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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양준묵(梁俊默)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綾州牧使 梁俊默 牧使[着押] *周挾字改印, 1顆(墨印, 14.6×3.8)*1顆(7.0×7.0)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2553_001 1870년 능주목에서 유학(幼學) 양준묵(梁俊默, 53세)에게 발급한 준호구(準戶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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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양준묵(梁俊默)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綾州牧使 梁俊默 牧使[着押] *周挾字改印, 1顆(墨印, 14.0×3.7)*1顆(6.8×7.0)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2553_001 1888년 능주목에서 통사랑 선공감감역(通仕郞 繕工監監役) 양준묵(梁俊默, 75세)에게 발급한 준호구(準戶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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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년 양준묵(梁俊默)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綾州牧使 梁俊默 牧使[着押] *周挾字改印, 1顆(墨印, 13.6×3.7)*1顆(6.5×8.0)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2553_001 1891년 능주목에서 통사랑 선공감감역(通仕郞 繕工監監役) 양준묵(梁俊默, 78세)에게 발급한 준호구(準戶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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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양재경(梁在慶)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綾州牧使 梁在慶 牧使[着押] *周挾字改印, 1顆(墨印, 13.4×3.7)*1顆(6.8×6.9)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2553_001 1897년 능주목에서 유학(幼學) 양재경(梁在慶, 39세)에게 발급한 준호구(準戶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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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양재선(梁在善)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綾州牧使 梁在善 牧使[着押] *周挾字改印, 1顆(墨印, 14.0×3.6)*1顆(6.8×7.0)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2567_001 1897년 능주목에서 유학(幼學) 양재선(梁在善, 36세)에게 발급한 준호구(準戶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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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양준묵(梁俊默)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綾州牧使 梁俊默 牧使[着押] *周挾字改印, 1顆(墨印, 14.0×3.8)*1顆(6.8×7.0)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2553_001 1885년 능주목에서 유학(幼學) 양준묵(梁俊默, 68세)에게 발급한 준호구(準戶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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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양재선(梁在善)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綾州牧使 梁在善 牧使[着押] *周挾字改印, 1顆(墨印, 14.8×3.8)*1顆(6.6×7.1)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2567_001 1898년 능주목에서 유학(幼學) 양재선(梁在善, 37세)에게 발급한 준호구(準戶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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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37년 양직영(梁直永) 등 소지(所志) 초(草)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化民 梁直永 等 陵州牧使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2535_001 1837년(헌종3) 11월에 능주목 하동면에 사는 양직영·양주영·양상필 등 3인이 남준옥과의 산송 문제로 능주목사에게 올리는 소지의 초본 1837년(헌종3) 11월에 능주목 하동면(下東面)에 사는 양직영(梁直永)·양주영(梁柱永)·양상필(梁相必) 등 3인이 남준옥과의 산송(山訟) 문제로 능주목사에게 올리는 소지의 초본(草本)이다. 지난 을사년(1785)에 남준옥의 조부 남위익(南爲翼)이 후사 없이 죽은 종자(從子)를 투장한 일이 있어 굴이(掘移)를 한 곳에 올해 남준옥(南俊玉)이 죽은 어머니를 투장하였고, 8월에는 또 죽은 아버지를 어머니 묘소로부터 수십걸음 되는 아래에 계장(繼葬)을 하였기에 영문(營門)에 정소(呈訴)한 결과 그를 가두고 굴거(掘去)한 후에 보고하도록 뎨김을 받았으므로 그해 12월 12일에 남준옥이 부모의 상하 무덤을 즉시 굴거했다며 이전 산송 상황을 아뢰었다. 이와 같은 일이 문서에 훤히 기록되어 있는데 자신들의 산지에 자신들의 중형(仲兄)을 입장(入葬)하려고 하자 남준옥이 금장(禁葬)하는 일이 벌어졌다며 산의 형세로 보아도 동쪽은 자신들의 종가(宗家) 기지(基址)이고, 서쪽은 본촌(本村)의 가장동(假葬洞)이라서 문제가 없다는 것, 오히려 남가가 중부 무덤이라고 주장하는 무덤은 그의 후사 없는 5촌숙을 빈장해 놓은 곳에 가토를 해 놓고는 무덤이고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전후 문기를 점련하여 호소하니 잘 살피시어 처분해 주시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써 놓기만 하고 관에 제출하지 않은 미발문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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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下東面 化民梁直永梁柱永梁相必等右謹言 伏以民之仲兄入葬于民等之宗家家後世守之地是乎所 大抵葬地 則去乙巳年分南俊玉之祖父爲翼偸葬其無後從子于此地是如可 呈 官掘移文記昭然 且乙未年分同俊玉偸葬其亡母於此地是遣 八月分又復偸葬其亡父於此地數十步之下是如可 民等呈疏狀之囚之終不掘去 故更爲呈 營是乎則 題內 偸葬於旣掘之地 又復継葬於落訟之後 其習誠甚可駭 南民爲先捉囚 待掘去後 報來事敎是故 是年十二月十二日良中南俊玉卽掘渠奚父母上下塚 而文記昭然是乎則 渠何敢禁民之入葬乎 此不過落訟之餘憤也 果如是則 營門題决前 官處决似無憑處 論其地形 則山之東卽民等之宗家基地也 山之西卽本村之假葬洞 而壽明父塚段置 乙亥年假殯而未葬者也 渠矣無後五寸叔因殯加土之地 稱以渠矣仲父塚是如乎尼 此不過誣 官亂倫之漢也 前後文記帖連仰龥 伏乞孝理之下 一一洞燭其前後文記敎是遣 特爲 處分之地 千萬望良只爲行下向敎是事城主 處分丁酉十一月 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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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35년 양시영(梁始永) 등 의송(議送)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梁始永 全羅監史 使[着押] 6顆(8.0×8.1)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2535_001 1835년(헌종1) 11월에 능주 하동면에 사는 양시영(梁始永)·양직영(梁直永)·양주영(梁柱永)·양상후(梁相垕) 등 4인이 남준옥의 투장사건으로 전라감사에게 올린 의송 1835년(헌종1) 11월에 능주(綾州) 하동면(下東面)에 사는 양시영(梁始永)·양직영(梁直永)·양주영(梁柱永)·양상후(梁相垕) 등 4인이 남준옥의 투장사건으로 전라감사(全羅監司)에게 올린 의송이다. 남준옥이 몇 백 년을 내려오는 대종가 사당의 70보 이내에 을사년에 투장을 한 후에 그 후 산송으로 인하여 낙송을 하여 굴거를 지시 받은 곳에 또 그 어머니를 투장하였다고 호소하였다. 그로 인해 여러 차례 관에 정소하고 관의 제음이 있었는데도 관의 분부를 어기고 가두면 도망가는 등의 지극히 완악한 행동을 하는 남준옥을 엄히 다스리고 즉시 2총의 묘를 굴거해달라는 내용의 청원이다. 이에 대하여 관에서는 '투장을 하여 이미 굴거한 곳에 또 다시 계장(繼葬)을 하다니 그 습성이 매우 놀랍다. 남민(南民)을 우선 잡아 가두고 굴거하기를 기다린 후에 보고하라'고 산재관(山在官)에게 초6일에 판결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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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88년 김윤택(金潤澤) 등 등장(等狀)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金潤澤 全羅都巡察使 都使[着押] 3顆(9.5×9.5)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88년 3월에 전라도 무장현 장자산면에 사는 김윤택·강기두 등 주민 20인이 도순찰사에게 5, 6백냥에 불과한 경비전을 이미 혁파한 영비와 뒤섞어 장자산면에 2,500냥을 함부로 분배한 정낙원의 횡포를 고발하고, 무장현에 관문을 보내 죽게 생긴 자신들에게 다시 살아갈 희망을 갖도록 해줄 것을 청원한 등장 1888년(고종 25) 3월에 전라도 무장현(茂長縣) 장자산면(莊子山面)에 사는 김윤택·강기두(康基斗) 등 주민 20인이 도순찰사(都巡察使)에게 5, 6백냥에 불과한 경비전(京費錢)을 이미 혁파한 영비(營費)와 뒤섞어 장자산면에 2,500냥을 함부로 분배한 정낙원의 횡포를 고발하고, 무장현에 관문을 보내 죽게 생긴 자신들에게 다시 살아갈 희망을 갖도록 해줄 것을 청원한 등장이다. 무장현의 훈련원 둔전에 관한 일은 이미 앞의 의송에서 모두 말한 것처럼 훈련원 둔전은 성동면(星洞面)·원송면(元松面)·장자산면 등지에 있는데 지난 봄에 성동면에 사는 정낙원 등 세 사람이 경감 영리(京監營吏)와 다투다가 발생한 비용이 장자산면을 핍박하였다. 이미 둔전이 장자산면에 있다고 하면서 두 세 번 경비를 징수한 것이 이미 4, 5백냥이나 된다. 앞서 재앙을 입어 주민들이 지탱하지 못하고 있는데 정낙원의 탐욕이 끝이 없어 영비를 핑계로 비용의 수효를 허황되게 부풀렸다. 이 때문에 지난 해에 어쩔 수 없이 의송하여 엄한 제사(題辭)를 받들어 이미 공정한 판결이 났다. 그런데 뜻밖에 지금 정낙원 등 세 사람이 무장현의 훈련원 둔전이 서울에서 순조롭게 해결되었다고 운운하고, 또 경비전은 관가를 기망하여 제사(題辭)를 받았다고 핑계 대면서 이런 춘궁기에 주민의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곤궁한 주민들을 위협하여 지난 해에 혁파한 영비를 경비전과 뒤섞어 매 결당 12냥씩을 장자산면에 분배하여 2,500여 냥에 이르게 되었다. 이를 정낙원 도당 수십명이 밤낮없이 독촉하여 거둬들이는 통에 공납(公納)에 급급한 주민들이 넋을 잃고 집집마다 울부짖으며 다른 관으로 이전하거나 다른 면으로 피신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곧 모내기철인데 면 안에 한 사람도 농사지을 뜻이 없어 장차 텅 빈 땅이 되고야 말 것이기 때문에 며칠 전에 관아에 청원하였더니 정낙원이 주변에 사주하여 결국 퇴짜를 맞았다. 경비전으로 말하자면 3인이 네 다섯 달 소요되므로 경비는 많아야 5, 6백냥에 불과한데도 처음에는 6천냥이라고 했다가 중간에는 4천냥이라고 하더니 마지막에는 3천냥이라고 하였으니 그 협잡(挾雜)을 알 수 있다. 이미 혁파한 영비를 경비전과 뒤섞어 사사로이 함부로 분배하여 장자산면의 부담금이 2,500냥에 이르게 되었으니 그들의 법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장자산면 주민들은 도순찰사에게 '즉시 통촉하여 해당 고을에 별도로 관문(關文)을 보내 구덩이에 뒹구는 이 무고한 백성들이 다시 살 희망을 갖도록 해 줄 것'을 청원하였다. 이 의송을 접수한 도순찰사는 3월 17일 무장현감에게 '정낙원을 잡아와 엄히 다스려서 폐단을 막을 것'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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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910년대 곽종석(郭鍾錫)·김세동(金世東) 상소(上疏) 초(抄) 외(外) 고문서-소차계장류-상소 1910년대 郭鍾錫 等 高宗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10년대 망국의 상황에서 곽종석이 고종에게 올린 상소와 그에 대하여 고종이 내린 비답의 등초본 1910년대 망국의 상황에서 곽종석(郭鍾錫)이 고종(高宗)에게 올린 상소와 그에 대하여 고종이 내린 비답(批答)을 베껴 놓은 문건이다. 마지막에는 김세동(金世東)이 지은 7언율시 1수가 적혀 있다. 안동의 유생인 김세동은 고종(高宗)의 밀지로 의병에 참여해 달라고 곽종석을 방문하였는데 곽종석은 고종의 의견에 반대하며 의병의 창의를 철회하도록 고종에게 요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작성된 상소와 비담, 김세동의 시가 적혀있는 문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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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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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92년 류재익(柳載益)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全羅道 儒生 柳載益 等 全羅監司 使[着押] 3顆(7.8×8.0)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2590_001 1892년(고종29) 윤9월에 전라도 유생 류재익(柳載益) 등 77인이 금구현 하서면(下西面)에 사는 사인(士人) 곽영춘(郭永春)의 효우(孝友) 포장을 청하기 위해 전라감사에게 올린 상서(上書) 1892년(고종29) 윤9월에 전라도 유생 류재익(柳載益) 등 77인이 전라감사에게 도내 금구현 하서면(下西面)에 사는 사인(士人) 곽영춘(郭永春)의 효행 포장(襃獎)을 신청하기 위해 올린 상서(上書)이다. 곽영춘은 정의공(正懿公) 곽경(郭鏡)의 후손이자 청백리 곽안방(郭安邦)의 14세손이자 임진왜란의 공신 곽재우(郭再祐)의 7대 방손(傍孫)으로 가전하는 충효로 집안의 고풍을 이어서 노모를 위하여 손가락을 베어 입에 피를 흘려드려 회생하게 하고 신묘년에는 질병이 든 아버지를 위하여 하늘에 자신이 대신 병들기를 기원하는 등의 효를 행하였으므로 지역 유림의 발의로 본관(本官: 금구현)에 포장을 요청하였는데 그 제사에 관에 보고하겠으며 공의(公議)에를 기다리자고 하였기에 침묵할 수 없어 그의 포장을 신청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감사는 '곽영춘의 효행을 듣자니 매우 가상(嘉尙)하다'고 윤9월 25일에 뎨김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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