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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정해최(鄭海㝡) 등 등장(等狀) 초(草)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鄭海㝡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67년(고종 4) 3월에 전라도 진사 정해최 등이 국왕께 장수현의 고 학생 이규현의 깊은 학문과 그의 아들 낙승의 뛰어난 효행에 대해 포상해 줄 것을 청원한 등장의 초본 1867년(고종 4) 3월에 전라도 진사 정해최(鄭海㝡) 등이 국왕께 장수현(長水縣)의 고(故) 학생 이규현(李奎鉉)의 깊은 학문과 그의 아들 낙승(洛承)의 뛰어난 효행에 대해 포상(褒賞)해 줄 것을 청원한 등장의 초본(草本)이다. 이규현의 생애와 학행에 대해 '이규현은 증이조참판(贈吏曺參判) 완원군 수(?)의 11세손이자 이재원(李在元)의 아들이다. 준수한 성품으로 인해 재상(宰相) 감으로 촉망받았으나 강호에 자취를 감추고서 늘 『근사록』, 『성리대전』, 효자와 충신의 성정을 밝힌 책들을 취하여 깊은 이치를 읽고 외우는 것으로 삶을 마칠 계획이었다. 또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근원을 공부하는 데에 힘쓰고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엄격히 하였으며, 그의 학문은 오로지 독실함에 힘써 노년에 덕행이 높았으나 스스로는 만족하지 못하였다. 그의 효성과 우애가 가정에서 드러났고 의로운 행실은 고을에서 칭송되었으며, 전라도 안의 덕망 있는 선비들이 경서의 어려운 곳을 묻고 사제(師弟)의 반열에 기록되었다. 관찰사들이 모두 이규현의 학행과 도량을 여러 차례 천거하였으나 세상에 쓰이지는 못하였지만 선비들에게 끼친 공로는 매우 크다'고 하였다. 이규현의 아들인 이낙승의 효행에 대해서는 '이낙승은 총명한 자질로 일찍부터 가정의 가르침을 받아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을 극진히 섬겨 이웃과 친족이 모두 그의 효성에 감탄하였다. 이규현의 병이 위독해지자 낙승이 의원을 찾고 약을 수소문하였으며, 하늘에 자신이 대신 죽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규현이 죽자 낙승은 슬픔이 지나쳐 음료를 입에 대지도 않았으며, 3년동안 늘 아침 저녁으로 곡하며 여묘살이를 하였다. 낙승의 나이 19세에 3년상을 마치자 벼슬길에 대한 뜻을 끊고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그는 일찍 아비를 잃은 것을 종신토록 애통해하며 어머니 송씨(宋氏)를 아비 섬기듯이 하여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고 어버이 뜻을 봉양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공부하며 집안 대대로 내려온 학문을 잘 지켰다. 1836년(헌종 2)에 어미의 병이 위독해지자 낙승이 직접 약을 달이고 똥을 맛보았으며, 빙어와 참새가 신령스러운 감응으로 구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모친상을 당하자 울부짖으며 슬퍼하다가 기절했다 깨곤 하였으며, 장례를 힘을 다해 마련하였다. 그리고 묘 옆에 여막을 짓고 끊이지 않고 울며 곡하여 몸이 수척해지고 얼굴이 검게 변하였으며, 묘 앞 무릎을 꿇은 곳에 풀이 말라 죽었다. 삼년 상을 치른 뒤에 자연에 뜻을 의탁하여 스스로 야은(埜隱)이라 호를 짓고 새로 집을 지어 시끄러운 세속을 잊어버렸다. 그가 지은 시를 통해 초야 유일(遺逸)의 의리를 충분히 알 수 있으며, 원근의 스승과 벗들이 서문을 써서 그를 찬송한 것이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많다'고 설명하였다. 끝으로 '규현과 낙승의 실제 행적이 지금까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파되고 있는데 아직까지 정표(㫌表)를 내리는 은전을 입지 못하였으니 이는 태평한 시대의 흠전(欠典)이다. 따라서 진사 정해최 등은 엄한 형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어가 앞에서 한목소리로 아뢰니, 죽은 이규현의 깊고 넓은 학문과 그의 아들 낙승의 탁월한 효성에 대해 예조에 명하고 빨리 사헌부에 증직(贈職)하게 하고 정려(旌閭) 해 줄 것을 청원한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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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년 곽화준(郭華準) 혼서(婚書) 고문서-서간통고류-혼서 郭華準 李生員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병자년 12월 7일에 신랑측 곽화준이 신부측 이생원댁에 보낸 혼서 병자년 12월 7일에 곽화준이 이생원댁에 보낸 혼례 관련 간찰이다. 사주단자는 상대방의 요청대로 서서 올리니 연길(涓吉)을 알려달라는 내용이다. 전통 혼례의 단계에서 연길(涓吉)은 납채에 해당되는데, 납채는 혼약이 이루어져 사주단자를 보내고 연길을 청하는 절차이다. 신부집에서 허혼편지나 전갈이 오면 신랑집에서는 신랑의 사주와 납채문을 써서 홍색 보자기에 싸 보내고, 신부집에서는 신랑 신부의 운세를 가늠해보고 혼례날짜를 택하여 신랑측에 통지하는데 이것을 연길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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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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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婚書)伏惟臘寒尊體動止候萬重仰溸區區之至第就事旣至問年之境私分之慶幸耳星單依敎仰呈 涓吉回示如何 餘謹宣 伏惟尊照 謹拜上狀丙子十二月初七日玄風郭華準 再拜(皮封)謹拜上狀李生員 下執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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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婚書)敬審臘冱尊體動止萬重慰仰規規第從侄家親事因導言者旣蒙頷可實爲允合而星牒仰呈耳餘謹宣伏惟尊察 上狀癸丑十二月三日月城崔思弼謹拜(皮封)謹拜 謝上狀 [着名]謹封李生員 執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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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 광주안씨(廣州安氏) 사성단자(四星單子) 고문서-서간통고류-혼서 廣州安氏 査頓 廣州安氏<着名>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임진년 2월 6일에 광주안씨가 보낸 사성단자 임진년 2월 6일에 광주안씨가 보낸 사성단자이다. 신랑의 사주는 신미년 9월 17일 유시(酉時)이다. 피봉에는 사성(四星)이라고만 적혀 있다. 신부측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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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星單子)辛未九月十七日酉時原壬辰二月初六日廣州安[着名](皮封)四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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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9년 김달오(金達五)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羅州牧使 金達五 牧使<押> 羅州牧使之印(7.1x7.1), 周俠字改印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1096_001 1849년 나주목에서 호주 김달오에게 동년의 호적대장에서 해당 부분을 등서하여 발급한 준호구 1849년(헌종 15) 나주목(羅州牧)에서 호주 김달오에게 동년(同年)의 호적대장을 토대로 작성하여 발급해 준 등본 성격의 준호구로 열서(列書) 형식으로 기재되어 있다. 호주 김성인이 작고하여 그의 아들 김달오가 호주가 되었다. 김달오의 거주지는 나주목(羅州牧) 하의도(荷衣島, 현 전남 신안군 하의면에 속한 섬) 어은촌(於恩村) 오가작통 순번 제2통 6호이다. 직역은 한량(閑良)이고 올해 나이는 41세 기사생(己巳生)이며,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김달오의 사조(四祖)는 아버지 한량 성인(聖仁), 할아버지 한량 필봉(弼逢), 증조(曾祖) 한량 상건(尙巾), 외조(外祖) 한량 박득대(朴得大)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김달오의 아내 황씨(黃氏)는 나이 36세 갑술생(甲戌生)이고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황씨의 사조는 아버지 한량 석용(碩用), 할아버지 한량 헌(憲), 증조(曾祖) 한량 무지(無知), 외조 한량 정미(鄭美)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이외 가족 구성원으로 동생 달표(達表)가 있으며, 나이 24세 정해생(丁亥生)이다. 문서에는 나주목사(羅州牧使)의 관인(官印)과 서압(署押) 및 주협자개인(周俠字改印)이 찍혀있으며, 1846년 호적과 대조 확인을 마쳤다는 '병오호구상준(丙午戶口相凖)'이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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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申生冠禮日元吉丁丑十二月十二日乙巳加冠午時汲水坐次衣章先置于壬丙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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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진년 영월신씨(寧越辛氏) 연길단자(涓吉單子) 고문서-서간통고류-혼서 寧越辛氏 査頓 寧越辛氏<着名>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경진년 10월 29일에 신부측인 영월신씨가 신랑측에 보낸 연길단자 경진년 10월 29일에 신부측인 영월신씨가 신랑측에 보낸 연길단자이다. 혼례 날짜는 11월 26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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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涓吉單子)奠雁十一月二十六日庚寅庚辰十月二十九日寧越辛[着名](皮封)涓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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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8년 김달오(金達五)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羅州牧使 金達五 牧使<押> 羅州牧使之印(7.1x7.1), 周俠字改印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1096_001 1858년 나주목에서 호주 김달오에게 동년의 호적대장에서 해당 부분을 등서하여 발급한 준호구 1858년(철종 9) 나주목(羅州牧)에서 호주 김달오에게 동년(同年)의 호적대장을 토대로 작성하여 발급해 준 등본 성격의 준호구로 열서(列書) 형식으로 기재되어 있다. 김달오의 거주지는 나주목(羅州牧) 하의도(荷衣島, 현 전남 신안군 하의면에 속한 섬) 어은촌(於恩村) 오가작통 순번 제7통 1호이다. 김달오의 인적사항 부분은 결락되었다. 김달오의 사조(四祖)는 아버지 한량 성인(聖仁), 할아버지 한량 필봉(弼逢), 증조(曾祖) 한량 상건(尙巾), 외조(外祖) 한량 박득대(朴得大)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김달오의 아내 황씨(黃氏)는 나이 45세 갑술생(甲戌生)이고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황씨의 사조는 아버지 한량 석용(碩用), 할아버지 한량 헌(憲), 증조(曾祖) 한량 하지(何智), 외조 한량 정미(鄭美)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이외 가족 구성원으로 동생 달표(達表)가 있으며, 나이 32세 정해생(丁亥生)이다. 문서에는 나주목사(羅州牧使)의 관인(官印)과 서압(署押) 및 주협자개인(周俠字改印)이 찍혀있으며, 1855년 호적과 대조 확인을 마쳤다는 '을묘호구상준(乙卯戶口相凖)'이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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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豊八年 月 日羅州牧考戊午成籍戶口帳內荷衣島於恩村住第七統第一戶▣…▣父閒良 聖仁祖閒良 弼奉曾祖閒良 尙巾外祖閒良朴得大本密陽妻黃姓年四十五甲戌本長水父閒良 碩用祖閒良 憲曾祖閒良 何智外祖閒良鄭 美本慶州率弟達表年三十二丁亥等乙卯戶口相凖 [周俠 字改印][羅州牧使之印]牧使[署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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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8년 나성채(羅聖采)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羅州牧使 羅聖采 牧使<押> □…□(7.0×7.0),周挾字改印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1120_001 1828년(순조28)에 나주목(羅州牧)에서 나성채(羅聖采, 48세)에게 발급한 준호구(準戶口). 1828년(순조28)에 나주목(羅州牧)에서 나주목 신촌면 내영리(현 전라남도 나주시 삼영동)에 사는 나성채에게 발급해준 준호구이다. 나성채는 48세이고, 신축년(1781)생이며, 본관은 나주이다. 아버지는 나언회(羅彦晦)이고, 조부는 나종유(羅宗有)이며, 증조부는 나윤명((羅允明)이다. 외조부는 정익성(鄭益成)이고,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아내는 김씨(金氏)로, 나이는 50세이고, 기해년(1779)생이며, 본관은 김해이다. 김씨의 아버지는 김운흥(金運興)이고, 조부는 김윤상(金胤商)이며, 증조부는 통덕랑(通德郎) 김시규(金始圭)이다. 외조부는 김이서(金履瑞)이고, 본관은 면성(綿城, 현 전라남도 무안)이다. 아들은 나시화(羅時化)으로 나이는 21세이고, 무진년(1808)생이다. 노비는 앙역(仰役)노비 2명으로 이름은 영덕(永德)과 채덕(采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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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4년 나성채(羅聖采)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羅州牧使 羅聖采 牧使<押> □…□(7.0×7.0),周挾字改印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1120_001 1834년(순조34)에 나주목(羅州牧)에서 나성채(羅聖采, 54세)에게 발급한 준호구(準戶口). 1834년(순조34)에 나주목(羅州牧)에서 나주목 신촌면 내영리(현 전라남도 나주시 삼영동)에 사는 나성채에게 발급해준 준호구이다. 나성채는 54세이고, 신축년(1781)생이며, 본관은 나주이다. 아버지는 나언회(羅彦晦)이고, 조부는 나종유(羅宗有)이며, 증조부는 나윤명(羅允命)이다. 외조부는 정익성(鄭益成)이고,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아내는 김씨(金氏)로, 나이는 56세이고, 기해년(1779)생이며, 본관은 김해이다. 김씨의 아버지는 김운흥(金運興)이고, 조부는 김윤상(金胤商)이며, 증조부는 통덕랑(通德郎) 김시규(金始圭)이다. 외조부는 김이서(金履瑞)이고, 본관은 면성(綿城, 현 전라남도 무안)이다. 아들은 나시화(羅時化)으로 나이는 27세이고, 무진년(1808)생이다. 노비는 앙역(仰役)노비 1명이고 이름은 영덕(永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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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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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坤未龍坤坐艮向運壬辰水忌土仙命甲子乾 主喪子庚子 孫甲子辛未己卯舊坤命乙丑 婦己酉 婦■■己未安葬二月十二日甲辰下棺辛時斬破正月二十八日午時先南開金忌六申穴深問地師開舊壙二月初十日辰時先南破壙亦同月初十日巳時先南正月二十八日卯時先南出柩 隨時 辛巳金發引 王德在龍坐 辛卯木停柩 甲庚方 甲辰火取土 壬申金勿伏方巳午未地忌命甲戌庚戌等生下棺時少避周堂空(皮封)葬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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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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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67년 김달오(金達伍)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羅州牧使 金達五 牧使<押> 羅州牧使之印(7.1x7.1), 周俠字改印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1096_001 1867년 나주목에서 호주 김달오에게 동년의 호적대장에서 해당 부분을 등서하여 발급한 준호구 1867년(고종 4) 나주목(羅州牧)에서 호주 김달오(金達伍)에게 동년(同年)의 호적대장을 토대로 작성하여 발급해 준 등본 성격의 준호구로 열서(列書) 형식으로 기재되어 있다. 김달오의 거주지는 나주목(羅州牧) 하의도(荷衣島, 현 전남 신안군 하의면에 속한 섬) 어은촌(於恩村) 오가작통 순번 제3통 7호이다. 직역은 한량(閑良)이고 올해 나이는 58세 경오생(庚午生)이며,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김달오의 사조(四祖)는 아버지 한량 성인(聖仁), 할아버지 한량 필봉(弼逢), 증조(曾祖) 한량 상건(尙巾), 외조(外祖) 한량 박득대(朴得大)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김달오의 아내 황씨(黃氏)는 나이 54세 갑술생(甲戌生)이고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황씨의 사조는 아버지 한량 석용(碩用), 할아버지 한량 헌(憲), 증조(曾祖) 한량 하지(何知), 외조 한량 정미(鄭美)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이외 가족 구성원으로 동생이 있는데 이름을 달표(達表)에서 의두(宜斗)로 바꿨으며, 나이는 41세 정해생(丁亥生)이다. 김달오(金達五)로 표기되어 있는 준호구에는 그의 생년이 모두 '경오생(庚午生)'이 아닌 '기사생(己巳生)'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이외 가족사항 등의 내용은 달오(達五)와 달오(達伍) 모두 동일하다. 문서에는 나주목사(羅州牧使)의 관인(官印)과 서압(署押) 및 주협자개인(周俠字改印)이 찍혀있으며, 1864년 호적과 대조 확인을 마쳤다는 '갑자호구상준(甲子戶口相凖)'이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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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治九年 月 日 羅州考庚午成籍戶口帳內荷衣島於㤙村住第二統第七戶閒良金達伍年六十一庚午本 金海父閒良 聖仁祖閒良 弼奉曾祖閒良 尙巾外祖閒良 朴得大 本密陽妻黃氏年五十七甲戌 本長水父閒良 碩用祖閒良 憲曾祖閒良 何知外祖閒良 鄭美 本慶州卛弟宜斗年四十四丁亥等丁卯戶口相凖 [周俠 字改印][羅州牧使之印]牧使[署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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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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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簡札)次面雖承 而○眞範未接 新好地耿悵 難以容喩 謹未審烟花節棣床啓處候衛重 ○允友侍彩佳相仰溸不任區區 弟合下蒲柳之質 不秋先衰 嘆且奈何 惟迷嬌遠蒙下庇 無事穩過 是可幸也 今於從氏晬辰 相應來臨做慶 而弟則適病未果 恨何如之 允君今才邀來爲計 ○尊座從此帶枉 如何如何 餘不備 候上戊子三月二十三日 査弟 鄭致憲 拜拜(皮封)李生員 棣座執事謹候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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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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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別經年 耿誦常切 花事垂暮 阻悵益新 謹未審辰下靜中體度 崇護萬晏允友穩省 而僉節均吉耶並切溸往不任 弟月前偶作花山之行 冒感還棲 因復添劇 委頓旬餘 尙未蘇起苦憐姑舍 尤覺衰澌之到此 雖歎何逾 從姪女今纔歸去 而其情狀實不忍欲見 伏想老兄亦同此心 幸須頻頻曉導以寬其懷如何 初欲帶去 而病不能遂 老境一握 亦有數而然耶 悵歎而已 餘在續候姑不備謹候禮己巳三月念日 弟金極永拜拜【피봉】玉山靜座執事坪湖謹候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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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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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년 신재곤(辛載坤)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辛載坤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1007_001 경술년 7월 26일에 모평에 사는 신재곤이 옥계에 살고 있는 부모상 중인 상대방들에게 자신의 안부와 함께 상대방의 편지 내용에 따라 돈 4관을 함께 보내니 받아주시라는 내용 등을 전한 답장 경술년 7월 26일에 모평(茅坪)에 사는 신재곤이 옥계(玉溪)에 살고 있는 부모상 중인 상대방들에게 자신의 안부와 함께 상대방의 편지 내용에 따라 돈 4관(貫)을 함께 보내니 받아주시라는 내용 등을 전한 답장이다. 가을비로 번뇌하고 그리움으로 괴로웠는데 뜻밖에 상대방이 보낸 편지를 받고 매우 감격스러웠다는 내용, 살아계신 어버이를 모시며 돌아가신 어버이의 제사를 지내고 있는 상대방 형제들과 식구들 모두 평온하다는 안부를 알게 되어 매우 위로되고 축하한다는 내용, 자신은 예전처럼 어지럽게 지내고, 경직(京直) 사촌도 편안히 보내고 있으나 근래 각리(覺里)의 상을 당해 어제서야 집으로 돌아왔다는 내용, 돈 4관을 상대방이 말한대로 편지와 함께 보내니 확인하고 받아주시라는 내용, 나머지 사연은 심부름꾼이 서서 재촉하므로 이만 줄인다는 내용 등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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