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수재기(念修齋記) 고문서-시문류-기 교육/문화-문학/저술-기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전북 전주 주덕산에 있는 염수재를 기리기 위하여 작성한 기문. 전북 전주 주덕산(周德山)에 있는 염수재(念修記)를 기리기 위하여 작성한 기문이다. 작성연대와 작성자는 적혀 있지 않다. 다만 염수재를 지은 시기를 '辛'자인 해로 밝히고 있는데, 유절재 소장문서 중에는 같은 염수재를 대상으로 지은 기문 '최전우(崔銓宇) 염수재기(念修齋記)'를 통해서 볼 때 그 해는 신미년, 즉 1931년으로 추정된다. 최전우(崔銓宇), 일명 최재영(崔再榮)이 류절재에 소장된 문서 중 '1931년 부안(扶安) 전주최씨(全州崔氏) 거호금수봉책(醵戶金收捧冊)'에서 연명인(聯名人)의 한 사람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문서도 염수재가 건설된 1931년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덕산(周德山)은 전주최씨(全州崔氏)의 세장지(世葬地)로, 월당(月塘) 최담(崔霮, 1346~1434)을 비롯하여 송애(松崖) 최광지(崔匡之) 등 현조들의 묘가 있는 지역이다. 이곳에는 전주최씨의 재실 주덕재(周德齋)가 있다. 그런데도 이와는 별개로 재실을 지어 염수재라는 편액을 단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기문의 저자는 영현(英顯)과 장광(莊光) 때에 현달했지만 돌연 관직을 버리고 낙향한 송애(松崖) 최광지(崔匡之)의 출처(出處)를 돌아보라고 하였다. 원문의 '영현(英顯)'의 영(英)은 세종(世宗)의 영릉(英陵)을, 현(顯)은 문종(文宗)의 현릉(顯陵)을 가리킨다. 최광지는 세종대에 집현전 제학까지 올라가 장래가 총망되었지만 기미를 미리 알아채고 용기를 내어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단종의 축출과 세조대의 비유교적인 정치를 미리 예감했던 것이다. 이것은 최광지의 동생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와, 최광지의 아들 옹암공(甕菴公) 최생명(崔生明)도 마찬가지였다. 부친 또는 형의 명이 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송애의 탁월한 선견(先見)에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 없다. 세속적인 명리를 추구하다가 단종대와 세조대에 패가망신한 사람들과 가문이 얼마나 많았던가? 따라서 전주최씨의 오늘이 있었던 것도 어떻게 보면 선대의 올바른 처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건데 우리 후손들은 이같은 선조의 덕행을 항상 마음에 새기면서 덕을 닦고 실천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럴 때 선조를 잊어버리고 도덕을 땅에 떨어뜨린 후손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마음으로 가정을 다스릴 때 나라 또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고 기문의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사실 '염수(念修)'라는 편액명은 ?시경? 〈문왕(文王)〉에서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아서야 되겠느냐. 그 덕을 닦을지어다.[毋念爾祖 聿修厥德]"에서 나왔다. 후손들이 반드시 선조의 덕을 항상 생각하며 닦으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