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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신묘년 문건(文健)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文健 安叟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신묘년 8월 8일에 금릉에 살고 있는 문건이 경주 옥계의 안수에게 경상감사가 옥산서원으로 직행한다고 들었는데 사실인지 묻고, 이런 때에 자신도 장산서원으로 가서 담화할 일이 있다는 내용 등을 전한 간찰 신묘년 8월 8일에 금릉(金陵)에 살고 있는 문건이 옥계(玉溪)의 안수(安叟, 字)에게 경상감사가 옥산서원(玉山書院)으로 직행한다고 들었는데 사실인지 묻고, 이런 때에 자신도 장산서원(章山書院)으로 가서 담화할 일이 있다는 내용 등을 전한 간찰이다. 정월 초에 상대방이 자신을 방문해 준 일은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은데 벌써 가을이 되었다는 내용, 어버이 모시고 사는 상대방과 가족들은 모두 잘 지내는지 매우 그립다는 내용, 자신의 숙병은 가을이 됐는데도 회복되지 않고 있고, 둘째 아이의 설사병도 한달이 넘도록 낫지 않고 있어 괴롭다는 내용, 상대방 동생은 이미 도착했을 것 같은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어 서운하다는 내용, 경상감사가 상대방의 옥산서원으로 곧바로 도착한다고 들었는데 과연 그런지 묻는 내용, 이런 때에 장산서원으로 가서 주변 사람들과 긴밀하게 담화(談話)할 일이 있다는 내용 등이 담겨 있으나 뒷부분은 잘려서 결락되어 있다. 금릉(金陵)은 경상북도 김천에 있었던 지명으로, 조선시대 김산군(金山郡)의 별호(別號)였다. 이곳은 조선 초기에 김산현 관내에 제2대 정종(定宗)의 태가 묻혀 있어 어모현과 합하여 김산군으로 승격되었다. 1914년 개령군·김산군·지례군을 김천군으로 통폐합하였다가 1931년에 김천읍으로 승격, 1949년에 김천읍이 시로 승격된 뒤에 김천군의 나머지 지역이 금릉군으로 개칭되어 15개 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옥산서원은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있는 서원으로, 사적 제154호이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1572년(선조 5) 경주부윤 이제민(李齊閔)이 지방 유림의 뜻에 따라 건립하여 1574년에 사액을 받았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로, 2019년 7월 6일에 다른 서원 8곳과 함께 한국의 14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뿐만 아니라 옥산서원은 2010년 한국의 역사마을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경주 양동마을에도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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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축년 이종익(李鍾翼) 혼서(婚書) 2 고문서-서간통고류-혼서 李鍾翼 李生員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기축년 10월 2일에 신랑측인 이종익이 신부측인 이생원 댁에 보낸 혼서 기축년 10월 2일에 신랑측인 이종익(李鍾翼)이 신부측인 이생원 댁에 보낸 혼서이다. 이미 연길(涓吉)을 받아서 매우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의제(衣製)를 적어 보낸다는 내용이다. 전통혼례는 서로 결혼 의사를 타진하는 의혼(議婚), 혼인 날짜를 정하는 납채(納采), 예물을 보내는 납폐(納幣), 혼례식을 올리는 친영(親迎)의 네 가지 의례로 이루어진다. 연길은 납채에 해당되는데, 납채는 혼약이 이루어져 신랑의 생년월일시를 적은 사주단자를 보내고 연길을 청하는 절차이다. 신부집에서 허혼편지나 전갈이 오면 신랑집에서는 신랑의 사주와 납채문을 써서 보내고, 신부집에서는 사주단자를 받으면, 신랑 신부의 운세를 가늠해보고 혼례날짜를 택하여 신랑측에 통지한다. 이것을 연길이라 한다. 의제(衣製)는 신랑의 의복 길이와 품의 치수를 신부측에 알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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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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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婚書)伏承華札伏惟小春尊體動止萬重仰賀區區之至就親事旣承 涓吉感荷良深衣製依 敎錄呈耳謹宣伏惟尊察 謹拜謝上狀己丑十月初二日月城李鍾翼 再拜(皮封)謹再拜謝上狀李生員 下執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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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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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34년 김성인(金聖仁)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羅州牧使 金聖仁 行牧使<押> 羅州牧使之印(7.1x7.1), 周俠字改印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1096_001 1834년 나주목에서 호주 김성인에게 동년의 호적대장에서 해당 내용을 등서하여 발급한 준호구 1834년(순조 34) 나주목(羅州牧)에서 호주 김성인에게 동년(同年)의 호적대장을 토대로 작성하여 발급해 준 등본 성격의 준호구로 열서(列書) 형식으로 기재되어 있다. 김성인의 거주지는 나주목(羅州牧) 하의도(荷衣島, 현 전남 신안군 하의면에 속한 섬) 어은촌(於恩村) 오가작통 순번 제1통 2호이다. 직역은 한량(閑良)이고 올해 나이는 66세 기축생(己丑生)이며,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김성인의 사조(四祖)는 아버지 한량 필봉(弼逢), 할아버지 한량 상건(尙巾), 증조(曾祖) 한량 연백(延伯), 외조(外祖) 한량 김절순(金節順) 본관은 김해이다. 김성인의 아내 박씨는 나이 59세 병신생(丙申生)이고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박씨의 사조는 아버지 한량 득대(得大), 할아버지 한량 경한(敬漢), 증조(曾祖) 한량 계춘(桂春), 외조 한량 임춘봉(林春逢) 본관은 나주이다. 이외 가족 구성원으로 아들 달오(達五)가 있으며, 나이 26세 기사생(己巳生)이다. 문서에는 나주목사(羅州牧使)의 관인(官印)과 서압(署押) 및 주협개자인(周俠字改印)이 찍혀있으며, 1831년 호적과 대조 확인을 마쳤다는 '신묘호구상준(辛卯戶口相凖)'이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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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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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령류

1906년 나도신(羅燾臣) 칙명(勅命) 고문서-교령류-칙명 高宗 羅燾臣 施命之寶(10.0x10.0)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1117_001 1906년(광무10) 2월에 조정에서 학생 나도신을 효행탁이를 이유로 9품 종사랑 중학교 교관에 증직한 칙명 1906년(고종43) 2월에 조정에서 학생(學生) 나도신(羅燾臣)을 효행탁이(孝行卓異)를 이유로 9품 종사랑(從仕郞) 중학교교관(中學校敎官)에 증직한 칙명(勅命)이다. 과거 급제 경력이 없고, 관직이 없던 이를 칭하는 용어가 학생(學生)이다. 인장으로는 어보인 '칙명지보(勅命之寶)'가 안보되어 있다. 칙명은 조선시대 4품이상의 관원을 국왕이 직접 임명하는 형식의 문서였던 관교라는 고신(告身) 문서가 왕지(王旨), 교지(敎旨)를 거쳐 대한제국기 1894년 대한제국기에 바뀌면서 황제의 문서를 가리키는 용어로 격상하여 변화한 명칭이다. 그러나 칙명은 품계가 높은 관원을 임명하는 문서였으며, 1906년 당시 9품은 판임관의 등급이므로 칙명이라는 임명장이 발급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죽은 자를 증직하는 문서도 살아있는 관리의 임명장과 동일한 문서로 작성되었는지의 여부는 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중학교는 1894년 6월 갑오개혁으로 처음 등장한 교육기관으로 17세~25세가 입학하는 학교로 소학교와 직접 연결되지는 않았다. 대한제국의 중학교는 심상과와 고등과를 포함하는 7년제 중등학교로 당시 대학이 설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대학보다 실업과 관료로 나가는 마지막의 교육기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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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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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경오년 광주향교(光州鄕校) 수행안(隨行案) 고문서-증빙류-제사 光州牧使 使<着押> □…□(7.5×7.5) 광주 광주향교 (재)한국학호남진흥원 경오년 4월 21일에 광주향교(光州鄕校)에서 작성한 수행안(隨行案) 경오년 4월 21일 광주향교(光州鄕校)의 춘추제향(春秋祭享)에 참여한 유생들의 명단을 기록한 수행안(隨行案)이다. 관련 상서에 따르면 이 수행안은 지난 신축년에 분실하여 개수한 것이라고 한다. 개수에 참여한 향교 도유사·별유사·장의·색장이 수행안 말미에 성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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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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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蘇台面靑龍里 化民 許䄩甲寅三月十五日夜 空然失火 家垈與祠宇 全部燒火之中 十一世祖諱 冠版圖佐郞公敎旨 十世祖諱 伯金紫光祿大夫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諡文正公敎旨 九世祖諱 絅寶文閣提學公敎旨 八世祖諱 錦奉翊大夫典理判書進賢館提學諡文正公敎旨 七世祖諱 愭正憲大夫吏曹判書公敎旨 六世祖諱 扉襄陽府使兼團鍊使公敎旨 五世祖諱 蘅典簿公敎旨 高祖諱 瑊訓鍊副正公敎旨 曾祖諱 礎判義禁府事公敎旨 祖諱 潛左贊成諡忠貞公敎旨 父諱 儆潭陽府使吏曹參判兩館提學公敎旨 戶籍四十二張 族譜二十卷三重修 盡爲燒火 而參考無疑 而日後譜牒改看之時 憑考之義 千萬幸甚城主 處分 萬曆甲申四月 日郡守[忠州郡守](題辭)汝矣靑龍戶籍四十二張 敎旨十一張族譜三重修二十卷 盡爲燒火故日後以此歇可惜 憑考向事五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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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소차계장류

1823년 박인식(朴仁植)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朴仁植 光州牧使 行使<着押> [光州牧使之印] 1顆(7.5×7.5) 광주 진양하씨 사직공파 표산문중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23년 5월 27일 박인식 등이 광주목에 올린 상서 1823년(순조 23) 5월 27일 박인식 등이 광주목에 올린 상서이다. 광주 거점면에 사는 하성채(河聖采)와 하달채(河達采) 형제, 그리고 그들 부인의 특별한 효행을 기리며 정려를 요청하는 내용이다. 광주목사는 6월 6일 내린 처결에 해당 사안을 감영에 보고하기 위해 이 문서를 접수해 두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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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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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49년 장지성(張至誠)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康津縣監 張至誠 康津縣監<着押> 帖子印, 周挾字改印, □…□(적색, 정방형, 7)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49년(헌종15) 강진현(康津縣)에서 장지성(張至誠)에게 발급한 준호구 1849년(헌종15) 강진현(康津縣)에서 고금도(古今島) 진리(鎭里)에 거주하는 장지성(張至誠)에게 발급한 준호구이다. 장지성은 현재 61세이고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이어서 장지성의 사조(四祖)가 기재되어 있는데, 아버지는 장대운(張大運), 조부는 절충장군 장무량(張武良), 증조부는 장홍(張弘), 외조부는 가선대부 추상련(秋尙連)으로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장지성은 홀아비이고, 동거인은 23세 딸이 있다. 이 문서의 마지막 행 '무신년(1848) 9월'은 실제 이 문서가 작성되어 관에 제출된 시기이고 등재된 식년은 이듬해이기 때문에 작성연대는 1849년이다. 형식으로 보면 열서(列書) 방식의 호구단자지만, 관에 제출되어 구호적과 대조 확인을 거친 뒤 강진현감의 서압과 관인 및 주협자개인(周挾字改印)을 찍어 제출자에게 되돌려준 것이기 때문에 준호구로 분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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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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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巨岾化民朴仁植等 謹齋沐上書于城主閤下 伏以褒旌孝烈 朝家之晠典 闡發幽隱 士林之公議也 今有卓異之孝 嘉尙之烈 而將歸泯滅之境 則其所欽慕慨惜 爲何如哉 今此本面居河聖采·河達采兄弟出天之孝 娣姒特異之烈 於古罕有 在今刱見鄕道之齊籲 營邑之稱善 不止一二 而 繡衣嘉尙之題 又若是班班 則今當 閤下奉揚之日 豈非士林闡發之秋乎 玆敢仰籲 伏願 垂察焉 盖聖采兄弟 自在齠齕 奉養偏母 極盡誠敬 定省溫凊之節 菽水甘旨之供 靡不用極 其兄弟友愛之道 異凡超倫 古所謂小連大連也 及其娶婦入門之後 娣姒事姑之道 極爲用誠 晝以賃織 夜以傭杵 繼其朝夕之供 若非誠孝之出天 豈能如是乎 粤在丁巳 其姑身遘重疾 幾乎難救 則聖采兄弟 號泣嘗糞 祝天代身 及其氣絶之時 聖采妻南氏 斷指灌血 幸得少甦 則且割股肉 亂搗和羹乃快痊者亦豈非孝感耶 又在戊辰 達采偶得癘疾 屢月委席 百藥無效 更無回春之望 其妻金氏 連斫左右指 出血灌口 又割左右股而食之 遂得快蘓矣 且於乙亥達采又得重疾 幾至命盡 其妻之斷指割股 又如前日 達采之明 遂得快甦 而金氏之眼 回以昏眊矣 盖論其誠 三次斷指 三次割股 可見至孝偉烈之出人 一門二孝 一門二烈 可知閏範家行之罕世 噫 難爲兄難爲弟 有是夫有是妻矣 其他修身齊家之道 亦其孝原中出來 則不待枚擧而默契矣 繡衣及 營邑前後文券 帖聯齊聲 更伏願 閤下 毋以世俗之溢美例施 特爲轉報 營門 俾得旌褒 以樹風化之地 千萬無任祈懇之至城主 處分癸未五月二十七日 化民 朴仁植 高貞鎭 朴海運 朴正鉉 高廷相 朴斗鉉 朴喆鉉 朴義植 朴甫鉉 朴信鉉 安東休 朴玉鉉 高碩鎭 朴海觀 高廷煥 朴來植 宋寅休 等行使[着押][光州牧使之印](題辭)轉報次到付向事初六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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稽顙言 遠浩罪迸深重 不自死滅 禍延先妣 攀號捅擗 五內分崩 叩地呌天 無所逮及 日月不居 奄經襄虞 酷罰罪深 無望生全 卽承俯垂慰問 其爲哀感 只切下懷 春日尙寒靜養起居 崇護萬重 渾節俱穩 哀慰溯區區之至 孤哀子遠浩 尙存視息 祇切哀隕 且家間憂虞 層鱗不霽 滾汨無暇 展宿無日 自憐自憐執事之科事 胡至舛甚 老白首殘年 幸參公都榜眼又屈 呑墨之餘 亦爲知舊間失望 恨何如之 旣承春夏間一枉之示 預切企望 餘謹奉䟽 荒迷不次 謹䟽上庚午二月二十日 孤哀子遠浩䟽上【피봉】〈前面〉玉溪李生員座前蓬谷謹謝䟽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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舊誼旣篤 新媾孔嘉 欣瀉叵測 而禮筵奉話 擾閣未穩 歸有餘悵耿結于中 情固如是耶 憑詢棣案起居連護湛穆 胤奇次第善健 尊少節色色均迪 溸仰區區 査弟歸視家累 平昔度了 庸幸何溷 第新人之閒靜容儀 允洽婦德 則宜室之慶 孰大於是耶 雀悅無比 而迷瞀素蔑敎方應對之節 一無可合 則幸望兄甚勿見憎 而善爲指導 俾知成人之道則自附之誼 豈不偉哉 以是爲恃 而就拱餪儀 豊侈眩眼 所謂答物乾沒巴鼻 自誦愧赧則深矣 兄以知仲之誼 或可恕諒 而勿貽哂唾耶 餘從此續候 怱擾不備狀禮丙寅三月十三日 査弟朴珵坤拜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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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簡札)流光奔邁 將失一禩矣 而意中直諒 無由際接 只誦杜草堂岸高瀼滑限西東之句 三復興吁 料襮獲蒙惠圅 擎手圭復 似不如合簪者幾希 靜審寒冱春府患候 彌延跨朔 何等貢憂而調護有道 復常趂效 而○侍中棣翕湛相 何等攢祝區區 第芳旨崔友之慘報 抑塞罔涯 崑岡玉石 無以喩其禍變也 冬夜方永 乘隙有鑽硏做工否 斯世斯事 將付廣陵散已矣 願毋使希音無傳 是爲有志者懇祝也老弟吟寒跧伏 無足爲況 而將賃一小屋 以爲鷦棲計 而所需者 罔非龜背之毛也 良用甕算之費思耳南茗多荷○惠腆 而長夜消遣 甚得好料 而無物仰酧 不覺騂汗餘萬非面曷罄 統希侍韻增彩 用副遐悰己酉至月二十五日曅 弟 拜謝(皮封)玉山 侍案 回納襟堂留弟謝書 [着名] 謹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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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년 이기연(李歧淵)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李歧淵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기사년 2월 21일에 이기연이 옥산의 사돈에게 지금 운영하고 있는 일에 대해 초령이 과천 이병제와 상의하여 운현에 먼저 여쭸더니 이때 해서는 안된다고 분부하였기 때문에 원일 형을 급히 되돌려보내야 하는데 여비를 마련할 수 없어 걱정스러우며, 자신도 함께 돌아가고 싶지만 돈이 없어서 다음 달 과거를 치른 뒤에야 돌아갈 방법이 생길 것이라는 내용 등을 전한 간찰 기사년 2월 21일에 이기연이 옥산(玉山)의 사돈에게 지금 운영하고 있는 일에 대해 초령(草令)이 과천 이병제(李秉梯)와 상의하여 운현(雲峴)에 먼저 여쭸더니 이때 해서는 안된다고 분부하였기 때문에 원일(圓一) 형을 급히 되돌려보내야 하는데 여비를 마련할 수 없어 걱정스러우며, 자신도 함께 돌아가고 싶지만 돈이 없어서 다음 달 과거를 치른 뒤에야 돌아갈 방법이 생길 것이라는 내용 등을 전한 간찰이다. 지난번에 자신이 보낸 안부편지를 받아 보셨으리라 생각하는데 소식이 없어 매우 그립다는 내용, 상대방과 각 댁의 가족들 모두 편안한지 안부를 묻는 내용, 나그네살이 중인 자신은 여전하고, 원일 형도 객지에서 잘 지내고 있다는 내용, 운영하고 있는 일을 처음에는 그때 가서 도모하려 한다고 말한 것은 초령이 근래 과천 이병제와 상의하여 운현에 먼저 여쭸더니 이때 해서는 안된다고 분부한 즉 원일 형을 급히 돌아가게 한 뒤에야 상대방의 행차가 먼 땅에서 허비하는 상황을 면할 수 있다. 이때문에 급히 행장을 꾸려 출발하려고 하지만 여비를 마련할 곳이 없어 매우 걱정스럽다는 내용, 초령이 앞뒤로 상의한 일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했는데 근래 도내(道內)에 소란스러운 사건과 옳지 않은 일이 있으니 이러한 때에 이와 같다면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니 우선 후일을 기다리더라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내용, 자신도 원일 형과 함께 출발하고 싶으나 돈을 마련할 곳이 없어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였으니 다음 달에 과거를 치른 뒤에야 돌아갈 방도가 있을 것이라는 내용, 초령에게 부탁한 일은 돌아갈 때 특별히 도모하여 갈 것이니 염려말라는 내용, 모든 사연은 원일 형이 직접 말씀 드릴 것이라는 내용 등을 담았다. 편지지 뒷면에 원일 형의 어쩔 수 없는 형세로 주인집에서 가마를 타고 먼 길을 나섰는데 가는 자도 고생일 뿐만 아니라 보내는 자의 맘도 좋지 못하다는 내용, 원일 형의 여비는 초령과 자신이 각각 2꿰미와 1꿰미 돈을 내어 보낸다는 내용, 자신은 근래 고통을 겪은 뒤의 남은 빌미로 현기증과 허리 통증을 앓고 있어 집밖을 출입하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 상대방 쪽에서 누가 과거시험을 치르는지 알려줄 것과 상대방의 막내 동생에게 보낼 편지를 함께 동봉해서 보내니 바로 전해 줄 것을 부탁하는 내용 등을 추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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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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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임○년 석룡(錫龍)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錫龍 鄭生員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임○년 12월 22일에 숙부상중인 석룡이 정 생원에게 자신이 지난달에 중풍에 걸렸다는 소식과 함께 봄에 당한 누이상으로 인한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이달에 막내 숙부상을 당한 비통한 심정 및 상대방이 보내준 3종의 음식에 대한 감사인사 등을 전한 답장 임○년 12월 22일에 숙부상중인 석룡이 정 생원(鄭生員)에게 자신이 지난달에 중풍에 걸렸다는 소식과 함께 봄에 당한 누이상으로 인한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이달에 막내 숙부상을 당한 비통한 심정 및 상대방이 보내준 3종의 음식에 대한 감사인사 등을 전한 답장이다. 거친 바람과 눈보라에 한 해가 저물어가니 오랫동안 소식이 끊긴 회포가 이때에 이르러 곱절이나 간절하다는 내용, 뜻밖에 상대방의 편지를 받고 겹겹이 쌓인 충정에 맞먹을 만하여 서로 간에 산천이 멀리 막혀 있음을 까맣게 잊었다는 내용, 보내준 편지를 통해 어버이 모시는 형제분들이 즐겁게 지낸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매우 위로되고 듣고 싶었던 소식에 부합한다는 내용, 1년 상중인 자신은 지난달인 11월 24일에 갑자기 중풍(中風)에 걸려 반신불수(半身不隨)가 되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말도 통하지 않았다가 지금은 조금 괜찮아졌지만 완전히 회복될 기약이 없으니 나이 장차 육순에 이 무슨 꼴이냐는 내용, 자신의 가문이 박복하여 봄에 누이의 상(喪)을 당하여 비통한 심정이 여전한데 이달 10일에 또 막내 숙부의 상을 당하였으니 누이를 곡한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이어서 숙부를 잃은 눈물을 흘리는 침통한 심정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느냐는 내용, 상대방이 보내준 3종의 음식은 병을 앓고 있는 자신의 입맛을 돋울만한데 자신은 사례할 물건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인정이겠느냐고 자조하는 내용,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여 더욱 많은 복을 받으시길 바라며, 자신은 병상에 누워서 대신 편지를 쓰게 하므로 간략히 쓰고 이만 줄인다는 내용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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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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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簡札)〈自封〉安叟○做案○敬呈正初委訪 迨今耿耿居然秋序 此時侍履勝相 諸節均如 區區溸溸 老契宿恙 逢秋未蘇 祗是無奈何而已 而且仲兒泄病 閱月彌留 自苦不須言令季遣白 想已抵得 而尙無聞 可恨 聞棠車直到○玉院云 果爾否此際欲爲○章院之行與○左右 緊有談話事辛卯八月八日 老契 文健 頓(皮封)玉溪○侍案○入納金陵候狀 謹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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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簡札)頃者拜穩 迨今欣慰 而昨○書未謝 今又承○惠書長弟 審日間侍餘候 連衛萬相 此何等仰賀 弟一味憒憒 而東閣體上不安 是外幸幸又此何有○惠送木頭菜兩件 遠及分味 仰認勤意 感謝戢戢 此是東閣之敎意也 來人亦依○敎 卽爲付分於形〖刑〗吏 使卽授題以送耳 何當○枉顧否 是企是企 餘適有擾捴事 漏?姑不備禮三月初九日 敦 弟 拜謝(皮封)玉山 侍案 回納襟堂留謹候謝上 [着名] 謹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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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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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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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光十四年 月日羅州牧考甲午成籍戶口帳內荷衣島於㤙住第一統第二戶閑良金聖仁年六十六己丑 本金海父閑良 弼奉祖閑良 尙巾曾祖閑良 延伯外祖閑良 金節順 本金海妻朴姓年五十九丙申 本密陽父閑良 得大祖閑良 敬漢曾祖閑良 桂春外祖閑良 林春逢 本羅州率子達五年二十六己巳等辛卯戶口相凖 [周俠 字改印][羅州牧使之印]行牧使[署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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勅命學生羅燾臣贈九品從仕郞中學校敎官者光武十年二月 日孝行卓異 贈職事奉勅[勅命之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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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나도일(羅燾溢)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羅州牧使 羅燾溢 牧使<押> □…□(7.0×7.0)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1120_001 1876년(고종13)에 나주목(羅州牧)에서 나도일(羅燾溢, 27세)에게 발급한 준호구(準戶口). 1876년(고종13)에 나주목(羅州牧)에서 나주목 신촌면 용두(전추)리(현 전라남도 나주시 안창동)에 사는 나도일에게 발급해준 준호구이다. 나도일(羅燾溢)은 30세이고, 정미년(1847)생이며, 본관은 나주이다. 아버지는 나후집(羅厚集)이고, 조부는 나시완(羅時完)이며, 증조부는 나성채(羅聖采)이다. 외조부는 이현빈(李顯彬)이고, 본관은 함풍(咸豊)이다. 아내는 정씨(鄭氏)로, 30세이고, 정미년(1847)생이며, 본관은 나주이다. 정씨의 아버지는 정인혁(鄭仁赫)이고, 조부는 정기표(鄭基杓)이며, 증조부는 정인운(鄭麟運)이다. 외조부는 양석포(梁錫圃)이고, 본관은 제주이다. 어머니는 이씨(李氏)로, 나이는 53세이고, 갑신년(1824)생이며, 본관은 함풍이다. 노비는 앙역(仰役)노비 1명이고 이름은 영덕(永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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