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0년 처암(處菴) 최계성(崔繼成) 묘갈명(墓碣銘) 고문서-시문류-묘문 개인-전기-묘문 崇禎紀元后三庚辰 中學敎授南綺老撰 崇禎紀元后三庚辰 南綺老 崔繼成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820년(순조 20)에 남기노가 작성한 처암선생 최계성의 묘갈명 병서의 초안. 1820년(순조 20)에 남기노(南綺老)가 처암(處菴) 최계성(崔繼成)의 평생 사적(事蹟)을 작성한 묘갈명(墓碣銘) 병서(幷序)의 초안(草案)이다. 최계성의 자는 소선(紹先)이며, 처암은 그의 호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고궁당(固窮堂) 최수손(崔秀孫)의 넷째 아들이다. 조는 최생명(崔生明), 증조는 최광지(崔匡之)이며, 고려시중 문성공 최아(崔阿)의 후손이다. 어머니는 최씨(崔氏)로 사정(司正) 최효로(崔孝老)의 딸이다. 처암은 어려서부터 재능이 남보다 제법 뛰어나 고궁당이 일찍이 아이를 안고 정원을 거닐다가 하늘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누가 네 구석에 어떤 기둥을 두었길래 하늘이 이처럼 광활한가. 어린 아들이 대답했다. 하늘이 땅을 덮고 땅이 하늘을 실었으니 그 가운데가 자연히 광활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고궁당은 아들을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는 장성하여 부모에게 지극 정성으로 효도하고 부모의 질병은 하늘이 가져가라고 빌기도 하였다. 상(喪)을 당하자 예를 다하여 치뤘으며, 형과 누이를 어버이 섬기듯 똑같이 섬겼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명종(明宗) 때 정려(旌閭)를 받았는데 그 사실이 삼강록(三綱錄)에 실려있다. 정묘년에 사마시(司馬試)에 다시 응시하지 않고 부령(扶寧)의 옹정(甕井)에 거처를 마련하여 처암(處菴)이라고 부르며 당대의 유명한 유림들과 교류하며 지냈다. 부인은 김씨(金氏)인데 소생이 없고 후처 최씨(崔氏)에게서 하(河), 온(溫), 활(活), 말(沫) 등 네 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들 중 하와 온은 요절하여 자식이 없다. 활은 부령김씨(扶寧金氏)를 취하여 아들 시립(時立), 산립(山立), 선립(善立) 등 3명을 두었고, 말은 여산송씨(礪山宋氏)를 취하여 딸 1명을 두었다. 공의 묘는 석동(席洞)의 선영 아래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