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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규(金寅圭)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弟 金寅圭 金寅圭 李光秀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김인규(金寅圭)가 이광수(李光秀)에게 그간 뵙지 못한 사정과 새해 인사를 전한 내용의 간찰. 12월 30일에 김인규(金寅圭)가 창평군(昌平郡) 장전(長田)에 사는 이광수(李光秀)에게 그간 뵙지 못한 사정과 새해 인사를 전한 내용의 편지이다. 며칠 동안 소식이 막힌 것이 마치 한 달과 일 년 같이 아득하게 느껴졌는데 오늘 편지를 보내주어 감사하다는 말로 편지를 열었다. 올해가 이틀밖에 남지 않았으니 남쪽으로 내려온 사람의 비분강개한 마음이 다른 때보다 심하다고 하며 세밑에 오는 서글픈 심정을 전하기도 했다. 이 구절에서 김인규가 다른 지방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어 편지로 이광수의 안부가 편안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위로되었다는 말을 하였다. 김인규 본인은 이번에 결단코 이광수를 찾아뵙고자 했으나 공교롭게도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더욱이 추위 때문에 길을 나서지 못했다고 전하며 죄송한 마음을 표했다. 새해 정월달엔 길이 막혀있다고 해도 기어이 만나 뵙고 이전에 부탁한 일을 준비하자고 말하고, 새해 인사를 전하며 편지를 마쳤다. 편지는 연도가 없이 '小除日'이란 일자만 표기되어 있어서 어느 해에 보냈는지 알 수 없고, 김인규에 대한 정보도 피봉에도 보이지 않아 알 수 없다. 이광수(1873~1953)의 호는 옥산(玉山), 자(字)는 미중(美中)이다. 부인 죽산안씨(竹山安氏)와의 사이에 외아들 혁(爀, 1898~1977)을 두었다. 노사학파의 일원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이다. 1900년에 경의문대(經義問對)로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로 되었으며, 계몽운동가인 양한묵(梁漢黙) 등과 교유하면서 신학문에 뜻을 두고 개화(開化)에 앞장섰다가 송사에게 파문(破門)을 당하기도 했다. 일제의 강제 병합을 목격하고 고향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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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록(歷史記錄) 고문서-치부기록류-역사기록 사회-역사-역사기록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누대와 치부를 기록한 기타기록. 愛蓮亭, 蓮花峰, 萬頃臺 등 누대를 기록, 3명의 인명과 돈이 기입 *상태: 메모지에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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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찰별지(簡札別紙) 2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교통편을 제시하며 만날 장소를 알린 내용의 간찰 별지. 황해도 금천(金川) 등지의 구체적인 교통편을 알려주며 만날 장소를 전한 내용의 간찰 별지이다. 별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해도 금천의 금교역(金郊驛)에 하차하여 평산(平山)의 저탄교(猪灘橋)를 건너서 오탄(鳥灘)에 기거하는 주사(主事) 이승묵(李承黙) 집을 방문하고 한포정거장(汗浦停車場)으로 나오라는 내용이다. 이 별지는 본 편지와 함께 있지 않아 수ㆍ발신에 대한 정보와 쓰인 날짜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이승묵(1854~?)이 양녕대군의 둘째 아들 함양군(咸陽君) 이희(李䛥)의 후손이라는 것과 이승학 가문에서 나온 문서라는 점으로 이승학 집안으로 온 문서로 추정할 뿐이다. 이승학 가문 사람이 집안 식구들에게 보낸 문서일 가능성도 크다. 이승학(1857∼1928)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양녕대군의 후손이며, 자는 자화(子和), 호는 청고(靑皋)이다. 전남 담양 장전리(長田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인 진사 이최선(李最善)이고, 이승학 본인도 기정진의 문하에서 배웠다. 아들 이광수(李光秀)는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제자이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팔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집으로 ?청고집(靑皋集)? 4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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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川金郊驛에下車하야平山猪灘橋를건너셔鳥灘居李主事承黙家를訪宿하고出于汗浦停車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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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이승학(李承鶴) 영수증(領收證) 2 고문서-명문문기류-근현대문서 경제-회계/금융-영수증 大正拾二年八月三十一日 潭陽郡昌平面森林組合理事 長華里 李承鶴納 大正拾二年八月三十一日 潭陽郡昌平面森林組合理事 李承鶴 전남남도 담양군 韓濟均(타원형)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23년에 담양군창평면삼림조합(潭陽郡昌平面森林組合)에서 이승학(李承鶴)에게 발급한 삼림조합비 영수증. 1923년 8월 31일에 담양군창평면삼림조합(潭陽郡昌平面森林組合)에서 장화리(長華里)에 사는 이승학(李承鶴)에게 발급한 영수증이다. 이 문서는 담양군창평면삼림조합이사 명의로 발행했다. 이승학이 납부한 금액은 1923년도 삼림조합비 5원(円)이다. 삼림조합은 1910년대부터 식림장려와 남벌방지라는 명분 아래에 삼림 이용 간섭 및 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림조합, 식림조합, 식림계 등 다양한 명칭으로 조직되었다. 그런데 임야조사사업이 마무리되는 1920년대부터 각 군마다 다양한 조합을 통합, 정비하였고 주민들에게 조합비가 청구되었다. 삼림조합은 임의단체이지만 군 단위로 조직되어 주로 군수가 조합장이 되고, 군민들을 강제로 가입시키는 등 관제조직의 성격이 강했다. 조합원은 각 군 삼림조합에서 자체적으로 책정하는 조합비를 부담했으며, 산불 방지 활동, 송충이 구제, 벌채 제한 등 각종 의무가 가해졌다. 또한 채신세(採薪稅)나 임야벌채신청 수수료 등 다양한 추가 부담금도 내야 했다. 그래서 삼림조합에 대해 조선인들의 원성이 높을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민족자결운동의 근원이 된다 하여 1930년대 이후에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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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이광수(李光秀) 영수증(領收證) 2 고문서-명문문기류-근현대문서 경제-회계/금융-영수증 大正十四年十月十四日 京城東大門外回基里 時兆社 裵相蓮 李光秀 大正十四年十月十四日 裵相蓮 李光秀 전남남도 담양군 裵相蓮(타원형), 時兆社印(2.0×2.0)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25년에 시조사(時兆社)에서 이광수에게 발급한 영수증. 1925년 10월 14일에 경성에 있는 시조사(時兆社)에서 이광수(李光秀)에게 발급한 영수증이다. 이광수는 『연년익수(延年益壽)』포의(布衣) 1책 대금 5원(圓) 중 2원 50전을 납부했다. 시조사 측 담당자는 배상연(裵相蓮)이다. 이 문서의 제목은 예약증(預約證)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문서 좌측에 11월 30일 내로 배송하되, 대금 상환으로 송부한다는 표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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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이승학(李承鶴) 영수증(領收證) 고문서-명문문기류-근현대문서 경제-회계/금융-영수증 大正十二年十二月二十四日 潭陽郡大德面會計員 金永龜 昌平面 長華里 李承鶴 大正十二年十二月二十四日 金永龜 李承鶴 전남남도 담양군 □…□ 2顆(타원형)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23년에 이승학이 담양군 대덕면에 지세를 납부하고 받은 영수증. 1923년 12월 24일에 창평면(昌平面) 장화리(長華里)에 사는 이승학(李承鶴)이 종중(宗中)의 지세(地稅)를 납부하고 받은 영수증이다. 이 문서는 담양군(潭陽郡) 대덕면(大德面) 회계원(會計員) 김영구(金永龜) 명의로 발행했다. 이승학이 납부한 금액은 1923년도 제1기 지세 11원(円) 97전(錢), 지세부가세(地稅附加稅) 3원 23전, 지세할(地稅割) 5원 50전, 지세부가금 3원 59전으로 총 24원 29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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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이혁(李爀) 영수증(領收證) 5 고문서-명문문기류-근현대문서 경제-회계/금융-영수증 大正十三年二月一日 潭陽郡昌平面會計員 朴在昊代 昌平面 長華里 李爀 大正十三年二月一日 朴在昊 李爀 전남남도 담양군 潭陽郡昌平面長之印(1.8×1.8), 朴烋汶(1.1×1.1)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24년에 이혁이 담양군 창평면에 지세를 납부하고 받은 영수증. 1924년 2월 1일에 창평면(昌平面) 장화리(長華里)에 사는 이혁(李爀)이 지세(地稅)를 납부하고 받은 영수증이다. 이 문서는 담양군(潭陽郡) 창평면 회계원(會計員) 박재호(朴在昊) 명의로 발행했다. 이혁이 납부한 금액은 1923년도 제2기분 지세 3원(円) 25전(錢), 지세부가세(地稅附加稅) 98전, 지세부가금 1원 9전, 지세할(地稅割) 1원 67전으로 총 7원 39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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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皮封]長田李進士宅回納昌吏上謝候伏拜審體候萬安仰慰苐京換苦請者何人用之者何人栗哉初不相知而只恃 令胤爲之也今聞李碩士所恃則 以保證一款有管不知而推於生是豈平日所望於尊座耶夫以經緯上言之票主不出則自歸於保證矣此之經緯應想先燭而何不速辦以給放此葛藤耶伏歎伏歎玆一曰今日內通電於 令胤兄限五六日間下來無至相推之地若何餘不備上謝禮侍生張復圭再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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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술년 안봉환(安琒煥)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丙戌臘月卄六日 査弟 安琒煥 丙戌臘月卄六日 安琒煥 査頓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86년에 안봉환(安琒煥)이 사돈 이승학(李承鶴)에게 사위 이광수(李光秀)를 보내면서 전한 간찰. 1886년에 안봉환(安琒煥)이 사돈 이승학(李承鶴)에게 사위 이광수(李光秀)를 보내면서 전한 편지이다. 지난번 몇 날 밤을 함께 얘기 나누면서 고가(古家)의 풍모를 볼 수 있었다며 감탄의 말로 편지를 시작했다. 이어 사돈의 객지 생활은 좋으신지 묻고, 본인은 예전과 같이 그럭저럭 지내고 있다고 하였다. 사위는 볼수록 기이하여 보내고 싶지 않은데 세속의 격식에 따라 돌려보내게 되어 서글프다고 전하며 서운한 마음을 드러내며 편지를 마쳤다. 안봉환은 죽산안씨(竹山安氏)로, 보성(寶城) 출신이다. 이광수의 장인으로, 안방준(安邦俊, 1573 ~ 1654)의 후손이다. 안방준의 자는 사언(士彦), 호는 은봉(隱峯)ㆍ우산(牛山)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성리학에 밝았다.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따위의 국난 때에 의병에 참여했으며, 의병과 당쟁에 관한 사적 등을 정리하고 저술하여 의병사ㆍ당쟁사 연구에 이바지한 공로가 컸다. 이광수(1873~1953)의 호는 옥산(玉山), 자(字)는 미중(美中)이다. 부인 죽산안씨와의 사이에 외아들 혁(爀)을 두었다. 노사학파의 일원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이다. 1900년에 경의문대(經義問對)로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로 되었으며, 계몽운동가인 양한묵(梁漢黙) 등과 교유하면서 신학문에 뜻을 두고 개화(開化)에 앞장섰다가 송사에게 파문(破門)을 당하기도 했다. 일제의 강제 병합을 목격하고 고향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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數宵奉晤寒見古家風範伏詢朝晡旅體珍重仰溸勞祝査弟省狀依昨而已 允郞看看益奇不欲遽捨而依俗套告歸悵缺甚矣餘擾不備禮丙戌臘月卄六日査弟安琫煥拜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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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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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祭李兄尙濂文 浮生草草若駒過隙自古以然不必傷衋唯兄之喪我心所戚早有才華未展驥足衰年食貧忽焉以歿主器先逝嗣孫稚弱孑然扶櫬行路亦泣顧弟多病累朔相隔月孟將晦兄忽來覿披襟莞爾色敷神懌戲謂吾兄春闈可擢明晨未起凶聞奄及愕然而坐五內如割促駕來赴兄無知覺哭之不聽呼之無答宿昔之驩便成永訣流光易邁將就窀穸弟兄之情他生是卜嗚呼哀哉兄喜壺觸每到輒索相與浮拍或至竟夕今茲一斝胡寧不格至哀無文聊以洩臆魂如有知鑑此衷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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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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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書于▣相閤下伏以本州之忠臣孝子不爲不多而或有褒揚而㫌閭者或泯▣▣無傳者姑不可一一枚擧而其中故孝子李止公改名止衖與梁山龍山璹兄弟及柳瑛羅德顯竝爲一代名人爲道內章甫之所薦俱得褒典而李公獨漏而無傳者以其子孫之零替家勢之殘微未能周章之致也豈不爲士林之所可慨惜者乎玆以齊聲臚報伏顚勿以久遠而置之勿以循例而視之 另加垂察而採納焉大抵李公以簪纓世族名宦顯爵連綿累代而其考諱惟誨早登司馬仍廢科業出入奇高峯門下以學行遍經三南諸書院之長而宣廟朝以春坊官累徵不赴混跡山林號稱蒿巖盖李公之至孝有得於庭訓而然也公生才髫齡遭外艱服喪哀毁之禮無異大人之皆稱歎奉母之節盡心竭誠少不離側遠近日益嗟服丁酉島夷之亂三南魚肉父子相失夫妻難保鳥竄鼠伏各自圖生而公負其母氏避入錦城山中城陷之日倭奴遍山殺掠甚急以兵欲害母氏公素病蹇脚蹣跚伏地哀乞代命翼蔽其母身被鋒刃流血淋漓倭奴憐而問之曰汝是何人之垂涕而答曰前兵曹參判李宗仁之曾孫司僕正李止得之弟也倭奴相顧起敬曰祖乃兄曾爲我國之所讐而實是汝國之忠臣汝且至誠救母不避鋒鏑求忠孝門正謂此也乃給米帛又書話孝子給母粮六字令公佩之曰若遇後至者出示之云云而去公奉母還家賊又大至母氏病重不能運步公負而迯避遇賊賊徒引兵擊之公之一肩一足俱斷而猶以身覆其母賊徒一釼俱害嗚呼公之兄止得以司僕小宦剰納天兵粮米一百十二石九斗五升赤豆一石而竟死賊鋒公之從兄止孝以湖西水使竪功立節 贈刑曹判書㫌閭褒忠則一門之內學行忠孝便成箕裘以公之偉行盛孝徒載邑誌將爲百年之泯沒則可謂聖代之欠典更伏願 閤下博採公議轉達 天陛俾蒙節惠之褒則不勝風化之幸甚使道主 處分壬寅二月 日幼學 崔益東 柳漢澤 洪在淵 柳宗魯 崔世赫 金天澤 金相羽崔斗建 羅學臣 鄭來祖 金壹明 李唐 洪千榮 崔光哲張齊甲 李希重 柳希和 崔斗元 金時輔 李希文鄭枰 李景淵 李希發 金昌彦 張齊文 羅漢五 李時培鄭昌祚 李壽五 柳天榮 李希仁 金弼明 李養根李儒聖 高德興 林一夏 李光植 李希薰 金昌元李希赫 柳漢弼 裵碩燦 李國顯 柳德文 李光祚吳敬相 鄭彦宅 等巡使 封?[着押](題辭)卓絶之行以甚義歎從當商量登聞向事卄三[馬牌印] 1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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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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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63년 이연(李溎)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癸亥八月日 化民幼學李溎 等 43名 城主 癸亥八月日 [1863] 李溎 羅州牧使 使[着押] □…□ 3顆(7.0x7.0) 전남도청(2019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63년(철종14)에 이연(李溎) 등 43명이 나주목사(羅州牧使)에게 이지득(李止得)의 충절을 표창해 주길 청하는 상서(上書). 1863년(철종14) 8월에 화민(化民) 유생(儒生) 이연(李溎) 등 43명이 나주목사(羅州牧使)에게 이지득(李止得)의 충절을 표창해 주길 청하며 올린 상서이다. 이 문서에서 이연 등은 자신을 화민(化民)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화민은 자신이 사는 고장의 수령이나 조상의 산소가 있는 고장의 수령에게 일컫는 자칭이다. 나주 유생 43명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하다 순절한 이지득(李止得)의 충절 사실을 서술하면서 지난달(7월) 20일 사이에 도내 유림들이 순사또(巡使道)에게 상서를 올려 그 처분을 받은 영제(營題)를 점련하여 다시 올리니 이공(李公)의 충절에 대한 포상의 은전이 완결될 수 있도록 요청하는 것이다. 당시 나주목사는 송정희(宋正熙)로 1863년 7월 3일에 제수되어 1864년 4월 12일까지 재임하였다가 파직되고, 6월에 다시 재임되어 1865년 6월까지 근무하였다. 이와 같은 요청에 나주목사는 이공(李公)이 아직까지 포양(褒揚)되지 않은 것은 매우 흠이 되는 일이나 오래된 일이므로 갑자기 전보(轉報)하기가 어렵다는 처분을 내렸다. 이지득(李止得)의 충절 포상을 요청하는 문서는 이 외에도 1781년, 18세기 후반 기계상(奇繼商) 등의 상서가 남아있다. 이지득(李止得, 1555~1594)의 자는 덕보(德甫), 본관은 함평, 함풍군 극명(克明)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이유회(李惟誨)이다. 나주시 다시면 영동리 초동에서 태어났다. 1584년(선조 17) 별천(別薦)으로 겸사복(兼司僕) 내승(內乘)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임금이 파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군량을 모아 행재소에 가서 남으로 내려오기를 청하고 돌아왔다. 1594년(선조 27)에 사재를 털어 군량미로 공급하였고, 장경홍(張景弘)ㆍ장경남(張景男) 형제와 의병을 모아 활동하다가 흥양포(興陽浦)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1892년(고종 29) 충신정려(忠臣旌閭)가 내리고 병조참의에 증직되었다. 현재 나주시 다시면 영동리 초동마을에 이지득의 정려각인 포충각(褒忠閣)이 있다. 상서(上書)는 조선시대 민원서(民願書)인 소지류(所志類)로 그 서식은 다른 소지류와 약간 다르다. 이 문서는 관찰사·수령·암행어사 등에게 올리며, 그 내용은 산송(山訟)과 효행(孝行)·탁행(卓行)의 정려(旌閭)를 위한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인원이 많은 경우는 연명하여 올리기도 한다. 이 상서는 전래되고 있는 것이 많으며, 시대는 대개 조선 중기 이후에서 말기까지의 것이 대부분이다. 상서를 접수한 관찰사나 수령은 이를 검토하고 그 처분을 문서의 좌편 하단의 여백에 써놓는다. 이것을 제음(題音) 또는 제사(題辭)라 한다. 이와 같이, 처분한 내용을 써서 상서를 올린 사람에게 돌려준다. 그러나 수령에게 1차 올려서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2차, 3차 계속 올리며, 그래도 해결되지 않으면 관찰사에게 올리게 된다. 이러한 상서는 당시의 사회사정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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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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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道莊面壁池洞居化民朴明煥朴在斗朴亨鎭右謹言伏以民之七代祖監察公墳墓在於大谷面茅山村後麓而所謂禁養編小定限界守護者數百餘年山下村居閔斗用爲名人去乙巳年分偸斫民之限界內松楸是去乙民卽爲呈 官奉 題音將爲捉上則同斗用自知昧法日後更不侵斫之意成手記累累哀乞乙民謂以山下之人姑忍憤鬱而許之矣不意今者同斗用忘手票越限界禁養松楸亦任意斫伐則民之先山無餘地矣數百年守護之心更安在難以私力措處故玆敢仰訴伏乞參商敎是後同斗用捉致 法庭偸斫松楸之罪臆奪限界之罪依律洞繩以爲日後更無如許之弊千萬祝手行下向敎是事城主 處分庚申八月日使[着押](題辭)閔斗用期於捉待事十六日 狀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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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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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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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子式第一戶幼學金致弘年七十五甲戌本金海父學生 允儉祖學生 鳳垕曾祖學生 重哲外祖學生 鄭致成 本慶州妻河氏齡六十六甲戌 籍晉州父學生 順三祖學生 文淑曾祖學生 良海外祖學生 金尙玉本金海賤口奴元禮故牧使[着押][周挾無改印] 1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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