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3년 이연(李溎)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癸亥八月日 化民幼學李溎 等 43名 城主 癸亥八月日 [1863] 李溎 羅州牧使 使[着押] □…□ 3顆(7.0x7.0) 전남도청(2019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63년(철종14)에 이연(李溎) 등 43명이 나주목사(羅州牧使)에게 이지득(李止得)의 충절을 표창해 주길 청하는 상서(上書). 1863년(철종14) 8월에 화민(化民) 유생(儒生) 이연(李溎) 등 43명이 나주목사(羅州牧使)에게 이지득(李止得)의 충절을 표창해 주길 청하며 올린 상서이다. 이 문서에서 이연 등은 자신을 화민(化民)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화민은 자신이 사는 고장의 수령이나 조상의 산소가 있는 고장의 수령에게 일컫는 자칭이다. 나주 유생 43명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하다 순절한 이지득(李止得)의 충절 사실을 서술하면서 지난달(7월) 20일 사이에 도내 유림들이 순사또(巡使道)에게 상서를 올려 그 처분을 받은 영제(營題)를 점련하여 다시 올리니 이공(李公)의 충절에 대한 포상의 은전이 완결될 수 있도록 요청하는 것이다. 당시 나주목사는 송정희(宋正熙)로 1863년 7월 3일에 제수되어 1864년 4월 12일까지 재임하였다가 파직되고, 6월에 다시 재임되어 1865년 6월까지 근무하였다. 이와 같은 요청에 나주목사는 이공(李公)이 아직까지 포양(褒揚)되지 않은 것은 매우 흠이 되는 일이나 오래된 일이므로 갑자기 전보(轉報)하기가 어렵다는 처분을 내렸다. 이지득(李止得)의 충절 포상을 요청하는 문서는 이 외에도 1781년, 18세기 후반 기계상(奇繼商) 등의 상서가 남아있다. 이지득(李止得, 1555~1594)의 자는 덕보(德甫), 본관은 함평, 함풍군 극명(克明)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이유회(李惟誨)이다. 나주시 다시면 영동리 초동에서 태어났다. 1584년(선조 17) 별천(別薦)으로 겸사복(兼司僕) 내승(內乘)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임금이 파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군량을 모아 행재소에 가서 남으로 내려오기를 청하고 돌아왔다. 1594년(선조 27)에 사재를 털어 군량미로 공급하였고, 장경홍(張景弘)ㆍ장경남(張景男) 형제와 의병을 모아 활동하다가 흥양포(興陽浦)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1892년(고종 29) 충신정려(忠臣旌閭)가 내리고 병조참의에 증직되었다. 현재 나주시 다시면 영동리 초동마을에 이지득의 정려각인 포충각(褒忠閣)이 있다. 상서(上書)는 조선시대 민원서(民願書)인 소지류(所志類)로 그 서식은 다른 소지류와 약간 다르다. 이 문서는 관찰사·수령·암행어사 등에게 올리며, 그 내용은 산송(山訟)과 효행(孝行)·탁행(卓行)의 정려(旌閭)를 위한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인원이 많은 경우는 연명하여 올리기도 한다. 이 상서는 전래되고 있는 것이 많으며, 시대는 대개 조선 중기 이후에서 말기까지의 것이 대부분이다. 상서를 접수한 관찰사나 수령은 이를 검토하고 그 처분을 문서의 좌편 하단의 여백에 써놓는다. 이것을 제음(題音) 또는 제사(題辭)라 한다. 이와 같이, 처분한 내용을 써서 상서를 올린 사람에게 돌려준다. 그러나 수령에게 1차 올려서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2차, 3차 계속 올리며, 그래도 해결되지 않으면 관찰사에게 올리게 된다. 이러한 상서는 당시의 사회사정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