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성균관(成均館) 답통(答通)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사회-조직/운영-통문 檀紀四千二百九十年五月日 成均館長 金昌淑 綾州鄕校 儒林 僉君子座下 檀紀四千二百九十年五月日 金昌淑 綾州鄕校 儒林 成均館印 1顆(4.5x4.5), 成均館長之印 1顆(2.5x2.5) 전남도청(2019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57년 5월에 성균관장(成均館長)이 능주향교(綾州鄕校) 유림들에게 충효사에 대한 칭송과 함께 당부의 말을 써서 보낸 답통(答通). 1957년 5월에 성균관장(成均館長) 김창숙(金昌淑)이 능주향교(綾州鄕校) 유림들에게 충효사에 대한 칭송과 함께 당부의 말을 써서 보낸 답통(答通)이다. 통문의 내용에 따르면 지금 능주 유림들의 통문을 보고 옛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모봉(茅峰) 박지수(朴枝樹) 유적의 흠경함을 깨닫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박지수의 충절과 아들 박천수의 효성을 간략히 서술하며 이들을 칭송하였다. 선조 때에 상대(霜臺, 사헌부)의 청직(淸職)을 맡아서 24명의 어진 동료와 함께 총마계회(驄馬契會)에서 시를 주고받으니 선조께서 이를 가상히 여겨 총마도(驄馬圖)와 시(詩)를 지어 주었고, 임진왜란 때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모시고 북관(北關)으로 피난하였으며 종사(宗社)가 위급함에 미쳐서는 분격(憤激)함을 이기지 못해 "그 나라가 망하고 몸이 사는 것은 몸이 죽고 나라가 있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하였다. 서약봉(徐藥峯), 정농포(鄭農圃) 등 제현(諸賢)과 함께 부의(赴義)하여 전투에서 싸우다 마침내 순절하고, 그 아들 주부(主簿) 회재(悔齋) 박천주(朴天柱)는 정성이 하늘에 근거하여 여막에 거쳐하며 읍혈(泣血)하니 망북현(望北峴) 쇄루암(灑淚巖)이 생겼다고 하였다. 한 집안에서 양세(兩世)에 충과 효가 나타나니 영지(靈芝)도 뿌리가 있고 예천(醴泉)도 근원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도 이러한 행적이 드러나지 않아 울적하였는데 고종 때 정려와 증직이 내려져 다행이라고 하면서 또 성균관장의 조두문자(俎豆文字)가 미치니 지체할 겨를이 없다며 지금 겨우 사우(祠宇)를 세우고 배향했다고 하지만 대개 궁통(窮通, 빈궁과 영달)과 현회(顯晦, 유명해지는 것과 은폐되는 것)는 짐짓 그 때가 있다고 하면서 기강을 바로잡고 쇠퇴한 풍속을 격려하고 이같이 숭상하는 곳이 없으므로 앞으로도 계속 끊어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당부의 말로 회고(回告)하였다. 충효사(忠孝祠)는 화순군 도암면 벽지리에 자리하며 박지수(朴枝樹)와 아들 박천주(朴天柱)를 배향하고 있는 사우이다. 1598년 건립되었고, 1868년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 그 후 1924년에 우선 단(壇)으로 제향해오다가 1955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현재 밀양박씨 문중에서 보존 관리하고 있으며 2001년 7월에 화순군 향토문화유산 제2호로 지정되었다. 박지수(朴枝樹, 1562~1593)는 본관이 밀양(密陽), 자가 무중(茂仲)이고, 호가 모봉(茅峰)이다. 밀양군(密陽君) 박중손(朴仲孫)의 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찰방 박영걸(朴永傑)이고, 아버지는 사맹공(司猛公) 박억서(朴億瑞)이다. 자질이 빼어나고 일찍부터 강개한 뜻이 있었으며, 1580년(선조 13)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합격하였다. 1591년 사헌부 감찰을 제수받았으며, 동료들 24인과 함께 사헌부에서 서로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시를 지어 주고받았다. 선조가 이를 가상히 여겨 「총마계회도(驄馬契會圖)」를 지어서 주었다. 임진왜란 때 특명으로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호위하여 북도로 피난 도중 적병 수천 명을 만나 삼일간의 접전 끝에 온몸에 상처를 입어 회령에서 순절하였다. 그의 노복이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에 돌아오자 부인 노씨가 남편을 따라 자결하였고, 이 광경을 지켜본 노비 근춘(斤春) 역시 자결하였는데 이에 일문삼절(一門三節)이 배출되었다고 회자되며 이들의 충절이 높이 평가되었다 한다. 부친 사맹공(司猛公)은 83세의 나이로 재산을 털어 군수를 보조하였다. 1869년에 좌승지에 증직되었으며, 1870년에 정려가 내려지고, 1892년에 좌참찬에 증직되었다. 충효사(忠孝祠)에 그의 아들 박천주와 함께 배향되었다. 박천주(朴天柱, 1578~1650)는 자가 경국(擎國)이고 호가 회재(悔齋)이다. 박지수(朴枝樹)의 아들로, 주부(主簿)를 지냈다. 효성과 우애가 독실하였다. 나이 10세에 부모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계속 부모님이 처음 돌아가신 때와 같이 변함없이 하여 주변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였다.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충효사(忠孝祠)에 아버지 박지수와 함께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