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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4년 김익성(金益聖) 증조(曾祖) 김경(金鏡) 추증교지(追贈敎旨) 고문서-교령류-추증교지 정치/행정-임면-고신 乾隆三十九年月日 學生 金鏡 乾隆三十九年月日 英祖 金鏡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 1개(적색, 정방형) 영암 모정 광산김씨 양간공파 영암 모정 광산김씨 양간공파 HIKS_Z017_01_A00004_001 1774년(영조 50)에 영조(英祖)가 학생(學生) 김경(金鏡)을 통훈대부(通訓大夫)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추증(追贈)하는 고신(告身). 1774년에 英祖가 學生 金鏡을 通訓大夫 掌樂院 正으로 추증하는 문서. *좌방서: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金益聖曾祖考依法典追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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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8년 김희민(金喜敏) 준호구(准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嘉慶三年戊午正月日 行郡守 幼學 金喜敏 嘉慶三年戊午正月日 靈巖郡守 金喜敏 전라남도 영암군 行郡守[着押] 周挾無改印 영암 모정 광산김씨 양간공파 영암 모정 광산김씨 양간공파 HIKS_Z017_01_A00022_001 1798년(정조 22)에 영암군(靈巖郡)에서 유학(幼學) 김희민(金喜敏, 40세)에게 발급한 준호구. 1798년에 靈巖郡에서 幼學 金喜敏(1759~?)에게 발급한 准戶口. *주소: 靈巖郡 西終面 茅亭 第?統 第二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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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南原山民安貞晦右謹言情由段▣▣親山在治下骨若面龍沼洞後麓是乎所去己卯年間價文壹佰兩買得▣該面居鄭錫奎處而入山是如且邑人金成龍之墓在鄭塚傍而起擾故給五拾兩成文是遣定山直守護矣十餘年前同錫奎身故後其弟善有又偸賣於邑屬禹鍾植是去乙民累年呈邑呈營以至八九次而掘移是乎所再昨秋枝葉▣▣矣同善有暗地奪去故其時呈狀而民再昨年十月間奄見長子之▣▣呈卞是如自後善有稱以渠之禁養而又放賣大松十餘株則瞯人之家禍而敢生攘奪之心者無乃遐土之惡習耶此蔑法之人置而不問則他官山民▣▣▣(守)護先隴乎緣由帖聯全狀仰瀆于城主孝理之下爲去乎 參商敎是後特下 處分同善有捉致法庭以爲懲勵之地千萬泣祝行下向敎是事城主 處分戊戌閏三月 日光陽官[着押][題辭]査實懲處次鄭善有率待十二日 狀民自知理屈故肆然逃避隻隱可痛卽刻捉待事十四日 面主人圖其形便査其事實以爲馳報向事十四日 該執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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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緖十二年丙戌十月日 前明文右明文事鄙之柴場與南原安生員宅山所聯界而捧價伍兩是遣北邊廣十把長二十把地許給爲去乎日後若有他說以此文記憑考事柴場主鄭和之[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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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皮封]玉谷 侍案回敬新村謝書遠外相分瞻仰之懷何時可已春寒甚乖風雪中伻人臨門惠書珍重雖喜金玉之得來人之叫寒亦不安也伏審新元體節百福學履有溫朋友相望此焉而已朞服弟重庭氣疾自去年秋冬以來常在失寧情私蕉悶已不容喩而餘外冗擾亦不細細奈何奈何惠饋山海之味感謝珍珍千萬留俟不備謝儀戊辰元月二十一日朞服弟奇宇藩 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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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기우번(奇宇藩)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辛未八月十六日 奇宇萬 管村 辛未八月十六日 奇宇萬 管村 전라북도 임실군 임실 관기 순흥안씨가 임실 관기 순흥안씨가 박병호, 『韓國法制史攷 : 近世의 法과 社會』, 법문사, 1974. 최승희,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1989. 박병호 외, 『호남지방 고문서 기초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1999. 1871년(고종 8) 기우번(奇宇藩)이 관촌(管村)에 사는 순흥안씨(順興安氏) 모인에게 보낸 서간(書簡) 1871년(고종 8) 8월 16일에 기우번(奇宇藩)이 관촌(管村)에 사는 순흥안씨(順興安氏) 집안의 누군가에게 보낸 서간(書簡)이다. 장마는 가고 가을 기운이 점점 높아지는 때에 만나 난의(爛議)를 하면 덤불이 걷힐 것 같더니 뜻밖에 상대방의 동생이 방문하니 반갑고 복직(復職)되었다니 위로된다. 얼굴을 못 보게 되는 것은 쓸쓸하나 상대방이 여전히 편안하니 자신들은 멀리서 서로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자신은 조부의 기력이 여름이 지나도록 편치 않다가 가을 들어와 다시 평상시처럼 되어 다행이라고 하였다. 지난번 가져간 책자가 아직 상대방에게 있으니 자신의 집에 있는 거나 다름없지만 원방 사람들이 구해 보려고 하기에 하는 말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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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년 임실군수(任實郡守) 조성희(趙性憙) 서간(書簡) 2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丁亥臘月十七日 趙性憙 管邨 經案 丁亥臘月十七日 趙性憙 전라북도 임실군 임실 관기 순흥안씨가 임실 관기 순흥안씨가 HIKS_Z018_01_A00060_001 1887년(고종 24) 12월 17일에 임실군수 조성희(趙性憙)가 순흥안씨(順興安氏) 모인에게 보낸 서간. 1887년(고종 24) 12월 17일에 임실군수 趙性憙가 임실의 順興安氏 집안에 보낸 서간. 노사 기정진의 “氣가 理의 지위를 빼앗는다”는 말은 군자 소인의 進退消長을 걱정하는 말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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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안정회(安貞晦) 제문(祭文) 고문서-시문류-제문 종교/풍속-관혼상제-제문 庚午至月日 奇宇萬 庚午至月日 奇宇萬 임실 관기 순흥안씨가 임실 관기 순흥안씨가 1870년(고종 7) 11월에 기우만(奇宇萬)이 지어 안정회(安貞晦)의 영전에 올린 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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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8년 이갑증(李甲曾) 호구단자(戶口單子)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戊午 五月日 幼學李甲曾 南原府 戊午 五月日 李甲曾 南原府使 전라북도 남원시 風憲韓[着名] 남원 둔덕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박물관 全北大 博物館,『朝鮮時代 南原屯德坊의 全州李氏와 그들의 文書(Ⅰ)』, 1990. 全北大 博物館,『박물관도록 –고문서-』, 1999. 문현주, 「조선시대 호구단자의 작성에 관한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석사학위논문, 2008. HIKS_Z013_01_A00001_001 1738년(영조 14)에 이갑증(李甲曾)이 작성하여 남원부(南原府)에 제출한 호구단자(戶口單子). 1738년(영조 14)에 남원부(南原府) 북면(北面) 둔덕방(屯德坊)에 거주하던 이갑증(李甲曾)이 작성하여 남원부에 제출한 호구단자(戶口單子)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35세였으며 그의 처 삭녕최씨(朔寧崔氏)는 38세였다. 그는 뒤에 이종환(李宗煥)이라는 이름으로 개명(改名)하였다. 데리고 살던 노비가 30여명 있었는데, 대부분이 도망노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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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오채선(吳采善) 고신(告身) 2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光緖元年九月 日 吳采善 光緖元年九月 日 高宗 吳采善 서울특별시 종로구 남원 둔덕 함양오씨가 전북대학교박물관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HIKS_Z014_01_A00001_001 1875년(고종 12) 9월에 고종이 오채선(吳采善)을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용양위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으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교지. 1875년(고종 12) 9월에 고종이 오채선(吳采善)을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용양위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으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교지이다. 이때 오채선은 나이 82세가 되어 가자(加資)의 특전을 받아 정3품 당상관의 무관직 품계인 절충장군에 올랐다. 오채선은 중앙군(中央軍)에 해당하는 오위(五衛)의 하나인 용양위의 종4품 무관직인 부호군직에 있었으므로 품계보다 낮은 관직에 있게 되었다. 그의 관직 앞에 행(行)자가 붙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오채선에 관해서는 정사년에 남원 수지방에서 그가 54세 때 작성한 호구단자가 전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당시 그의 신분은 유학(幼學)이었으며, 30명이 넘는 많은 노비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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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31년 류형업(柳瑩業) 서간(書簡) 05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辛未二月卄一日 柳瑩業 兪正鉉氏宅 光陽郡 津月面 眞亭里 辛未二月卄一日 柳瑩業 兪正鉉 구례 오미 문화류씨 운조루 구례 운조루유물전시관 1931년 2월 21일에 류형업(柳瑩業)이 兪正鉉에게 종숙 류종환(柳宗桓))의 딸을 중매하면서 보낸 간찰 1931년 2월 21일에 류형업이 兪正鉉에게 종숙 류종환(柳宗桓)의 딸을 중매하면서 보낸 간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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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해년 오생원노(吳生員奴) 태위(太爲)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癸亥六月 日 水旨居吳生員奴太爲 使道 癸亥六月 日 奴太爲 南原府使 전라북도 남원시 使[着押] 3개(적색, 정방형) 남원 둔덕 함양오씨가 전북대학교박물관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HIKS_Z014_01_A00012_001 계해년 6월에 남원(南原) 수지방(水旨坊)에 사는 오생원(吳生員)의 노(奴) 태위(太爲)가 상전을 대신하여 남원부사에게 올린 소지. 계해년 6월에 남원(南原) 수지방(水旨坊)에 사는 오생원(吳生員)의 노(奴) 태위(太爲)가 상전을 대신하여 남원부사에게 올린 소지이다. 오생원 일가가 두동(豆洞)에서 동면(東面)으로 이사를 와서는 5냥을 주고 시장(柴場)을 매입했으며, 해당 문기도 받아놓았다. 그런데 패악한 초군(樵軍)들이 주인이 없는 시장이라고 하면서 경계를 범했기 때문에 관에 소를 올려 입지(立旨)를 해달라는 내용이다. 남원부사는 이에 대해 입지를 해 줄 사유는 아니라면서 양자를 대변(對辨)하겠다는 제사를 내렸다. 그러나 임신년 7월에 노 태위가 올린 소지를 보면 그 뒤 입지를 받아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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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旨居吳生員奴太爲右謹陳所志事段矣身所居之地本以野地柴草極難故人皆有先定柴場是乎矣矣上典新生計所致未備柴場矣豆洞一家宅▣…年良中移寓於東面而同次知柴場有斥賣故矣上典給價五兩文而買賣成文是如乎頑悖樵軍輩稱以無主柴場或有侵奪犯界是乃置私難爭詰所買文記帖連仰訴爲去乎叅商敎是後憑考次立旨成給爲只爲行下向敎是事使道 處分癸亥六月 日使[着押][題辭]此非立旨之事如是當禁處潛訴者是▣…兩造人對卞▣事 初五日告李前知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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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년 오병숙(吳秉淑) 원정(原情)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心元面守巖里化民吳秉淑 城主 吳秉淑 전라북도 고창군 남원 둔덕 함양오씨가 전북대학교박물관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모년에 전라도 무장군 심원면 수암리에 사는 오병숙(吳秉淑)이 수령에게 올린 원정(原情). 전라도 무장군 심원면 수암리에 사는 오병숙(吳秉淑)이 수령에게 올린 원정(原情)이다. 문서에 작성연대가 적혀 있지 않은 데다 수령의 제사(題辭)도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원정의 초안(草案)으로 추정된다. 오병숙은 지난 기사년에 심원면 우습치 오른쪽 기슭에 조모의 무덤을 써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38년 동안이나 정성껏 관리해 왔다. 이곳은 오병숙의 아버지가 생전에 임용수(林用水)로부터 매입한 땅으로, 오병숙은 그 매매문권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수년 전부터 임성묵(林性黙)이라는 자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곳을 자기네 방조(傍祖)의 산소라고 주장하면서 읍에다 상소하고 관부에도 상소를 하였으니, 이것은 선조를 위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남의 산지를 빼앗으려는 욕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결국에는 수령이 명쾌하게 판결하여 임성묵은 산송에서 패소하였다. 그 뒤 이해 윤4월에 누군가가 임성묵의 방조의 산소 섬돌 아래와 오병숙의 조모 산소 용미(龍尾) 바로 위에 해당하는 곳에 투장(偸葬)을 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사흘째 되는 날에는 몇 사람이 몰려와 투총에 흙을 쌓아올렸다. 오병숙이 그들을 향해 임자 있는 산지에 무슨 짓이냐고 크게 꾸짖자, 그 중에 한 사람이 나서서 자신이 청해면(靑海面) 안산(安山)에 사는 이석규(李錫圭)라고 말하고, 이 산지를 임성묵의 아들 임판돌에게서 매입하였다고 대답했다. 오병숙이 전후 사정을 자세히 얘기하자 이석규는 감히 산일을 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오병숙은 분한 마음을 참을 수 없어서 관에 소를 올렸으나, 관에서는 더위가 가시는 것을 기다렸다가 심리를 하겠다고 하여 잠자코 물러났다. 그 뒤 팔월 초10일에 오병숙이 안산에 가보았더니 한중오(韓仲吾)라는 자가 수십 명을 데리고 와서 오병숙에게 이르기를, 자신의 선산도 오씨네 선산에 같이 있다면서, 금년 윤4월에 이주사(李主事; 이석규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임)가 이곳에 투총을 했다고 하니, 오씨의 무덤을 먼저 파낸 뒤에 이씨의 무덤을 파낼 수 있다는 뜻으로 강제로 수기를 작성하게 하였다. 이것은 분명히 이석규가 재물을 간취하려고 한중오에게 사주를 하여 농간을 부린 것이라고 생각한 오병숙은 수령에게 소지를 올려, 이석규의 투총을 즉각 파내게 하는 한편, 임판돌이 주인 몰래 산지를 매매한 죄와, 한중오가 강제를 수기를 작성해 받게 한 죄를 다스려달라고 호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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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原居山民安禧鎭伏以春秋復九世之讎而必書以義之者勸人爲先之地則其間六七世無報讎之心而然耶勢不能故耳今若以三年不擧然而乃以原情中辭意置諸誣訴而訝其塚非當禁事果不寃云則此其非惶悚悶迫之敎乎若不犯內階而曰犯內階如或事不寃抑而曰至寃則是必賣死母之墳而干其好訟之科也爲人子者尙忍言商忍爲之擧哉哀切胸臆痛入骨髓言不知裁而或犯不諱之戒參商洞燭之地千萬泣祝行下向敎是事城主處分丙申▣月日[印][印][印][題辭]圖形摘奸後當從訟理決處向事二十一日禮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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