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1년 천일관(千鎰貫)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千鎰貫 領議政 領議政 <着名> □…□ 3顆(적색, 정방형, 9)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0774_001 1891년 10월에 곡성현에 사는 유생 천일관·천일권·천일표 등이 영의정에게 전라도 곡성현에 관문을 보내 전교에 따라 잡역을 면제시켜줄 것을 청원한 상서 1891년(고종 28) 10월에 곡성현(谷城縣)에 사는 유생(儒生) 천일관·천일권(千鎰權)·천일표(千鎰杓) 등이 영의정(領議政)에게 전라도 곡성현에 관문(關文)을 보내 전교(傳敎)에 따라 잡역(雜役)을 면제시켜줄 것을 청원한 상서이다. 천일관 등은 명나라 만력(萬曆) 때의 명장(名將)으로 임진왜란 때 많은 전공을 세우고 조선에 귀화하여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진 천만리(千萬里, 1543~?)의 후손이다. 화산군의 후손은 종손(宗孫)·지손(支孫)·천얼(賤孽)을 막론하고 잡역을 면제하라는 전교와 완문(完文)을 내려 폐단 없이 잘 지켜지고 있었으나 근래 잡역과 여러 징구토색(徵求討索)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이에 전교와 완문 및 앞뒤 문적(文蹟)을 점련하여 곡성 현감에게 청원하였다. 곡성 현감은 수교(受敎)와 완문이 명백하므로 정소(呈訴)에 따라 잡역을 면제해주고 침탈하지 말 것을 처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처분에 불과하므로 영의정에게 전라도 곡성현에 관문을 보내 전교의 뜻을 받들게 해줄 것을 청원하였다. 이 상서에 대해 영의정은 10월 16일에 전라감영(全羅監營)과 곡성 현감에게 '완문에 따라 잡역을 면제해주어서 원통함을 호소하게 하지 말도록 하라'는 처분을 내렸다. 당시 영의정은 문충(文忠) 심순택(沈舜澤, 1824~1906)이다. 문서 배면에 적힌 '경술(庚戌) 십일월(十一月) 십삼일(十三日) 진시(辰時)'는 후대에 문서의 훼손된 부분에 종이를 덧대어 손질하면서 기록해 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천만리의 본관은 중국 영양(穎陽), 자는 원지(遠之), 호는 사암(思庵)으로 명나라에서 귀화하였다. 1571년(선조 4) 무과에 급제한 뒤 1575년에 총절사(總節使)가 되어 몽고군을 격퇴하였다. 임진왜란 때에 원병(援兵)으로 조병영량사(調兵領糧使)가 되어 아들 천상(千祥)과 함께 이여송(李如松)을 따라 조선에 왔다. 평양 전투와 곽산·동래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 때 울산에서 전공을 세웠다. 왜란이 끝난 뒤에도 귀국하지 않고 조선에서 살았다. 선조는 그의 전공을 생각하여 화산군에 봉하고 전(田) 30결(結)을 급복(給復) 하였으며, 그의 아들 천상도 한성윤에 승진시켰다. 저서로 『사암천문집』이 있으며, 고성 호암사(虎巖祠)와 청도 황강사(皇岡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