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5년 송환기(宋煥箕) 연촌선생유사서(烟村先生遺事序) 고문서-시문류-서 교육/문화-문학/저술-서 崇禎後三乙丑孟冬 宋煥箕 崇禎後三乙丑孟冬 1805 宋煥箕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805년(순조 5)에 송환기가 ?연촌선생유사?의 간행을 축하하면서 작성한 서. 1805년(순조 5) 10월에 송환기(宋煥箕)가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 1384~1455)의 유문(遺文)을 모아놓은 ?연촌선생유사(烟村先生遺事)?의 간행을 축하하면서 작성한 서(序)다. 자신의 선조인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일찍이 '연촌선생유사발(烟村先生遺事跋)'을 지었지만 송환기는 그 유사를 본 적이 없어 항상 한스럽게 여겼는데, 어느 날 연촌선생의 후손 두 사람이 새 유사 한 권을 들고 찾아와 보여 주며 서문을 작성해 줄 것을 부탁했다. 살펴보니 곧 그 구본(舊本)을 중간(重刊)한 것이었다. 연촌이 남겼던 유고는 전란 통에 산일되어 권수(卷首)에 실려 있는 거라고는 소(䟽) 1편, 시 2편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연촌의 뛰어남을 충분히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전정지일련(全鼎之一臠)'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한 점의 고기에서 온 솥의 국맛을 안다는 말이다. 즉 훌륭한 문장이 다 전하지 않고 일부만 전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 전체를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책에는 또 제현(諸賢)의 시문이 함께 실려 있어서 연촌이 그 높은 덕망으로 세상의 추앙을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공원(貢院)에서 창화(唱和)한 시문들과 조정에서 물러나 귀향하면서 받은 시들과, 영암의 존양루(存養樓)에 걸려 있는 제영(題詠)은 연촌의 번성한 문학 세계를 보여준다. 권말에 부록으로 실려 있는 제발(題跋)은 또한 매우 진귀한 작품이다. 택당(澤堂) 이식(李植)은 연촌을 일컬어 순수한 덕행, 고상한 절개, 바른 학문이 있다고 칭송하였다. 우암도 연촌의 문자가 주서(朱書)의 어구에서 나온 것으로 정학(正學)의 일단(一端)이라고 하였다. 한편 서문의 저자인 송환기는 1766년(영조 42) 진사시에 합격하고 1772년 생원시에 합격했다. 그 뒤 관에 들어가 사도시주부(司䆃寺主簿), 사헌부 지평, 시헌부 장령, 군자감정을 거쳐 진산군수가 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1807년(순조 7) 형조참의와 예조참판을 지냈고, 1808년에 공조판서, 1811년에 의정부 우찬성을 지냈다. 『성담집(性潭集)』이라는 저서가 있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