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김택(金澤) 등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武城書院儒會所 李斯文 全州鄕校(흑색,직방형, 7×5)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24년 8월에 무성서원유회소 진사 김택 등 7인이 이 사문에게 면암 최익현의 영정을 모실 건물의 도감동으로 임명하므로 협력하여 완공할 것을 청하는 통문 1924년 8월에 무성서원유회소(武城書院儒會所) 진사(進士) 김택(金澤) 등 7인(人)이 이 사문(李斯文)에게 면암 최익현(崔益鉉)의 영정(影幀)을 모실 건물의 도감동(都監蕫)으로 임명하므로 협력하여 완공할 것을 청하는 통문이다. 면암 최 선생의 충의(忠義)와 도덕을 우리 사림 모두가 흠모하고 본받으려 하였으며, 선생이 대마도에서 임종한 후 도내 사림의 공의(公議)에 따라 태산읍(泰山邑, 현 전북 정읍시 泰仁面)의 옛터에 사우(祠宇)를 건립하고 봄가을에 향사(享祀)를 베푼 지 10여 년이 지났는데, 몇 년 전에 총독부(總督府)에서 면암의 영정을 철거하고 향사를 금지하여 처량한 원우는 학교로 변하였으니 유학자들이 모두 개탄하였다고 했다. 그 뒤에 사람들이 영정을 환안(還安)하고 향사를 복구할 뜻을 당국에 여러 차례 연명하여 올려 다행히 총독부에서 영정 환안과 향사 복구를 특별히 허가하였다. 이에 따라 1922년 9월 8일에 우선 영정을 무성서원 강수재(講修齋)에 임시로 봉안하였는데 올해 여름 무성서원의 동쪽 터를 닦아 지금 건물을 세우고 기와를 얹으려 한다. 이 사문이 면암 문하의 제자라고 들었으므로 이번 유회소 회의 때의 공의로 도감동 임무를 천거하여 망첩(望帖)을 올리니 한마음으로 협력하여 완공해 줄 것을 간절히 바란다는 내용이다.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의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菴),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1855년(철종 6)에 명경과에 급제하여 호조 참판까지 올랐으나 흥선대원군과 민씨 일파를 비판하다 제주도로 유배된 후 관직 생활을 청산하고 위정척사(衛正斥邪)의 길을 걸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를 올리고 1906년 임병찬(林炳瓚)과 함께 기우만(奇宇萬)의 협조를 얻어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다. 정읍에서 거병하였으나 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되었다가 단식 후유증과 풍토병으로 사망하였다. 저서로는 ?면암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