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1년 박팽년(朴彭年) 연촌선생퇴휴시송별시발(烟村先生退休時送別詩跋) 고문서-시문류-발 교육/문화-문학/저술-발 景泰二年十一月初八日 朴彭年 景泰二年十一月初八日 朴彭年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451년(문종 1) 11월에 박팽년이 연촌 최덕지를 위해 지은 송별 시문집에 부쳐 작성한 발문. 1451년(문종 1) 11월에 박팽년(朴彭年)이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를 위해 지은 송별 시문집에 부쳐 작성한 발문이다. 연촌은 1405년(태종 5)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관에 들어가 사관(史官), 교서관(校書館) 정자(正字), 김제군수(金堤郡守), 남원부사(南原府使) 등을 지냈다. 문종이 즉위한 후 예문관(藝文館) 직제학(直提學)에 기용되었으나,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당시 그의 나이 아직 70이 되지 않았을 때였다. 임금을 비롯하여 조정의 신료들이 그에게 머물러 있기를 바랐으나, 연촌은 전라도 영암에 존양(存養)이라고 이름 지어놓은 소당(小堂)이 있다면서 이제는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말하면서 귀향의 뜻을 분명히 하였다. 이에 조정의 많은 사대부들이 연촌을 추모하며 석별의 정을 나누는 시들을 작성하여 책을 만들었는데 이미 40여편이 넘었다. 범옹(泛翁) 신숙주(申叔舟)는 박팽년에게 시는 이미 지어서 책을 만들었으니 발문이나 적으라고 권유하였다. 높은 벼슬에 올라 축하시를 구하여 책을 만들어 후세에 전하려고 하여도 그 일이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지만, 갑자기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는 연촌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다투어 축하시를 바치는 것이야말로 연촌의 높은 덕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박팽년은 이 발문에서 지적하고 있다. 박팽년은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으로, 본관은 순천(順天)이며, 자는 인수(仁叟), 호는 취금헌(醉琴軒)이고, 회덕(懷德) 출신이다. 1432년(세종 14)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관에 들어갔다. 세종 때 신숙주, 최항(崔恒), 유성원(柳誠源),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등과 함께 집현전에서 경학을 연마하면서 명망을 얻었다.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한 뒤에 단종 복위운동을 추진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박팽년을 포함하여 사육신이 사면 복권된 것은 그로부터 2백여년이 훨씬 지난뒤 1691년(숙종 17)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