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응(奇膺)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壬臘小望 弟 奇膺 玉山侍經丌 壬臘小望 [1902~1912] 奇膺 李光秀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모년 12월에 기응(奇膺)이 인척(姻戚)인 이광수(李光秀)에게 안부를 전하고 내년 봄의 약속을 재확인하는 내용을 전한 답장 간찰. 모년 12월 14일에 기응(奇膺)이 인척(姻戚)인 이광수(李光秀)에게 안부를 전하고 내년 봄의 약속을 재확인하는 내용을 전한 답장 편지이다. 편지 첫머리는 인형(姻兄)인 이광수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전한 내용이 담겼다. 장성(長城)의 초가집에서 차를 다리며 오롯이 앉아 보내다가 매번 꿈속에서 담양(潭陽)으로 달려가곤 하는데, 이는 담양의 산수가 좋아서만이 아니라 인형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라며 그리운 마음을 드러냈다. 이어 뜻밖에 보내신 편지를 받아 보니, 편지의 내용이 멀리 70리 밖에 사는 저의 폐부(肺腑)를 울려 눈물을 자아내게 하고 의기(意氣)를 차오르게 하며, 말이 모두 향기롭고 상쾌하여 병자가 회생할 듯 하다고 문장 솜씨를 극찬했다. 편지는 이광수의 안부를 확인한 내용으로 이어졌다. 이광수가 산방(山房)으로 들어갔다고 하는데, 집 뜰에는 중국 한(漢) 나라 학자인 정현(鄭玄)의 제자들이 책을 맬 때 썼다는 고사로 유명한 서대초(書帶草)가 생겼을 것이라고 하며 이광수의 학자적 면모를 북돋아 주기도 했다. 또 이광수가 태산(泰山)과 같은 선생 아래 거처를 정했다고 들었는데, 이 결심은 우리 도(道)의 복이 아니겠냐며 축하한다는 말을 한 내용이 보인다. 이 구절은 아마도 이광수가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을 스승으로 받들게 된 일을 두고 이른 것으로 보인다. 이광수는 아버지 이승학과 함께 기우만을 스승으로 모셨다. 계속해서 기응은 그간 자신의 안부를 알렸다. 겨울 동안 기침 소리를 내며 지내다 보니 생인(生人)의 흥취가 모두 사라졌다면서 건강이 좋지 않다고 하였다. 근래 고문(古文) 수백 권과 명화(名畫) 수십 본과 함께 썰렁한 집에서 좀벌레처럼 지내고 있다고 하였다. 또 능히 일을 마칠 수 있다고 한 구절이 보이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다. 회근(晦根) 또한 별 탈 없느냐고 안부를 물으면서 저를 위해 소식을 전해주기를 청했으나, 회근 역시 누군지 알 수 없다. 이어 이귀동(李龜東)은 우뚝하게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의 교송(喬松)과 같아서 일찍이 저와 함께하려 하지 않았을 것인데, 지난번 시회(詩會)에 와서 현순(弦旬) 동안 머물다가 금성산(金城山) 아래 영강(靈江) 상인(上人)이 되었다고 하며, 이귀동의 신선과 같은 면모를 칭찬한 내용도 보인다. 끝으로, 답장 편지를 곧바로 전송하지 못해 망망(惘惘, 맥없이 마음을 잃은 모양)하다고 하며 미안함을 표하고, 봄에 만나자는 약속을 상기시키며 편지를 마쳤다. 편지를 쓴 날짜 부분에 '壬腊小望'으로 표기되어 있어 연도가 불분명한데, 그동안 장성의 인척에게 온 편지들로 미뤄봤을 때 1892년 임진년(壬辰年)으로 추정된다. 장성의 인척인 기중도(奇重度)와 기응도(奇應度)의 편지를 보면, 1893년 봄에 유람 약속을 언급한 내용이 나온다. 이광수(1873~1953)의 호는 옥산(玉山), 자(字)는 미중(美中)이다. 부인 죽산안씨(竹山安氏)와의 사이에 외아들 혁(爀, 1898~1977)을 두었다. 노사학파의 일원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이다. 1900년에 경의문대(經義問對)로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로 되었으며, 계몽운동가인 양한묵(梁漢黙) 등과 교유하면서 신학문에 뜻을 두고 개화(開化)에 앞장섰다가 송사에게 파문(破門)을 당하기도 했다. 일제의 강제 병합을 목격하고 고향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