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4년 이단하(李端夏) 연촌최선생가록후발(烟村崔先生家錄後跋) 고문서-시문류-발 교육/문화-문학/저술-발 歲舍甲子孟秋上澣 李端夏 歲舍甲子孟秋上澣 1684 李端夏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684년(숙종 10)에 이단하가 연촌 최덕지의 가록에 부쳐 작성한 후발. 1684년(숙종 10)에 이단하(李端夏)가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의 가록(家錄)에 부쳐 작성한 후발(後跋)이다. 연촌의 가전시문록(家傳詩文錄)은 40여년 전에 간행되었는데 그때 그 서문을 지은 사람이 이단하의 부친 택당(澤堂) 이식(李植)이었다. 그 뒤 연촌의 8세손 최세영(崔世榮)이 아들 최방언(崔邦彦)과 함께 가전의 잘못된 점을 바로 잡아 중간본을 펴냈는데,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그 발문에서 연촌의 서발문 중에서 가장 상세한 것으로 이식의 것을 꼽으면서 이를 높이 평가하였다. 우암은 다만, 그 중에서 지기(知幾)라고 하였던 부분에 대하여는 후세 사람들이 잘못 오해하여 이식을 평가하면서 부족함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 우암은 어찌 주역(周易)에서 기미를 아는 것을 신(神)이라고 했겠는가 라고 반문하면서 여기에는 택당의 깊은 뜻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니 이에 대하여는 최세영이 택당의 아들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하였다. 바로 이 글이 이식의 아들 이단하에 의해서 쓰여지게 된 연유이다. 연촌은 1405년(태종 5)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관에 들어가 사관(史官), 교서관(校書館) 정자(正字), 김제군수(金堤郡守), 남원부사(南原府使) 등을 지냈다. 문종이 즉위한 후 예문관(藝文館) 직제학(直提學)에 기용되었으나,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당시 그의 나이 아직 70이 되지 않았을 때였다. 임금을 비롯하여 조정의 신료들이 그에게 머물러 있기를 바랐으나, 연촌은 전라도 영암에 존양(存養)이라고 이름 지어놓은 소당(小堂)이 있다면서 이제는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말하면서 귀향의 뜻을 분명히 하였다. 당대에 고관에까지 올라 장래가 촉망되었지만 갑자기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결과적으로는 곧바로 불어닥칠 문종의 죽음과 노산군의 양위(讓位)에 이르는 어려운 시기를 모면할 수 있었으니, 얼핏 보기에는 기미를 알아채고 화를 피했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명석하다고 하여 어찌 그같은 천수(天數)를 미리 헤아릴 수 있었겠는가? 이식은 연촌의 가전시문록(家傳詩文錄)에 쓴 후서(後叙)에서 ?주역(周易)?의 겸괘(謙卦) 단사(彖辭)에서 "천도는 차서 넘치면 허물어뜨리고 겸허하면 더해 주며, 지도는 차서 넘치면 변화시키고 겸허하면 계속 흘러가게 하며, 귀신은 차고 넘치면 재앙을 내리고 겸허하면 복을 주며, 인도는 차고 넘치면 싫어하고 겸허하면 좋아한다.[天道虧盈而益謙 地道變盈而流謙 鬼神害盈而福謙 人道惡盈而好謙]"라는 구절과, ?시경(詩經)? 대아(大雅) 한록(旱麓)에서 "화락하신 군자님은 신명이 보우한 바이로다.[豈弟君子 神所勞矣]"라고 한 구절을 인용하여, 이 모든 일이 연촌의 순수한 덕성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식은 본관이 덕수(德水)이며,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 남궁외사(南宮外史), 택구거사(澤癯居士) 등이다. 1610년(광해군 2)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관에 들어갔다. 1618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관직에서 물러났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이조좌랑에 기용되었으며, 뒤에 대사간(大司諫), 대사성(大司成), 예조참판, 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이식은 1642년에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청나라를 배척할 것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중국의 심양(瀋陽)으로 잡혀갔다가 그 뒤 탈출하여 귀국했다. 1643년 대사헌과 형조·이조·예조의 판서 등 조정의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한편 이식의 아들 이단하는 자가 계주(季周), 호는 외재(畏齋), 송간(松磵)이며, 1662년(현종 3) 증광문과에 급제하였다. 관에 들어가 숙종 때 서인으로 제2차 복상문제로 숙청당한 의례제신(議禮諸臣)의 처벌이 부당하다고 상소를 올렸다가 파직되었다. 그 뒤 경신대출척으로 풀려난 뒤 예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지냈다.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