圃 本濟州 率子徽瑞年戊辰仰役婢永德甲寅生等 甲午戶口自首者行牧使[관인] 1[周挾字改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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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허복일(許福一)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昌平縣監 許福一 行縣令<押> □…□(6.8×6.8)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94년에 창평현에 사는 호주 허복일이 가족 구성원의 인적 사항과 소유 노비 현황 등을 기록한 호구단자를 관에 제출하여 확인을 마치고 돌려받은 준호구 1894년(고종 31)에 창평현에 사는 호주 허복일이 가족 구성원의 인적 사항과 소유 노비 현황 등을 기록한 호구단자를 관에 제출하여 확인을 마치고 돌려받은 준호구이다. 허복일의 거주지는 창평현(昌平縣) 동서면(東西面) 화성리(花城里)이고 오가작통 순번은 제1통 1호이다. 직역은 유학(幼學)이고 올해 나이는 39세 병진생(丙辰生)이며,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허복일의 사조(四祖)는 생부(生父) 학생 윤({玉+侖}), 양부(養父) 학생 영(瑛), 할아버지 학생 창(淐), 증조(曾祖)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 집두(集斗), 외조(外祖) 학생 남병두(南柄斗)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허복일의 아내 이씨는 나이 22세 계유생(癸酉生)이고 본관은 함평(咸平)이다. 이씨의 사조는 아버지 학생 찬서(爘緖), 할아버지 학생 유홍(儒洪), 증조(曾祖) 학생 석운(錫運), 외조 학생 고제룡(高濟龍) 본관은 장흥(長興)이다. 이외 가족으로 어머니 남씨(南氏) 나이 60세 을미생(乙未生)이 있으며, 소유하고 있는 종 채례(采禮)가 있다. 이 문서의 작성연호로 표기되어 있는 '광서십구(光緖十九)'는 갑오년(甲午年)인 '광서이십(光緖二十)'의 오자(誤字)로 추정된다. 호적개정은 자·오·묘·유자(子·午·卯·酉子) 식년(式年)이지만 광서 19년은 계사년(癸巳年)이며, 문서에 기재되어 있는 허복일과 가족의 생년과 나이를 계산하면 갑오년인 1894년이다. 또한 허복일이 호구단자를 제출한 연도를 표기한 '신묘식(辛卯式)'은 1891년 이전 호적개정 식년이므로 '갑오식(甲午式)'의 오자로 추정된다. 이 문서에 '호적단자(戶籍單子)'라고 적혀 있고 열서(列書) 형식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창평현령의 서압(署押)과 관인(官印)이 찍혀있고, 주묵(朱墨)의 오가작통 통호(統戶)가 적혀 있다. 이는 제출한 호구단자를 구호적(舊戶籍)과 대조 확인을 마친 뒤에 허복일에게 다시 돌려준 것이므로 준호구로 분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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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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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光八年月日 羅州牧考戊子成籍戶口帳內 新村面內永里住第四統第二戶幼學羅聖采年四十八辛丑 本羅州父學生彦晦祖學生宗有曾祖學生允明外祖學生鄭益成 本晉州妻金氏齡五十己亥 本金海父學生運興祖學生胤商曾祖通德郞始圭外祖學生金履瑞 本綿城率子時化年二十一戊辰仰役秩 奴永德年甲寅 婢采德年三十四等 戊子戶口相準者牧使[署押][周挾字改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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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언간규식서(諺簡規式書)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미상 孫女 等 祖父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한글 편지 곧 언간(諺簡)의 규식을 모아서 수록한 서적 한글 편지 곧 언간(諺簡)의 규식을 모은 언간규식서(諺簡規式書)이다. 한글 편지 규식 7건과 함께 한글 가사(歌辭) 2편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한글 편지는 시집간 손녀[손여]가 할아버지[ᄒᆞᆫ아바님]에게 쓴 편지, 조부가 시집간 손녀[손여]에게 쓴 답장, 시집간 손녀[손여]가 할머니[ᄒᆞᆫ마님]에게 쓴 편지, 시집간 딸[여식]이 어머니[어마님]에게 쓴 편지, 시집간 여동생[ᄉᆞᄆᆡ]이 오빠[형님]에게 쓴 편지, 시집간 여동생[ᄉᆞᄆᆡ]에게 쓴 답장, 딸을 시집보낸 부인이 사위를 보내달라는 내용으로 사돈에게 쓴 편지가 차례로 수록되어 있는데, 5장 반 분량으로 기록되어 있다. 모두 혼인한 여성이 한글로 편지를 쓸 때 긴요하게 쓸 수 있는 사례에 해당한다. 각 편지의 앞부분에는 'ᄒᆞᆫ아바님젼 상셔'와 같이 수신자가 명시되어 있고, 뒷부분에는 '연 월 일 손여 살이'와 같이 일자 미상의 발급일과 발신자가 명시되어 있다. 한글 가사는 '형제상별가(兄弟相別歌)[우리 형제 ᄉᆞᆼ별가]'가 2장, '회심곡(回心曲)'이 6장 분량으로 기록되어 있다. 형제상별가는 혼인으로 인해 이별하게 된 형제가 갑오년의 동학농민운동, 정미년 의병 등 국난을 겪은 뒤 형의 나이 60세에 다시 만났다가 헤어진 뒤의 설움을 기록한 것이다. '회심곡'은 병들어 죽을 때의 모습, 저승사자를 따라가 죄의 경중에 따라 재판을 받는 모습 등 죽음과 관련된 불교적인 세계관을 표현한 내용이다. 마지막에는 '쓰기 싫어서 글씨가 괴상하다.[쓰기 실허 글씨 가괴〃〃 ᄒᆞ노라]'라는 문구로 끝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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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分金丁酉丁卯安葬戊申十一月十九己丑下棺巳時穴深從生土開土安金十一月十八日未時取土壬丙方破墓十一月十八日未時西先破發引隨便停柩立伏壬丙方呼冲丁未乙未己未等生人下棺時小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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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송영수(宋永壽)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潭陽府使 宋永壽 行府使<押> □…□(7.5×7.5),周挾改字印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88년 담양부에서 호주 송영수에게 동년의 호적대장에서 해당 부분을 등서하여 발급한 준호구 1888년(고종 25) 담양부에서 호주 송영수에게 동년(同年)의 호적대장을 토대로 작성하여 발급해 준 등본 성격의 준호구로 열서(列書) 형식으로 기재되어 있다. 송영수의 거주지는 담양부(潭陽府) 고지산면(古之山面) 외추동(外楸洞)이다. 직역은 유학이고 올해 나이는 33세 을묘생(乙卯生)이며, 본관은 신평(新平)이다. 송영수의 사조(四祖)는 아버지 통덕랑(通德郞) 각현(珏鉉), 할아버지 통훈대부 행사헌부지평(通訓大夫行司憲府持平) 돈(燉), 증조(曾祖) 통훈대부 행고부군수 전주진관 병마동첨절제사(通訓大夫行古阜郡守全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 문집(文楫), 외조(外祖) 학생 남성엽(南成燁)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송영수의 아내 이씨(李氏)는 나이 25세 계해생(癸亥生)이고 본관은 함풍(咸豊)이다. 이씨의 사조는 아버지 학생 정헌(㝎憲), 할아버지 학생 돈수(敦秀), 증조(曾祖) 학생 대서(大緖), 외조 학생 이종윤(李鍾潤) 본관은 원주(原州)이다. 소유하고 있는 종 시월[十月]이와 도망간 여종 귀례(貴禮)가 있다. 문서에는 담양부사(潭陽府使)의 관인(官印)과 서압(署押), 주협개자인(周挾改字印)이 찍혀있으며, '창색(唱色)'과 '준색(凖色)'이 쓰여 있으나 이름은 기재되어 있지 않다. 창색은 호적대장에서 해당 부분을 읽어주는 사람을 의미하고, 준색은 대조를 맡은 사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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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光十四年 月 日 羅州牧考甲午成籍戶口帳內 新村面內永里住第四統第一戶幼學羅聖采年五十四辛丑 本羅州父學生彦晦祖學生宗有曾祖學生允命外祖學生鄭益成 本晉州妻金氏齡五十六己亥 本金海父學生運興祖學生胤商曾祖通德郞始圭外祖學生金履瑞 本綿城率子時化年二十七戊辰仰役秩 婢永德年甲寅等 甲午戶口相準者牧使[署押][周挾字改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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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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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장택기(葬擇記) 3 고문서-치부기록류-택기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병술생 남성 망자의 장택기 병술생 남성 망자의 장택기이다. 갑신생 아내는 생존해 있으며, 정미생인 아들과 며느리를 주상(主喪)으로 적었고, 차자(次子) 넷의 간지만 쓰고 다른 자손들은 적지 않았다. 묫자리인 장산(葬山)의 방위와 좌향을 적었고 산지의 연운(年運)을 표시하였다. 안장(安葬)하는 날짜는 9월 15일, 하관(下棺)은 자시(子時)이다. 정상(停喪), 입복(立伏), 취토(取土)는 임병(任丙) 방향이고, 조궁(釣弓)과 세압(歲押)은 거리낄 것이 없다고 하였다. 입관과 계빈(啓殯)할 때 일진과 맞지 않는 생년을 기록하는 호충(呼冲)은 신사생, 신미생, 을미생 사람은 하관(下棺)할 때 피하라고 되어 있다. 매장 연월일시의 간지를 쓰는 사과(四課)는 조명(造命)이라고도 하는데, 이 경우는 정묘년 경술월 을축일 병자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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乾化命丙戌土 主喪丁未 次甲寅辛亥辛酉甲子坤生命甲申水 婦丁未葬山坎癸龍壬亥落脉丑艮作局丑入首艮坐坤向辛酉巽得丁破運正甲辰火 泊在中宮 黃天氣戊土司令洪丁未水分金丁丑水 地山謙卦 十一日至十五六丁明氣到穴透地戊寅土命空庚寅辰卯 刑癸未 劫丁亥 梟甲寅 嗔丁巳 刃辛亥辛酉午未 癸丑 癸亥 甲申 癸巳 壬午七条丙辰 怕庚申 消庚申 遊戊寅 旬十日 箭寅申月日時壬辰 辛酉 壬午官癸酉 印乙卯 財辛巳 福戊午 彔乙巳 馬丙申癸卯 乙巳 辛亥 戊子 己巳 戊申貴己酉己亥 六儀申子辰 子丑寅辰巳午戌乙酉乙亥 寅午戌 胎養生官冠旺庫開土 冬月十四日寅時安金 從便啓■殯同月十四日巳時南先破發{車+引} 隨時安葬 九月十五日■■乙丑下棺 子時穴深 四尺一寸停喪立伏 壬丙方取土釣弓 無忌歲押呼冲 ■■■■■■〔戊午甲子庚子〕辛巳辛未乙未生人下棺時少避四課 根丁卯火枝庚戌金花乙丑金實丙子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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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婚書)伏惟孟冬尊體動止萬重仰溸區區第長子親事旣蒙頷可私楣之幸庚帖仰呈涓吉回示之如何伏惟尊察謹拜 上狀丙申十一月二十六日慶州后崔義壽拜上(皮封)密陽郡府北面雲田里 崔生家 下執事密陽郡山內面加者里 郭生員宅 座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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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년 김성인(金聖仁)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羅州牧使 金聖仁 牧使<押> 羅州牧使之印(7.1x7.1), 周俠無改印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1096_001 1840년 나주목에서 호주 김성인에게 동년의 호적대장에서 해당 내용을 등서하여 발급한 준호구 1840년(헌종 6) 나주목(羅州牧)에서 호주 김성인에게 동년(同年)의 호적대장을 토대로 작성하여 발급해 준 등본 성격의 준호구로 열서(列書) 형식으로 기재되어 있다. 김성인의 거주지는 나주목(羅州牧) 하의도(荷衣島, 현 전남 신안군 하의면에 속한 섬) 어은촌(於恩村) 오가작통 순번 제2통 6호이다. 직역은 한량(閑良)이고 올해 나이는 72세 기축생(己丑生)이며,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김성인의 사조(四祖)는 아버지 한량 필봉(弼逢), 할아버지 한량 상건(尙巾), 증조(曾祖) 한량 연백(延伯), 외조(外祖) 한량 김절순(金節順) 본관은 김해이다. 김성인의 아내 박씨는 나이 65세 병신생(丙申生)이고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박씨의 사조는 아버지 한량 득대(得大), 할아버지 한량 경한(敬漢), 증조(曾祖) 한량 계춘(桂春), 외조 한량 임춘봉(林春逢) 본관은 나주이다. 이외 가족 구성원으로 아들 달오(達五)가 있으며, 나이 32세 기사생(己巳生)이다. 문서에는 나주목사(羅州牧使)의 관인(官印)과 서압(署押) 및 주협무개인(周俠無改印)이 찍혀있으며, 1837년 호적과 대조 확인을 마쳤다는 '정유호구상준(丁酉戶口相凖)'이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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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道光二十年 月 日 羅州牧考庚子成籍戶口帳內荷衣島於㤙村住第二綂第六戶閑良金聖仁年七十二己丑本金海父 閑良 弼奉祖 閑良 尙巾曾祖閑良 延伯外祖閑良 金節順 本金海妻 朴姓年六十五丙申 本密陽父閑良 得大祖閑良 敬漢曾祖閑良 桂春外祖閑良 林春逢 本羅州率子達五年三十二己巳等丁酉戶口相凖 [周俠無改印][羅州牧使之印]牧使[署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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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703년 나두거(羅斗居) 계후입안(繼後立案) 고문서-증빙류-입안 禮曹 羅斗居 參議<押>, 佐郞<押> 禮曹之印 9顆(9.0×9.0)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703년(숙종29) 5월에 예조에서 나두거가 나만명을 계후로 들이는 것을 승인하면서 발급한 계후입안 1703년(숙종29) 5월에 예조에서 나두거(羅斗居)에게 나두남(羅斗南)의 둘째 아들 나만명(羅晩明)을 계후(繼後)로 입적 하는 것을 허락하면서 발급해 준 계후입안(繼後立案)이다. 승계할 후사가 없는 나두거에게 그의 8촌 동생인 나두남의 둘째 아들 나만명을 양자로 삼도록 허락한 내용으로 입안이 작성되기 까지 제출된 문서인 나두거와 나두남 양측의 호적, 나두거의 계후입안 신청 소지, 나두남의 입안신청 소지, 나두거의 조목(條目), 나두남 조목, 두 사람의 문장(門長)인 전장령(前掌令) 나선(羅{礻+宣})의 함사조목(緘辭條目), 이를 모두 확인하여 예조에서 국왕에게 올린 계목(啓目)의 내용을 차례로 기록하고 이를 받아 동부승지 신 유명홍이 담당하여 국왕으로부터 '계의윤(啓依允)'을 받았음을 기록해 놓았다. 인장으로 본문 곳곳에 「예조지인(禮曹之印)」 9개를 답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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