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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7년 김성인(金聖仁)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羅州牧使 金聖仁 牧使<押> 羅州牧使之印(7.1x7.1), 周俠字改印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1096_001 1837년 나주목에서 호주 김성인에게 동년의 호적대장에서 해당 내용을 등서하여 발급한 준호구 1837년(헌종 3) 나주목(羅州牧)에서 호주 김성인에게 동년(同年)의 호적대장을 토대로 작성하여 발급해 준 등본 성격의 준호구로 열서(列書) 형식으로 기재되어 있다. 김성인의 거주지는 나주목(羅州牧) 하의도(荷衣島, 현 전남 신안군 하의면에 속한 섬) 어은촌(於恩村) 오가작통 순번 제1통 2호이다. 직역은 한량(閑良)이고 올해 나이는 69세 기축생(己丑生)이며,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김성인의 사조(四祖)는 아버지 한량 필봉(弼逢), 할아버지 한량 상건(尙巾), 증조(曾祖) 한량 연백(延伯), 외조(外祖) 한량 김절순(金節順) 본관은 김해이다. 김성인의 아내 박씨는 나이 62세 병신생(丙申生)이고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박씨의 사조는 아버지 한량 득대(得大), 할아버지 한량 경한(敬漢), 증조(曾祖) 한량 계춘(桂春), 외조 한량 임춘봉(林春逢) 본관은 나주이다. 이외 가족 구성원으로 아들 달오(達五)가 있으며, 나이 29세 기사생(己巳生)이다. 문서에는 나주목사(羅州牧使)의 관인(官印)과 서압(署押) 및 주협개자인(周俠字改印)이 찍혀있으며, 1834년 호적과 대조 확인을 마쳤다는 '갑오호구상준(甲午戶口相凖)'이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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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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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簡札)庭杏岸柳 忽見春光 懷故人 尤不可忘而際玆滿幅情翰 俾開如結 旣慰且感 不欲釋手 矧謹審辰下體居晏重 尤何等欣祝之至 弟業欲往歸果已得由於舊伯丈而結之作伕 還之作納 皆係歉民生死所關也 若以此付之他手 而乃曰吾所不知 則亦非五載玉山爲官 近民之道 故尙此未發而安之 今晦來初 則可能勘歸矣老兄書中 若有棄我之意 而不肯與我言別 是亦情外也諒之如何 萬萬非書可盡 不備 上謝甲二旬二 病老漢 敢不名 拜拜(皮封)玉山仁叟兄 靜座 執事平湖 謹候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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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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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기해년 이헌구(李憲九) 혼서(婚書) 고문서-서간통고류-혼서 李憲九 査頓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기해년 3월 6일에 신부측인 이헌구가 신랑측에 보낸 혼서 기해년 3월 6일에 신부측인 이헌구(李憲九)가 신랑측에 보낸 혼서이다. 혼인이 약속되었으므로 연길을 보내니 의제(衣製)를 알려달라는 내용이다. 신부집에서 허혼편지나 전갈이 오면 신랑집에서는 신랑의 사주와 납채문을 써서 보내고, 신부집에서는 사주단자를 받으면, 신랑 신부의 운세를 가늠해보고 혼례날짜를 택하여 신랑측에 통지한다. 이것을 연길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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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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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伏承仲春尊體動止候萬重慰仰區區無任之至就親事旣至牢諾星來日去健是天也涓吉依敎錄呈衣製回示如何謹備伏惟尊照 謹拜謝上狀己亥三月初六日月城李憲九 再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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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년 이인호(李寅浩) 혼서(婚書) 고문서-서간통고류-혼서 李寅浩 郭生員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임신년 11월 21일에 신랑측인 이인호가 신부측 곽생원 댁에 보내는 혼서 임신년 11월 21일에 신랑측인 이인호가 신부측 곽생원 댁에 보내는 혼서이다. 혼인이 약속되었으니 집안의 큰 복이라며 인사를 하고, 신랑의 사주(四柱)를 별폭(別幅)에 적어 보낸다는 내용이다. 사주단자를 보내며 함께 보낸 혼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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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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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省式 春間慘制 尙忍何言 想惟慈愛隆深 何以堪抑 徒爲無益疾懷不若太上忘情 悲念之外 是用拱禱 意外握奉賢戚慰荷之餘 疇眼之事 依依然 使人興傷也 詢審比來伯氏丈患候 浹月彌留 驚慮萬萬 而久病久而又久 則自當有勿藥之效 以是仰祝 而大小諸眷 面面均安 實愜願聞 弟親節寧日恒少外 他瑣憂展眉無日 上焦下悶 何以仰喩 下托婚說 姑無意合處 齎志未列 殊歎殊歎 秋成後丕擬進行計耳 餘漏掛不備狀禮己未四月十一日 弟朴遠浩拜拜【피봉】〈前面〉玉山 服座 執事蓬谷謹慰狀 謹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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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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稽顙 阻拜勢也 哀耿則深酷寒稍解 不審靜體一例康旺 大小寶眷 亦得均祺否 區區伏溸 不任哀禱 罪少弟頑如木石 荐遭極變 而誠淺力單 末由伸雪 痛惋何喩 兩度緬禮纔已過行 俯仰寃號而已 惟幸慈節無損 而瑣瑣虞憂層疊不霽 憐悶憐悶 兩度惠䟽 轉轉承見 而無梯稽謝愴歎愴歎 何當有一會期耶 春和後 若賜一訪 則何感如之 預仰預仰 此友獲接於阻濶之餘 未能穩叙 遽此告歸 臨歧悵缺 還不如不奉時也 留拜不次䟽禮癸亥臘月初六日 罪少弟朴遠浩稽顙【피봉】〈前面〉玉溪 靜座 執事 入納蓬谷謹候䟽 稽顙謹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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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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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久矣夫牢閡至此 聞蟬而思 聽鴈而起 已仲秋矣 友朋之思鬱於中 而際玆間 皓雅袖兄書而來 獲承披讀 况若合席對淸儀 從審靜養體事 增護萬重 各節俱穩 仰溸且慰 實副頂禱弟慈候每多愆損 日事刀圭焦悶焦悶 課農勸桑 畚鍤之餘 憂慮亦種種間發 年果所得只有鬂無餘黑 奈何奈何 來初惠訪之敎 何如是有此快所聞耶 掃榻預爲等待耳 年事果有大有 而綿花累年逢歉難摘着綿矣餘都留不備謝禮丁卯八月念七 弟朴遠浩拜上【피봉】玉山 靜座 回納蓬谷候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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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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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曩者枉駕陋巷 誠是意外時適不在 不得奉迎瞻悵何及 邇來心常怏怏 每擬馳書仰射 塵雜相累 尙未暇焉 匪意卽承琅函 慰則極矣 愧悚還增 難以爲懷 未知春夏之交 田園之趣 必倍他辰 而况是春堂益福 賢允善學 人間幸福 孰過於此 欽欽頌頌仙莊相距稍邇 則屢有不問看竹之弊 而有意莫遂 徒增瞻慕而已 後日若有入闉之機 則勿吝歷訪 伏望伏望庸此仰誦 敬冀文祺五月三十日 錫裕 弟拜謝【피봉】〈前面〉光州郡芝山面日谷里▣〔盧〕軫永氏回啓〈後面〉緘 光州邑西町二三一 吳錫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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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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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積阻之餘 惠札來墜旣慰且喜 第審秋凉棣中動止 連護萬衛 何等仰慰勞祝 弟省事觕安私幸 而仲弟以風頭數月苦痛 右耳下項際大有成腫 今欲針破 擧家危惶景色 已無可言允玉率養之慶 獻賀無已 第今年旱災 到處通患 而所謂農形僅免歉凶是悶是悶 奉叙之期 未知在於何間 臨楮徒切悵耿 餘便忙 暫此不備謝禮壬子八月十一日 弟朴遠浩拜謝詐兒近得無恙 而尙未復常充健悶悶【피봉】〈前面〉玉溪李生員宅 回納蓬谷謝狀 謹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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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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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장택기(葬擇記) 9 고문서-치부기록류-택기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무진생 남성 망인의 장택기 무진생 남성 망인의 장택기이다. 신사생 아내는 생존해 있으며, 주상(主喪) 항목에는 단을 달리하여 아들 내외들, 손자와 손녀 내외들, 그 아래 증손까지 기록하였다. 장산(葬山)은 산맥이 갈라져 나온 방위와 좌향(坐向) 등을 기록하였고 좌산의 연운(年運)을 표기하였다. 계빈(啓殯)은 파빈(破殯)이라고도 하는데, 날짜와 시간, 시작하는 방위를 기재하고 자리를 피해야 할 이의 생년 간지 등을 쓰는 항목이다. 이 경우는 같은 달 2일 을해일 미시(未時)이고, 방위는 경방(庚方)부터 먼저 열라고 하였다. 안장(安葬)은 4월 10일리고, 하관(下棺)은 미시이다. 이 외에 주당(周堂)은 입관할 때 피해야 할 가족 구성원을 기록하는 항목인데 이 경우에는 피해야 할 구성원이 없다고 되어 있다. 적호(的呼)는 호충(呼冲)이라고도 하는 것으로 입관과 계빈할 때 일진과 맞지 않는 생년을 기록하는 항목이다. 문서 하단의 조명(造命)은 사과(四課)라고도 쓰는데, 매장 연월일시의 간지를 쓰는 것이다. 이처럼 장택기는 장례의 기본 요소인 장지(葬地)와 장일(葬日)의 선택과 이에 따른 각 절차의 방위, 시간 및 기피 사항 등을 기록한 문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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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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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光武四年庚子十二月日右稧中執典明文右執典事段矣自起田數年耕食是如可書稧錢十四兩三戔所用之勢將難辦故霜字田二斗落執典爲去乎若過節月之限此田放賣補用之意如是執典以此文記憑考事田主自筆張明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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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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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57년 정덕로(丁德老)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曺煥德 丁德老 曺煥德<着名>, 金賢澤<着名>, 金秀坤<着名>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57년 10월 24일에 유학 조환덕이 유학 정덕로에게 행정촌에 있는 밭을 팔면서 발급한 토지매매명문 1857년(철종 8) 10월 24일에 유학(幼學) 조환덕(曺煥德)이 유학 정덕로에게 행정촌에 있는 밭을 팔면서 발급한 토지매매명문이다. 조환덕은 자기가 매입하여 여러 해 동안 농사짓고 살던 밭을 형편상 어쩔 수 없이 정덕로에게 팔았다. 밭의 위치는 행정촌(杏亭村, 현 담양군 대전면 杏亭里) 후평(後坪)에 있으며, 자호(字號)는 국자(鞠字)이다. 밭의 면적은 2마지기이고 짐수[卜數]는 5짐 2뭇이다. 조덕환은 정덕로에게 밭값으로 5냥 5전을 받고, 이 명문 1장과 함께 밭을 넘겨주었다. 명문의 끝부분에는 뒷날 불미스러운 문제가 생기면 이 명문으로 관(官)에 고하여 바로잡으라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으며, 답주(畓主) 유학 조환덕, 이 명문을 작성한 필집(筆執) 유학 김현택(金賢澤), 이 매매의 증인[訂保]으로 참여한 유학 김수곤(金秀坤)이 각각 착명(着名) 하였다. 문서 말미에 맥수(麥數) 절반을 허여한다는 내용이 추기(追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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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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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咸豊七年丁巳十月二十四日幼斈丁德老前明文右明文段自己買得累年畊食是如可勢不得已伏在杏亭村後鞠字田二斗落只卜數五負二束庫乙價折錢文伍兩伍戔依數捧上爲遣右人前新文一丈玆〖幷〗以永永放賣爲去乎日後如有爻象之弊則持此文告 官卞呈事 此亦中麥數折半許與事田主幼斈曺煥德[着名]筆執幼斈金賢澤[着名]訂保幼斈金秀坤[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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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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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光緖十五年己丑三月初三日 前明文右明文事段矣自起買得田累年耕食是如可要用所致故不得已島內西面新里注乙路邊伏在金字丁七斗落負數卜束廤折價錢文拾參兩參戔交易依數捧上爲遣以新文一章右人前永爲放賣爲去乎日後若有相左之端則以此文記相考事田主鄭壽富[着名]訂人張仁行[着名]李柱錫[着名]筆 金應道[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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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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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光緖二十年甲午正月日前明文右明文事段 矣自起畓 數自耕爲多可 當此今春 私債許多 故不得島內西面伏在後江邊■斗五刀落折價錢文二十二兩五戔交易數依捧爲遣右人前此新文一張永永訪爲去日後若有相佑之端以此記考憑事買主新里內井洞張采守畓主秋文益[着名]證人金成詹[着名]筆執梁義賢[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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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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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35년 김우영(金雨英)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金雨英 盧軫永 雨英(타원형)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0850_001 1935년 3월 27일, 김우영이 노진영에게 사촌을 부탁하면서 보낸 서간. 1935년 3월 27일, 김우영(金雨英)이 노진영(盧軫永)에게 사촌을 부탁하면서 보낸 서간이다. 앞머리에는 자신의 겨를 없는 생활을 전하고, 어른을 모시고 사는 상대와 가족의 안부를 물었다. 주요내용은 이번에 편지를 들고 찾아가는 사람이 자신의 종씨(從氏)라고 소개하고, 천대전(千代田) 생명보험 상호회사(生命保險相互會社) 대리점(代理店)을 설치하고자 한다는 것, 당신의 군(郡)에 살고 있는데 당신이 알선해 주지 않는다면 도저히 이룰 수가 없으니 성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청한다는 부탁의 내용이다. 발신자 김우영(1886~1958)은 일제강점기 관료로 경상남도 동래군(東萊郡) 복천동(福泉洞) 출신이다. 1919년 교토[京都]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뒤, 경성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였다. 1919년 10월부터 1921년까지 항일운동과 관련해 변호인으로 활동하며 명성을 쌓던 중, 1920년 신여성 나혜석(羅蕙錫)과 재혼하였다. 1921년 양재하(梁在河)와 함께 조선인 최초로 부영사로 임명되면서 중국 안동(安東: 현 중국 랴오닝성 단둥)주재 일본영사관에서 고위관료로 근무하게 되었다. 이후 1921년 10월 15일 변호사 등록을 취소하고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일본 정부의 배려로 미국 및 유럽의 각지를 여행하고 돌아왔으나, 1930년 부인 나혜석이 최린(崔麟)과 불륜사이로 밝혀져 이혼을 하였다. 1932년부터 1940년까지 전라남도 도이사관(道理事官)으로 재직하면서 전라남도 농촌진흥위원회 위원‧농촌진흥과장‧수산과장을 겸임하였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일제로부터 1936년 훈6등 서보장(瑞寶章)과 1940년 훈5등 서보장을 받았다. 또한 중일전쟁에 협력한 공로로 1940년 훈6등 단광욱일장(單光旭日章)도 받았다. 이후 1940년부터 1943년까지 충청남도 참여관(參與官)으로 재직하면서 충청남도 농촌진흥위원회 위원‧충남어업조합연합회 이사장‧충청남도 방공(防共)위원회 위원 등을 겸임하였다. 재직 중 고등관 3등에서 고등관 2등으로, 정5위에서 종4위에 서위되었으며, 일본 정부로부터 훈4등 서보장을 받았다. 1943년 충청남도 참여관에서 퇴직함과 동시에 조선총독부 중추원참의(中樞院參議)에 임명되어 1944년까지 활동하였다. 또 1943년 임시특별지원병경성익찬회(臨時特別支援兵京城翼贊會) 지구별 위원회 회의에 동대문위원회 대표로 참석하여 전쟁에 나가는 학도병에 대한 행사와 지원을 위한 대책 등을 논의하였다. 1944년 5월에는 일본에 있는 조선인 징용 노동자들을 격려하고, 일본에 조선의 상황을 전하기 위해 국민총력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의 명사 파견원이 되어 훗카이도[北海道]를 시찰하였다. 광복 후 1949년 1월 부산 부용동에서 중앙반민조사위원회(中央反民調査委員會) 김용희(金容熙) 조사관에게 체포되어 반민피의자로 특위(特委)에 구금되었으나 병으로 1949년 2월 12일 보석되었으며, 1958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편지를 쓰던 당시에는 전라남도 도이사관(道理事官)으로 재직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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拜啓盛炎尊體萬安 伏溸伏溸 就白本月拾日은 生의 家親生辰也 而略設小酌 故玆敢仰邀ᄒᆞ오니 當日午後四時迄 內村鄙邱로 掃萬光臨之地 千萬仰望ᄒᆞ나이다 餘謹不備上六月九日 生崔相培拜上殿【피봉】〈前面〉日谷里盧軫永氏〈後面〉陽山里崔相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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便聞 雖種種面晤 不能以時積衷之懷 以筆難旣 恪詢栗烈春府吾丈經體候衛道不甚損攝 曁兄體侍衛康穩 令抱善課 盡宵拱祝 實非紙上空言 情弟塊坐窮廬只喉莫及之歎外何煩浼 第所託倘不置忘而心定否 口而言書而託 似涉沒廉 左右之顧 冒廉之託 舍兄伊誰 勿以苦念 致之以施不費之惠 是所仰冀 適有便 多少留謹不備禮辛臘旬六日 鶴弟 拜手回示企仰【피봉】日谷盧兄軫永 侍座入納巨津謹候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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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汝離膝之後 消息無憑 心甚茹㭗際 此得見手滋 慰沃此懷 書后日富 其間客况 幸而無恙乎 遠慮不尠 父無事度了 婦阿與孫婦 並無大何曾燮男妹亦善 健幸萬萬凡服藥必先正其心 而且無勞精力調理可也 一劑藥似爲夥多 而日數亦遠 恐有變味之慮 則三分之一分捐送似好似好爾 族兄元五氏 近得安候否 忙未修幅 以此言及焉 餘擾甚不能一一卽父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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