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성공(司成公) 최순성(崔順成) 묘갈(墓碣) 고문서-시문류-묘문 개인-전기-묘문 從九世孫鼎錫謹撰 崔鼎錫 崔順成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모년에 최정석이 작성한 사성공 최순성의 묘갈의 초안 모년에 최정석(崔鼎錫)이 사성공(司成公) 최순성(崔順成)의 평생 사적(事蹟)을 작성한 묘갈(墓碣)의 초안(草案)이다. 최순성의 자는 성지(成之)로, 고궁공(固窮公) 최수손(崔秀孫)의 장자이다. 1507년(중종 2)의 정묘생진시(丁卯生進試)에 3형제가 나란히 합격하여 크게 화제가 되었다. 최순성은 그 뒤 1516년(중종 11)에 문과에도 급제하여 관이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에 이르렀다. 부인은 박씨(朴氏)이며 아들을 하나 낳았다. 아들 위(渭)는 단성현감(丹城縣監)을 지냈으며 박학다식하고 재간과 도량이 뛰어나 당대의 학자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과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두 선생과 우애를 나누었다. 명룡은 그 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사계는 명룡을 유익한 벗으로 대하면서 늦게 만난 것을 한탄했다. 심지어 성혼(成渾, 1535-1598)과 함께 말하기를, 사문(斯文)에 인재가 있다고 칭찬하였다. 명룡은 그 뒤 영조(英祖) 때 대사헌(大司憲)에 증직되었으며 전주(全州) 인봉(麟峯)과 부안(扶安) 옹정원(甕井院) 두 곳에 배향되었다. 명룡은 두 아들, 거(勮)와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난 경(勁)을 낳고, 경은 전두(全斗)를 낳았다. 사성공은 잠영세족(簪纓世族)으로 문행(文行)이 있었으며, 효우(孝友)가 뛰어나 아들과 손자들이 이를 본받아 도학과 문장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널리 전할 수 있었다. 사성공의 묘는 석동산(席洞山) 선영 아래에 있다. 예전에 무덤 앞에 세웠던 비(碑)가 세월이 지나면서 마모되어 있었는데 이제 다행히도 방손(傍孫)과 외가 쪽 후손 김씨 자제들과 합심하여 재물을 걷어서 모아 신묘년 봄에 이르러 비를 다시 세우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