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기관별 검색

검색 범위 지정 후 검색어를 넣지 않고 검색버튼을 클릭하면 분류 내 전체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전체 으로 검색된 결과 84193건입니다.

정렬갯수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皮封]菅村調中拜覆支離河魚非老人可堪況兼水氣穀脹聞來不勝驚慮而胸中不甚痞塞此序可信之言證且調中作書可見神完所望勝於所慮其間秋氣颯然化想愼祟當退聽以是仰慰世生長夏委頓刊事以紙之中撤待新楮始可完役事竊想書中有樂夫天命之意仰認平生所養談笑死生之氣固令人快活而有此志氣豈遽自隕穫惟善自調理遄膺妄五恐煩千萬不備謝狀戊戌七月卄七日世生奇宇萬拜手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36년 안태섭(安泰燮) 서간(書簡) 5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乙酉六月旬一 族弟安重燮 乙酉六月旬一 安重燮 전라북도 임실군 임실 관기 순흥안씨가 임실 관기 순흥안씨가 HIKS_Z018_01_A00067_001 1945년 6월 11일에 안중섭(安重燮)이 모인에게 보낸 서간. 1945년 6월 11일에 安重燮이 보낸 서간. 3년간 만나지 못했다면서 안부를 묻고 아들과 손자가 쉬지 않고 독서를 하니 곧 경사가 쌓일 것이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47년 정기(鄭琦)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丁亥蜡月旬九 弟 鄭琦 丁亥蜡月旬九 鄭琦 전라북도 임실군 임실 관기 순흥안씨가 임실 관기 순흥안씨가 1947년 12월 19일에 정기(鄭琦)가 모인에게 보낸 서간.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계약서

1947년 양병수(楊秉洙) 토지매매계약서(土地賣買契約書) 고문서-명문문기류-계약서 경제-매매/교역-계약서 西紀一九四七陰二月十三日 楊秉洙 安聖浩 西紀一九四七陰二月十三日 楊秉洙 安聖浩 전라남도 광양시 2개(적색, 원형) 임실 관기 순흥안씨가 임실 관기 순흥안씨가 HIKS_Z018_01_A00092_001 1947년 음력 2월 13일에 안성호(安聖浩)와 양병수(楊秉洙)가 체결한 토지매매계약서. 1947년 음력 2월 13일에 安聖浩가 楊秉洙와 체결한 토지매매계약서. 안성호는 양방수로부터 광양군 옥곡면 묵백리에 있는 논 893평을 3만5천에 매입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903년 정석주(鄭錫柱) 수표(手標) 고문서-증빙류-수표 경제-회계/금융-수표 癸卯二月三十日 標主幼學鄭錫柱 南原安貞泰 癸卯二月三十日 鄭錫柱 安貞泰 전라북도 남원시 [着名] 2개 임실 관기 순흥안씨가 임실 관기 순흥안씨가 박병호, 『韓國法制史攷 : 近世의 法과 社會』, 법문사, 1974. 최승희,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1989. 박병호 외, 『호남지방 고문서 기초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1999. HIKS_Z018_01_A00027_001 1903년(광무 7) 2월에 정석주(鄭錫柱)가 남원(南原)의 안정태(安貞泰)에게 투장한 무덤을 5월 30일까지 이장하겠다는 뜻으로 작성해 준 수표. 1903년(광무 7) 2월 30일에 정석주(鄭錫柱)가 남원(南原)의 안정태(安貞泰)에 작성해 준 수표이다. 정석주는 신축년(1901)에 광양(光陽) 골약면(骨若面) 용수동(龍水洞)에 있는 남원 사람 안정태의 친산(親山) 오른쪽에 투장(偸葬)을 하여 관으로부터 이를 파내라는 제사(題辭)를 받았다. 이에 정석주는 형편이 부득이 하여 5월 30일 안으로 묘를 파가겠으며 다시는 소나무를 베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伏聞有人以吾家置標樣暗埋於全州高峙地云豈有如許無據之事乎須即掘去後暗埋之人詳探以來爲可癸巳三月卄六日會洞朴參判宅全州北一面高峙洞所任處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12년 김가복(金加福)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嘉慶十七年辛未三月初六日 畓主 ▣▣宅奴 三月金 金加福 嘉慶十七年辛未三月初六日 奴三月金 金加福 전라북도 전주시 [左寸], [着名] 전주 인후 전주류씨가 전주 인후 전주류씨가 박병호 외, 『호남지방 고문서 기초연구』, 정신문화연구원, 1999. 박병호, 『韓國法制史攷 : 近世의 法과 社會』, 법문서, 1974. 이재수, 『조선중기 전답매매연구』, 집문당, 2003. 1812년(순조 12) 3월 6일에 노(奴) 삼월쇠(三月金)가 상전을 대신하여 김가복(金加福)에게 분토동(分土洞)에 있는 전답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 1812년(순조 12) 3월 6일에 노(奴) 삼월쇠(三月金)가 상전을 대신하여 김가복(金加福)에게 분토동(分土洞)에 있는 전답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이다. 매매대상은 결자답(結字畓) 4두락지, 부수(負數)로는 19복(卜) 3속(束)인 곳이며, 거래가격은 전문(錢文) 40냥이다. 상전댁은 새로운 논을 사기 위하여 이 논을 팔았다. 이때 삼월쇠는 패자(牌子)와 함께 이 전답의 본문기 1장을 김가복에게 넘겨주었다. 답주(畓主)인 노(奴) 삼월쇠는 좌촌(左寸)이라는 수결(手決)을 하였고, 증인으로는 ▣생종(▣生宗)이 참여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교령류

1888년 이섭규(李燮奎) 고신(告身) 4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光緖十四年九月 日 李燮奎 光緖十四年九月 日 高宗 李燮奎 서울특별시 종로구 1개(적색, 정방형) 임실 범오 홍주이씨가 전주 덕진 홍주이씨가 전북향토문화연구회편, 『全北地方의 古文書』1․ 2․ 3, 1993․1994․1995. 박병호 외, 『호남지방 고문서 기초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1999. 정구복, 『고문서와 양반사회』, 일조각』, 2002.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 HIKS_Z019_01_A00001_001 1888년(고종 25) 9월에 고종이 이섭규(李燮奎)를 통훈대부(通訓大夫) 행통례원인의(行通禮院引儀)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교지. 1888년(고종 25) 9월에 국왕이 이섭규(李燮奎)를 통훈대부통례원인의(通訓大夫行通禮院引儀)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교지이다. 통훈대부는 정3품 문신 품계이며, 인의는 종6품이어서 '품계가 높은 데 비해 관직이 낮음'을 의미하는 '행(行)'을 붙였다. 통례원은 국가의 각종 의례를 관장하던 관서이며 교지는 왕이 신하에게 관직, 관작, 시호, 자격, 토지 및 노비 등을 하사하면서 그 증표로 내려주는 문서이다. 이섭규의 본관은 홍주(洪州)이며 자는 서오(瑞五)이다. 1817년(순조 17)생으로 합격 당시 임실(任實)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의 양부는 이병균(李秉均)이며, 생부는 이진균(李珍均)이다. 이섭규는 1852년(철종 3)에 식년진사시에 합격한 뒤에 음관(蔭官)으로 관직에 들어가 사헌부 감찰, 돈녕부 판관, 공주 진관, 장악원 주부, 상서원 주부 등을 역임했다. 그의 고신 12점이 홍주이씨 가문에 전하고 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교령류

敎旨李燮奎爲通訓大夫行通禮院別儀者光緖十四年九月 日[印](背面)吏吏朴華黙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공문서

辭職願今般家事都合依う辭職致度に付御許可相成度及御願拜候也大正元年八月一日凡五里長李寬淳任實郡廳 御中【任實郡事務所】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소차계장류

1827년 전주유생(全州儒生) 임기백(任基白)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丁亥十一月 日 本州儒生幼學任基白 李容黙 柳錫祚 巡相閤下 丁亥十一月 日 任基白 全羅觀察使 전라북도 전주시 使[着押] 1개(흑색,장방형), 3개(정방형,적색) 전주 구석 인동장씨가 전주역사박물관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HIKS_Z021_01_A00001_001 1827년(순조 27) 11월에 전주(全州)의 유생 임기백(任基白) 등 16명이 순상(巡相)에게 올린 상서(上書). 1827년(순조 27) 11월에 전주(全州)의 유생 임기백(任基白) 등 16명이 순상(巡相) 즉, 전라관찰사에게 올린 상서이다. 이들은 전주에 살았던 고(故) 장유혁(張有爀)의 처 이씨(李氏)의 뛰어난 열행(烈行)을 조정에 알려 정려를 받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가 정해년으로 되어 있으나 관련문서로 미루어 이를 1827년으로 추정하였다. 상서의 내용에 따르면, 이씨는 18세에 장씨 가문에 시집을 와서 정성을 다하여 시부모를 모시고, 도리를 다하여 집안을 다스렸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과 친척들이 모두 현부인(賢夫人)이라고 일컬었다. 뒤에 불행하게도 남편이 이상한 병에 걸렸을 때에는 의대(衣帶)도 벗지 않고 온갖 정성을 다하여 밤낮으로 부축하며 병 구환을 하였으며, 직접 죽을 끓여 대접하고 침과 약을 드릴 때에는 반드시 먼저 맛을 보았다. 남편이 운명하려고 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마시게 하여 며칠을 연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병이 깊어 좋은 의원을 구할 길이 없어 마침내 남편이 운명하자 정성과 예절을 다하여 장례를 치렀다. 결국 마지막 남은 것은 유복자인 어린 딸뿐이었지만, 그마저도 3년이 못되어 요절하자 이씨는 살아갈 희망을 잃고는 곡기를 끊고 채 열흘이 못돼서 죽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이씨의 행실에 감동하고 부녀자들 또한 칭송해마지 않았다. 이에 임기백 등 전주의 유생들은 공의(公議)를 다시 수렴하여 이씨의 열행 실적을 모아 조정에 아뢰어 이씨에게 포양(褒揚)을 내려달라고 호소하였다. 이에 대하여 순상은 공의가 오래 이어져 얕지 않다면 당연히 정려의 포상이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는 제사를 내렸다. 전주의 유생들은 같은 내용의 상서를 같은 달 전주부윤(全州府尹)에게 올렸으며, 2년 뒤인 1829년에는 암행어사에게 올렸다. 그리고 1830년에는 전라도의 유생들이 함께 같은 내용의 상서를 순상에게 올렸다. 한편 1932년 이후로는 장유혁의 아버지 장문택(張文澤)의 처 구씨(具氏), 즉 위의 이씨의 입장에서는 시어머니가 되는 장유혁의 어머니에 대해서도 며느리와 함께 정려를 청하는 유생들의 상서가 전주와 감영, 그리고 암행어사에게 계속 올라가고 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첩관통보류

신사년 전주부(全州府) 남일면(南一面) 사수(社首) 품목(稟目) 고문서-첩관통보류-품목 정치/행정-보고-품목 辛巳三月 南一面 社首 官 辛巳三月 南一面社首 全州府 전라북도 전주시 行官[着押], 鄭[着名] 4개(적색, 정방형) 전주 매교 김해김씨가 전주역사박물관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HIKS_Z022_01_A00006_001 신사년 3월에 전주부(全州府) 남일면(南一面) 사수(社首)가 전주부윤(全州府尹)에게 올린 품목으로 김백수(金百秀)의 선산에 무단으로 치표하고 송추를 작벌한 김관서(金寬瑞)와 박구례(朴求禮)를 관의 명령대로 조치한 일을 보고한 내용. 신사년 3월에 전주부(全州府) 남일면(南一面) 사수(社首) 정씨(鄭氏)가 전주부윤(全州府尹)에게 올린 품목이다. 품목은 서원이나 향교에서 상관이나 해당 지방관에게 보고하는 문서의 일종이다. 사수 정씨는 북일면(北一面)에 사는 김백수(金百秀)의 선산에 김관서(金寬瑞)·박구례(朴求禮) 등이 치표한 일로 내리신 하체의 내용에 따라 소장자과 함께 치표처로 나아가서 살펴본 즉, 김관서의 아들은 숨어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박구례의 아들 용서(龍瑞)로 하여금 홀로 훼거해 가도록 하고, 치표처를 평평히 한 연후에 표기는 김관서댁에 돌려주게 하였다고 한다. 또 이들이 작벌한 송추 대송 5주, 중송 10주의 값은 박용서에게 추심하여 소장자에게 주게 하고, 다음의 사항을 잘 이행하도록 약속하는 수본을 각인들에게 받았으므로 이 문서들을 점련하여 보고한다고 하였다. 사수의 보고를 받은 전주부사는 표지를 작성하여 내려 보내니 소장자에게 전해줄 것이며, 앞으로 혹여나 이와 같은 일이 다시 벌어질 경우에 별도로 엄히 금단하라고 지시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소차계장류

1883년 류남식(柳南植) 등 등장(等狀)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癸未十一月 日 柳時春 柳星養 柳匡養 城主 癸未十一月 日 柳南植 全州府尹 전라북도 전주시 官[着押] 1개(적색, 정방형) 전주 인후 전주류씨가 전주 인후 전주류씨가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HIKS_Z023_01_A00012_001 1883년(고종 20) 11월에 전주(全州)의 화민(化民) 류남식(柳南植) 등이 전주부윤(全州府尹)에게 올린 소지. 1883년(고종 20) 11월에 전주(全州)에 사는 류남식(柳南植) 등 22명이 전주부윤(全州府尹)에게 올린 등장이다. 전주류씨 종중은 지난 6월에도 같은 내용의 등장을 전주부윤에게 올린 적이 있는데, 그때 전주부윤은 이 같은 사안을 왜 진작 올리지 않았느냐면서 자세히 조사하여 아뢰라고 아전에게 지시하는 제사를 내렸다. 그 뒤에도 이 문제에 대해 진척이 없자 전주류씨 종중에서 다시한번 관에 소를 제기한 것이다. 6월의 등장을 참고하여 저간의 사정을 살펴보면, 시조비(始祖妣) 국대부인(國大夫人)의 묘각(墓閣)을 중창하는데 필요한 공사비의 갹출 과정에서 일어난 종중의 분란을 야기한 류행수(柳行守)를 잡아다가 엄히 처벌해달라는 것이 주요 골자이다. 지난 을해년에 전주류씨 종중은 묘각을 재건하면서 각도 각읍 각파에 4, 50냥을 분배하여 거두었는데, 40냥을 분배받은 류춘도(柳春道)는 집안이 부유한데도 돈을 내지 않아서 부득이 그의 송아지 한 마리를 36냥에 팔아 사용하였으며, 류춘도도 나중에 종중에 와서 사과하고 다른 말이 없었다. 그런데 재작년에 류춘도의 6촌이 사수(社首)의 일을 맡아 수백 냥을 체납하는 바람에 종중에서 이를 나누어 징수하였다. 이때 류춘도는 일백 냥을 내기로 하였는데, 그의 동생 류행수가 형을 사주하여 소값을 핑계로 관에 무고를 하고는 여러 종중에 분배하도록 요구하였다. 종중에서는 이를 수치로 여겨 오히려 66냥을 가징(加徵)하였다. 지난 해 류춘도가 죽자, 류행수는 이번에는 결가(結價)를 구실로 자신의 형이 살아 있을 때 거둬간 소값을 또 다시 종중에서 징수한다고 관에 무고를 하여 종중 사람이 셋이나 감옥에 갇혔다. 이에 종중에서는 류행수를 잡아다가 엄히 다스려달라고 탄원을 하고 나선 것이다.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가 계미년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연명자의 한 사람인 류상렬(柳相烈)이 1882년(고종 19)의 식년진사시에 합격하였고, 류기창(柳基昌)은 1880년(고종 17)의 증광생원시에 합격한 점으로 미루어, 계미년을 1883년으로 추정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소차계장류

1898년 류기(柳記)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戊戌九月 日 柳記 柳浡 柳讙 觀察閤下 戊戌九月 日 柳記 全羅道觀察使 전라북도 전주시 使[着押] 4개(적색, 정방형) 전주 인후 전주류씨가 전주 인후 전주류씨가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HIKS_Z023_01_A00012_001 1898년(광무 2) 9월에 전주(全州)의 유생 유학(幼學) 류기(柳記) 등 10명이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 올린 상서. 1898년(광무 2) 9월에 전주의 유생 유학(幼學) 류기(柳記) 등 10명이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 올린 상서이다. 이들은 전주 건지산(乾止山)에 있는 시조비(始祖妣)의 묘답(墓畓)과 관련된 일로 기왕에 관찰사에게 소지를 올려, 조사를 하여 다시 보고하라는 제사[題辭]를 받고 전주부윤에게 이를 올렸다. 전주부윤은 종답(宗畓)이 분명하기는 하지만, 류씨 종중의 유사(有司)에게 잠시 이를 맡기고 처분을 기다리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시조비의 제삿날이 얼마 남지 않은 전주류씨 종중의 입장에서는 상부의 명백한 판결이 없으면 제사를 지낼 수 없다는 점을 밝히고, 관찰사께서 특별히 명백한 판결을 내리셔서 류씨 종중에서 제사를 지낼 수 있게 해달라고 탄원하였다. 이에 대하여 관찰사는 경계선 밖에 있는 전답에 대해서 일체 침해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미 고을에 지시를 내렸다는 내용의 제사를 내렸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같은 달 전주류씨 종중이 관에 올린 문서들이 이 문서를 포함하여 4건이 전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시조비의 묘답 1석 7두락이 건지산에 대한 관의 측량에서 건지산 경내(境內)의 것임에도 묘답으로 잘못 들어갔다는 결과가 나오면서 논란이 일어났다. 묘답의 소출로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야 하는 전주류씨 종중은 제삿날 전에 이 묘답에 대한 관의 분명한 판결을 바랐기 때문에 계속 관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가 무술년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연명자의 한 사람인 진사(進士) 류호양(柳浩養)이 1849년생으로, 1882년(고종 19)의 증광진사시에 합격한 점으로 미루어, 무술년을 1898년으로 추정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乾止山墓所完文光武六年四月 日[印]完文爲永久遵行事故三韓國大夫人崔氏墓所在於府東面表石里而祭享事體與他逈別每年享祀時宰牛一款依前例勿爲禁斷事永爲施行宜當者壬寅三月日官[印][印][印][印][印][印][印][印][印]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소차계장류

1903년 유연(柳淵)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癸卯五月日 柳淵 全州郡守 癸卯五月日 柳淵 全州郡守 전라북도 전주시 觀察使兼全州郡守[着押] 4개(적색, 정방형),1개(흑색, 방형) 진도 동외 밀양박씨가 전주역사박물관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HIKS_Z024_01_A00001_001 1903년(광무 7) 5월에 전라도 유생 유연(柳淵) 등이 연명하여 관찰사겸전주군수(觀察使兼全州郡守)에게 올린 소지로 진도군(珍島郡)에 사는 사인(士人) 박창준(朴昌俊)의 포양을 건의한 내용. 1903년(광무 7) 5월에 전라도 유생 유연(柳淵) 등 13인이 연명하여 관찰사겸전주군수(觀察使兼全州郡守)에게 올린 소지이다. 유연 등은 전라남도 진도군(珍島郡)에 사는 사인(士人) 박창준(朴昌俊)의 효행과 그의 어머니 진주하씨(晉州河氏) 열행에 대해 포양의 은전이 내려주기를 청원하였다. 진주하씨는 혼인한 뒤에 시부모를 예로서 모시고 남편을 공경하였다. 남편이 나병(癩病)에 걸려 3년 동안 몸져누워 자신의 귀 한쪽을 떼어 조리하여 남편에 먹여 소생시켰다. 그녀의 아들 박창준도 자식된 도리를 잘 지켜 없는 살림에도 부모에게 효도하였고, 아침저녁으로 정성스럽게 보살폈다. 이와 같은 행실은 인근 고을을 감복시키게 되었고, 이에 유연 등은 한 가문에 효열이 갖추어져 있으니 이를 널리 알릴 수 있도록 포양의 은전이 내려주기를 탄원하였다. 이에 대해 초5일에 관찰사겸전주군수는 "어미의 열행과 자식의 효가 예전에도 드물었다. 포양의 법도는 마땅히 보고할 일이다."라는 처분을 내렸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첩관통보류

1903년 진도군(珍島郡) 동장(洞長) 박모(朴某) 등 첩정(牒呈) 고문서-첩관통보류-첩정 정치/행정-보고-첩정 癸卯四月日 洞長 朴某 行郡守 癸卯四月日 朴某 珍島郡守 전라남도 진도군 官[着押], [着名] 3개 4개(적색, 정방형) 진도 동외 밀양박씨가 전주역사박물관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HIKS_Z024_01_A00001_001 1903년(광무 7) 4월에 진도군(珍島郡) 동장(洞長) 등 3인이 진도군수(珍島郡守)에게 올린 첩정으로 사인(士人) 박창준(朴昌俊)과 그의 어머니 진주하씨의 효열을 건의하는 내용. 1903년(광무 7) 4월에 진도군(珍島郡) 부동외리(府洞外里)의 삼집강(三執綱), 즉 동장(洞長), 공원(公員), 호수(戶首)가 진도군수(珍島郡守)에 올린 첩정이다. 첩정은 하급관아에서 상급관아에 올리는 말한다. 동장 등은 부동외리에 사는 사인(士人) 박창준(朴昌俊)과 그의 어머니 진주하씨의 효열을 건의하는 내용이다. 진주하씨의 남편은 병을 앓은 지 3년이나 되었는데 그동안에 백약이 효과가 없었다. 그런데 진주하씨는 인육이 효과를 있다는 말을 들고서 자신의 살을 도려내어 남편에게 먹여 병을 완치시켰다. 그의 아들 박창준도 효행을 다하니, 온 마을에서 그들의 효열을 칭송하였다. 이를 함묵할 수 없었던 동장 등은 이들을 포양해 줄 것을 탄원하였다. 이에 대해 진도군수는 "한 가문의 효열이 진실로 가상하다. 더욱 독면(篤勉)하면 만약 泯黙하는 이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라는 처분을 내렸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계약서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乙巳九月十四日票右票段矣親山入葬骨若龍沼洞後麓南原安禧鎭先山禁養而今此後民輩狀之地理在當掘故限來月初四日移掘之意如是成票若過右日雖卞官杖囚督掘更不容喙矣以此憑考事票主黃敬模[着名]刑房鄭晉生[着名]

상세정보
84193건입니다.
/4210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