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祀典【凡祭祀之禮天神曰祀地祗曰祭人鬼曰享文宣王曰釋奠】 仲春仲秋上丁日釋菜【祭物自本邑進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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齊戒 前祀三日諸祀官幷散齊二日宿於正寢致齊一日於祀所【釋奠社稷及凡祈告報祀先告事由移還安祭同若祈告迫切則只淸齊一宿】凡齊官散齊治事如故唯不縱酒不茹葷不弔喪問疾下聼樂不行刑不判署刑殺文書不豫穢惡事致齊唯行祭事前祭二日皆沐浴更衣前一日質明赴祭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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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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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김치홍(金致弘) 관고(官誥) 고문서-교령류-관고 정치/행정-임면-관고 光武七年一月二十一日 金致弘 光武七年一月二十一日 高宗 金致弘 勅命之寶(11.0×11.0)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03년에 高宗이 金致弘을 정3품 通政大夫으로 품계를 올려주면서 발급한 문서. *左傍書: 大皇帝陛下入耆社時 士庶年八十人覃恩加資事奉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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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皮封)答舍弟書入此年來非無下去便而神思憒憒無意作家書日南望家使焂過正一月矣山直便書初不如不聞而克紹之來始打罷舊菀則慰可知矣細細家冗又令人關心者益多此生憂慮本是過重走避不得果若是甚乎自笑自憐奈何奈何卽日春暄漸宜母主氣力無損省履一如否經婚葛藤莫非乃兄自取者也何以經紀深爲爾曺憐悶雖然人世事不勤其始每至若此惟望涉難長智也大小節俱安喜聞而外何求於客中哉舍伯經冬捿屑無非滄浪苦況而豈全無心而索長安□者但經營每多不如意頗近書生誤闊甚是無謂而可笑也已今番鄕試初若如意則庶有下去之意而尙無指的之道故雖爲停坐然旣有通名之便則不可無納名也亦在周旋得宜否吾不欲以此屑屑於道塗奔走故如是耳隨例觀光無過溺於俗套中以成吾志也克紹事似如意而一門助筆何以容易議到也汝則以吾事不可不赴試所而光兒輩初不妄動可也況吾未去乎前書見兒也欲上來云者是何故也嚴禁也吾事究竟日自有無恨多日何必如是乎餘在片夾便一一細看也姑不具辛卯二月十四日舍伯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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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년 이승학(李承鶴)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辛卯三月四日 寄舍弟書 辛卯三月四日 李承鶴 舍弟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91년에 이승학(李承鶴)이 동생에게 환전(換錢) 등의 일을 당부하고 과거 시험 준비 중인 본인의 상황 등을 전한 간찰. 1891년 3월에 이승학(李承鶴)이 동생에게 환전(換錢) 등의 일을 당부하고 과거 시험 준비 중인 본인의 상황 등을 전한 간찰이다. 여기서 동생은 이승학이 서울에 있는 동안 집안일을 주관하고 있었던 동생 이승구(李承龜, 1860~1942)를 지칭한 듯하다. 이승구는 이승학의 숙부(叔父) 이원선(李元善)의 양자로 들어간 둘째 동생이다. 담양(潭陽) 연동(淵洞)의 인편으로 편지를 보냈다는 말로 편지를 시작했다. 이어 가족들의 안부를 두루 묻고 집안일이 군색할 텐데 가장인 본인이 객지에 있어서 동생들을 고생시킨다고 하며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또 환사(換事)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이는 1890년 11월 이후로 이승학이 지속해서 편지로 말한 것으로, 담양읍(潭陽邑)의 상인 국영진(鞠永趁)이 이승구 집안에 260냥을 집전(執錢)하여 엽전으로 주기로 한 일을 이른 것이라 추측된다. 이번 편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영진이 이 돈을 원래 작년까지 주기로 하였으나 해가 넘어가도록 주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 때문에 이승학도 동생에게 이 일을 독촉하도록 당부했다. 편지는 이승학의 서울 생활로 넘어간다. 이승학은 그간에 본 향시(鄕試)의 결과가 나왔을 듯한데 아직 알 수 없어 답답하다는 것과 두 해에 걸쳐 객지 생활에 어려움이 많다는 내용, 담양(潭陽)의 백동(栢洞) 족숙(族叔) 편에 자세한 내용을 전달한다는 내용 등이 실렸고, 추신으로 춘의(春衣) 등의 의복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이승학(1857∼1928)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이며, 전남 담양(潭陽) 장전리(長田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인 진사 이최선(李最善)이고, 이승학 본인도 기정진의 문하에서 배웠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팔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집으로 ?청고집(靑皋集)? 4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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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舍弟書今月初吉淵洞便付書二日發去云必卽傳而得見矣近日春色日暢侍狀安吉諸眷俱平日南望鄕思尤不自堪也家中近經何以推過必多窘窒而吾則遠遊未歸徒使爾書作此無限苦惱可念可念前書中換事又申之言之則其間周旋至於如何而已爲發行耶此事究竟然後可以安心而卽今過限則不無見促下便不容易上來可謂滄浪而徒悶鄕試得失已辦而姑未得知可菀一解得失不係吾之去留且無關情者而兩載旅途外面亦難耳近日事前書已言栢洞族叔今又下去則細細事必聞之矣擾甚略此不具式辛卯三月四日舍兄書春衣裌衣與苧布弊衣上下單衣送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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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家兒登途後已過一月而南來信字莫憑徒增泄泄比日祖母主氣力萬康家中無大何讀字課日否仰應乃範同接乎凡人之有許大力量然後做許多事業而汝之不動向學每每可念家中事汝之諸父諸叔俱在使之擔常做去勿爲干涉勿如看他人事專念向學勿墜家聲留意焉父姑無歉狀而今行本不關利欲西入中州爲遊覽計而已與植兄結伴將以今望間獎發向仁川候火輪而期在明春則家中勿爲甚待也當初有此意而不發者恐驚汝曺故耳他難一一而所望於汝者勤勤向學不墜家聲而已以副汝父之在滄海萬里之外念也汝之室以今四日無事得抵否俱爲悤悤庚寅陽月七日父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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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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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이승학(李承鶴) 간찰(簡札) 2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庚寅至月念五日 父 光兒 庚寅至月念五日 李承鶴 李光秀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90년 11월에 이승학(李承鶴)이 이광수(李光秀)에게 안부를 전하고 공부와 집안일 등을 당부한 내용의 간찰. 1890년 11월에 이승학(李承鶴)이 이광수(李光秀)에게 안부를 전하고 공부와 집안일 등을 당부한 내용의 편지이다. 편지 서두에서도 안부를 두루 묻는 내용이 보인다. 이승학은 서울로 올라온 3달 동안 할머니와 어머니를 모시면서 잘 지내고 있으며 독서는 어떠하며 동무들과 모범이 되는 공부를 하는지를 물었다. 이어 이승학 본인의 안부를 전해주었다. 본인은 서울의 적막한 여관에서 지내면서 잠 못 들고 있다고 하며 그리움을 표하고 아들의 공부를 독려했다. 이승학은 자신이 뜻을 세우고 행동을 함에 굳게 하지 못하였고 일을 함에 마치 바람을 잡듯이 허황하여 우활 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자책하면서 아들에게는 이 같은 잘못을 하지 말고 아버지를 경계로 삼아 스스로 도모하도록 하였다. 계속해서 이승학은 자신의 현재 계획과 심정 및 앞으로의 계획 등을 두루 아들에게 전했다. 지난달 10월 7일에서 말한 중국 유람은 즐거운 계획이긴 하나 뜻대로 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다. 내년 1월까지 서울에 머물렀다가 미련 없이 갈 것이라는 말 등 서울에서 생활하는 동안의 마음가짐을 표했다. 또 집안일과 관련된 당부도 잊지 않았다. 중요한 집안 문제는 숙부들이 처리할 것이니 쇠미한 일은 부지런히 숙부를 잘 받들고 공부에 전력하라고 당부했다. 이어 묵은 질병과 독감으로 고단하긴 하지만 크게 염려할 정도는 아니라는 내용, 서울살이 비용으로 매번 염려된다는 내용, 의복이 와야 올해를 잘 마칠 것이라는 내용, 편지를 보낼 인편이 없으면 하사(下沙)로 부치라고 하는 내용 등을 두루 밝혔다. 여기서 하사는 이승학 사돈댁인 장성의 하사마을을 지칭한 듯하다. 이승학(1857∼1928)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이며, 자는 자화(子和), 호는 청고(靑皋)이다. 전남 담양(潭陽) 장전리(長田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인 진사 이최선(李最善)이고, 이승학 본인도 기정진의 문하에서 배웠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팔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집으로 ?청고집(靑皋集)? 4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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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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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이승학(李承鶴) 간찰(簡札) 3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己亥菊至日卽陰曆卄日 父 寄家兒 己亥菊至日卽陰曆卄日 李承鶴 李光秀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고종실록(高宗實錄)? 전주이씨추성수파중중 편, ?전주이씨추성수파보(全州李氏秋城守派譜)?, 낭주인쇄사, 1990 이승학, ?청고집(靑皐集)? 1899년 9월에 이승학(李承鶴)이 아들 이광수(李光秀)에게 문중의 족보 소식과 집안일에 대한 당부를 전한 간찰. 1899년 9월에 이승학(李承鶴)이 아들 이광수(李光秀)에게 문중의 족보 소식과 집안일에 대한 당부를 전한 편지이다. 4차례나 편지를 보냈는데 받았는지를 확인하는 말과 집안 소식이 오지 않아 울적하다는 말과 식구들 안부, 틈틈이 독서는 빠뜨리지는 않고 있느냐는 내용으로 편지를 열었다. 이어 이승학은 예전과 같이 지내며 있으며 밖의 출입을 하지 못하고 시간만 보낸다고 말을 하였다. 이어 남쪽의 소식은 계속 들려오는데 집안 소식만 없다고 걱정했다. 당시 동학도의 봉기, 일본과 러시아 등의 외세가 기승을 떨치고 있는 현실에서 이승학은 진퇴양난의 상황에 직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어 현재 이승학이 관여하고 있는 문중 문제를 상세히 전했다. 지난달 8월에 도동(桃洞) 어른과 작별한 후에 오늘 아침 동지(冬至) 다례(茶禮)에 그분과 함께 참석했는데 이승학에 대한 오해를 푼 것 같다고 전했다. 이어 부안(扶安) 가문 및 문중 각파의 동향, 대군파(大君派)의 별보(別譜)를 모두 원보(原譜)에 들인다고는 내용 등을 자세히 실었다. 1890년 무렵 고종의 명으로 왕실 족보인 ?선원보?를 편찬하게 되었는데, 완순군(完順君) 이재완(李載完)이 주도하였다. 이승학 가문은 양녕 대군(讓寧大君) 아들인 이개(李塏) 계열에 속하였으므로 족보 편찬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편지 하단에는 집안일에 대한 당부 등을 적었다. 이승학은 앞으로의 일정이 정해지지 않아 자못 고통스럽다는 말 등을 전하며 지난번 사용한 비용 처리 문제, 아버지 이최선(李最善)의 기일이 가까워지는데 객지에 있어 걱정이라는 내용, 마침 능주(綾州)의 족인(族人)을 만나 그편으로 편지를 붙인다는 내용 등을 실었다. 이승학(1857∼1928)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이며, 자는 자화(子和), 호는 청고(靑皋)이다. 전남 담양(潭陽) 장전리(長田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인 진사 이최선(李最善)이고, 이승학 본인도 기정진의 문하에서 배웠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팔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집으로 ?청고집(靑皋集)? 4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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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家兒今日寄書凡四度次次入抵否直也不來家信未聞甚爲菀菀大抵近皆無事瑣瑣世務無遺而暇及對冊否吾爲老矣爲汝光陰豈不懸念也父客狀依前日而尙不出入度日苐俟日去而已南來消息陸續而但無家信泄泄桃洞則去月作別後今朝始參冬至茶禮而座擾不及他語聞中間所傳則桃台漸有解惑於吾云耳扶安族丈二員今始來到松禾則姑無影闇未知何故也他派則日至而今譜大君派別譜皆入原譜云云未知下回如何而果不分淆雜極矣不干爲上耳驢子姑不賣去留未定故而亦頗苦矣路中窃發近稍止息云京中在在而近無所聞耳向者所用皆以今念爲約者而已爲抖擻拮据否先父君忌日隔邇而身在客地哽塞而已適逢綾州族人暫付數語想信傳矣不具己亥菊至日卽陰曆卄日父欠三□新郞皆有來去而今冬有願請新婦禮家乎是甚關念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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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山山房讀書榥月前長鬚還以數寸紙仰候幸免洪喬浮沈則伏想早落仙榥不鄙入覽耶弟歸臥江上煎茗消日每雪霽曉月明取兄詩曼歌志士於今淚不窮句不能自禁淚泣數行下何時梅五堂橫籌扈隨謔浪在今便千古伏聞近日同隱淪同志六七入山房多讀古人書千萬卷有時曳杖穿屩逍遙秋南名山水奇絶處或恨少一人沙上奇元直否輒憶至此好酒萬斛不能沃熱腔千曲晦根亦同牕否明春春三月草茸茸江柳細時一面分明在眼兄勿改圖弟日與龜東爲邛邛耳餘只祝雪寒多讀勿病復之卄八日弟奇應度拜兄則名如司馬仁如破鏡諒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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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기우만(奇宇萬)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丁未二月四日 奇生宇萬 丁未二月四日 奇宇萬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07년 2월에 奇宇萬이 보낸 간찰. *상태: 상단이 찢김 *원문: 向別時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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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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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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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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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학(李承鶴) 간찰(簡札) 8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閏八卄四日 父 閏八卄四日 李承鶴 李光秀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이승학(李承鶴)이 서울에 기거하는 아들에게 여러 가지 소식과 당부를 전한 간찰. 이승학(李承鶴)이 서울에 기거하는 아들에게 여러 가지 소식과 당부를 전한 편지이다. 편지 서두는 편지의 전달 여부와 답장을 기다린다는 말로 채웠다. 이승학은 이달 7월에 우체국으로 편지를 보내고 이후로 인편이 없어 부치지 못하고 있다가 이씨(李氏) 친구 편에 편지를 보냈는데 아직 답장이 없어 답답하다는 말을 전하며 아들 소식을 바라는 마음을 드러냈다. 이어 겨울이 깊어가는 생활은 어떠하냐며 묻고, 겨울 채비를 위해 침구류 등을 순도(順道)에게 보낸다는 말을 전했다. 다음으로 문중에서 간행 중인 것으로 짐작되는 족보(族譜)에 관한 내용이 이어진다. 족보의 진행은 어떠하며 정서(正書)는 마쳤는지 묻고, 지난번 순천(順天) 종인(宗人)의 일은 담양의 백동(栢洞) 족숙(族叔)이 변통하여 처리할 방도가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다면 투필(投筆)하고 물러나 후일의 구설을 면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어 문중의 갈등과 관계된 일을 처리할 때는 더욱 신중히 하고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며 신신당부한 내용이 보이는데, 아마도 이광수가 문중의 족보 일에 관여하고 있었는데 문중에서 적지 않은 갈등이 있었던 듯하다. 이승학은 아들이 곧 볼 과거 시험을 언급하기도 했다. 다음 달에 네가 소원하던 바가 있을 것인데, 합격 여부는 운수와 관계된 것이지만 사람의 일이기에 전력하다 보면 성취할 수 있으니 기회를 놓치지 말라며 시험을 앞둔 아들의 마음을 달래주기도 했다. 아들의 안부를 두루 물은 다음 이승학은 본인의 최근 근황을 상세히 알렸다. 이달 15일에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선생이 강회(講會)에 참석하려고 왔는데 유생(儒生)들의 참여가 적어서 강회를 열지 못하고 향음주례로 대신했다는 것, 이승학이 갑자기 찬례(贊禮)를 맡게 되었다는 것, 연재 선생을 모시고 내장사(內藏寺)를 방문했다는 내용 등을 두루 전했다. 스승이자 인척(姻戚)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집안의 장례 일에 관한 소식도 알렸다. 장삿날이 모레 있는데, 묘소가 담양(潭陽) 용추사(龍湫寺) 부근으로 잡았으며, 내일은 상례 행차가 우리 쪽 경계를 지난다는 것이다. 그때 본인이 장례에 참석하여 역부(役夫)들에게 술을 대접할 예정이라고 하였다. 집안의 혼례 소식도 알렸다. 장성(長城) 봉덕(鳳德)으로 시집가는 딸의 우귀(于歸, 신부가 처음으로 시집에 들어가는 일) 날짜가 다음 달 27일로 정해졌는데, 기씨(奇氏) 사위를 아직 보내지 않고 있으니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다면 속상함을 드러냈다. 이승학은 장녀를 기우만의 손자인 기낙도(奇洛度)에게 시집보냈고, 차녀는 기재(奇宰)의 손자인 기인도(奇人度)에게 시집보냈는데, 이때 언급한 신랑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이어 이승학은 딸을 시댁에 보내면서 준비할 물건들에 대한 걱정을 드러냈다. 특히 홍롱(紅籠)과 승혜(繩鞋, 미투리), 면구(緬具)는 서울에서 준비하려고 하여 돈이 모이면 순도(順道)와 상의하여 구할 계획이라는 말과 수침(水砧)이 팔리지 않아 갈등을 겪고 있다고 덧붙였다. 친인척과 관련된 황당한 사건에 대해 전한 내용도 확인된다. 지난달 말에 하동(河東) 횡월리(橫月里)에 사는 월초(月樵) 어른이 이곳으로 왔다가 장성(長城) 쪽으로 갔는데, 그 어른과 작별하면서 들었는데, 봉덕의 자인(子仁)이 논 판 돈 300냥을 그 아버지께 고하지도 않고 가지고 떠나버렸다는 것이다. 이 일에 관해 이승학이 당부하기를 만일 자인과 서울에서 상봉한다면 충효(忠孝)의 도리로 잘 회유하라고 전했다. 편지 하단은 보채(報債) 및 문중의 서당 등에 관한 내용, 아들이 부탁한 비용 마련에 대한 어려움, 족보의 명하전(名下錢) 문제, 윤홍(允弘) 숙질(叔姪)에 관한 당부, 본관(本官)의 수령에 관한 내용 등을 언급했다. 이 편지는 필사본으로 보인다. 편지 상단에 먹선으로 두 줄을 지운 흔적 등이 있고, 편지지 앞뒷면으로 내용이 채워진 것으로 보아 집안에서 필사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 편지 작성 일자가 '윤달 8월 24'로 적혀졌으나 내용에는 '서리의 위력이 높아지고 추위가 점점 심해진다'는 말로 보았을 때 이 편지는 여름에 작성된 것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몇 편의 편지 내용을 모아 수정하여 필사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 간지가 생략된 채 일자가 적혀 있어서 연도를 잘 알 수 없으나 이광수가 과거 시험을 앞두고 있다는 말과 윤월(閏月)이라는 내용 등으로 보아 1900년에 쓰인 내용으로 추측된다. 이광수는 1901년에 경의문대(經義問對) 시험으로 성균관(成均館) 박사(博士)가 되었다. 1900년은 이광수가 시험을 보았던 해이고, 이해 8월에 윤달이 들었다. 이승학(1857∼1928)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양녕대군의 후손이며, 자는 자화(子和), 호는 청고(靑皋)이다. 전남 담양 장전리(長田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인 진사 이최선(李最善)이고, 이승학 본인도 기정진의 문하에서 배웠다. 아들 이광수(李光秀)는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제자이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팔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집으로 ?청고집(靑皋集)? 4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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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학(李承鶴) 간찰(簡札) 7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七月初吉 父 寄家兒 七月初吉 李承鶴 李光秀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모년 7월에 이승학(李承鶴)이 아들 이광수(李光秀)에게 문중(門中) 문제 등 서울에서 겪은 여러 가지 소식을 전한 간찰. 모년 7월에 이승학(李承鶴)이 아들 이광수(李光秀)에게 문중(門中) 문제 등 서울에서 겪은 여러 가지 소식을 전한 편지이다. 지난달 말에 금강산(金剛山)에서 서울로 들어와서 26일에 우체국으로 편지를 부쳤는데 잘 전달되었는지 확인하면서 편지를 시작했다. 이어 집안 식구들은 별 탈 없는지, 농사는 어찌 되었는지 궁금해했다. 남쪽 사람들이 올해 풍년이 들 조짐이 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하냐며 기대감을 표했다. 이어 이승학이 겪은 일들을 낱낱이 알렸다. 서울에서 5일을 머물다 엊그제 밤에 도동(桃洞, 서울 소재)으로 수성부부인(隋城府夫人)의 기제(忌祭)에 참석했는데, 비 때문에 문중 어른들이 몇 명밖에 오지 않았다고 하였다. 수성부부인은 양녕 대군(讓寧大君)의 배위(配位)로, 광산김씨(光山金氏) 김한로(金漢老)의 따님이다. 이 기제에서 전주이씨(全州李氏) 가문의 억울한 일에 대해 자세히 논의하였는데, 지금 때를 놓치면 안되기 때문에 귀향하여 문중 회의를 하겠다고 하고, 양녕 대군의 사적을 기록한 ?지덕지(至德誌)?를 가지고 간다고 알렸다. 이승학이 언급한 억울한 일이란 양녕대군의 후손인 순성군(順城君) 이개(李?)의 배우자와 관련된 것을 말한 듯하다. 1899년에 종정원 경(宗正院卿) 이재완(李載完)이 고종에게 요청하여 ?선원보(璿源譜)?를 수정하고자 했다. 이때 오랫동안 논란이 되었던 전주이씨 양녕 대군 계열의 문제가 드러난 것이다. 이전에 만들어진 ?선원가현록(璿源加現錄)?에서 양녕 대군 이제(李禔)의 아래에 '순성군(順城君) 이개(李?)의 첩(妾)의 맏아들 오천군(烏川君) 이사종(李嗣宗)'이 라고 기재되어 있고, ?선원속보(璿源續譜)?에는 오천군 이사종의 기사 옆에 주석(註釋)을 달기를, '어머니인 연일 정씨(延日鄭氏)는 참의(參議) 정종성(鄭宗誠)의 서녀(庶女)이다.'라고 기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오천군 후손들은 나라의 문헌과 개인 문헌들을 통해 연일 정씨가 서녀라는 사실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종성의 아들 정보(鄭保)가 사육신 사건에 연루되어 온 집안이 모두 반역자로 몰리자 순성군의 처도 첩으로 강등(降等)되었다는 것이다. 옛 ?선원록(璿源錄)』에 순성군이 연일 정씨에게 정식으로 장가들었으며, 또 순성군은 첫 부인 신씨(申氏)와 같은 산기슭에 따로 장사지내고, 후실인 정씨는 순성군과 함께 나란히 쌍무덤으로 장사지냈다고 씌어 있으니 정씨가 순성군의 첩이 아니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는 것이다. 이승학을 포함한 이개 계열 사람들은 당시 ?선원보? 편찬을 계기로 연일 정씨가 정식 처(妻)라는 것을 분명히 밝혀 억울함을 씻고자 했다. 계속해서 이승학은 그간의 일정을 자세히 적었다. 과천(果川)으로 길을 잡아 궁촌(宮邨)으로 들어갔으나 비를 만나 지체되었는데 마침 소산(小山)으로 가는 인편이 있어 편지를 부쳤다고 하였다. 또 노잣돈에 대한 어려움이 적지 않아서 강화(江華)로 가지 못한다는 내용, 오늘 과천으로 가서 성묘한 후에 내일 곧바로 내려가면 보름 전에 집에 도착할 수 있겠다는 내용, 능주(綾州) 어르신께서 좌천된 것은 우리 가문의 불행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며 안타까움을 전한 내용 등이 확인된다. 이 편지는 간지가 생략된 채 월과 일만 표기되어 있어서 쓰인 연도를 잘 알 수 없다. 편지에 실린 문중 문제 등의 내용으로 짐작건대 ?선원보? 수정이 결정된 1899년 이후의 편지일 것으로 추측된다. 이승학(1857∼1928)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양녕대군의 후손이며, 자는 자화(子和), 호는 청고(靑皋)이다. 전남 담양 장전리(長田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인 진사 이최선(李最善)이고, 이승학 본인도 기정진의 문하에서 배웠다. 아들 이광수(李光秀)는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제자이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팔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집으로 ?청고집(靑皋集)? 4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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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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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皮封]寄家兒書南門外 伊門洞今月七日付郵遞書得見否此後無便付字矣□里李友持來書卽見而計日則此月無聞可菀耳旅狀槪如前乎霜威已高寒事漸緊旅館經過必難褥子急求一舛覆藉免致生病衣服今因順道便付送必則抵矣譜役今至如何正書已畢乎頃以順天宗人事專爲發書者以永五族之故也而此果與栢洞族叔有別區處之道耶不然則投筆自退以免後日之唇舌可也一門之伺隙在此十分重愼不可輕忽須知此意焉京中近耗又未知如何汝之所望在來月云則雖繫身運謀事則在人事到十分地頭專力於此可以成矣勿歇后失時焉家間近皆無故耳苐以講會在於今望而淵齋丈來臨云故吾亦與章伯諸人進參而以其章甫之數黟講不得設代行鄕飮禮吾以贊禮猝難辭避不得已筆行耳翌日陪向內藏寺又留一日而拜送矣松沙襄日在再明而新作則此邑之北龍湫寺後云明日喪行過潭市邊而旣入吾境人事又異略掇數行文明將早發酹奠隨往會葬瀉醪或海又饋役夫計耳鳳德于日以來月念七擇來而奇郞尙不送來未知何故然于行不得不送之而凡具之未備者太多窘必甚矣紅籠與繩鞋自京得送而得錢則與順道相[背面]議其回便付送緬具亦如是焉此是好便而近無措手不得先換送之耳水砧尙不得賣此亦葛藤奈何前月末月橫月樵丈來此向鰲山月初還來作別于福川而歸矣其時聞鳳德子仁持其賣沓錢三百兩不告其親而浮海去云或抵京否若入京則必相逢而善誘之告其忠孝之道爲汝之道且聞其家少年又有二人去者聞甚可驚耳田夷今聞順道說果是不去而達中之每每見欺如是矣前者兩書使之覓去而又未知如何也先事旣成後自京雖爲區處此中報債必無期限矣今日又爲門會云而吾以事不得去聞其消息則一邊皆如前不參云或傳究竟未晩或傳書堂錢不可入此云自門中專當可也云云畢竟事未知如何耳京中所費錢向聞有急奇云云雖欲更收而周看無一應者且夏間名下錢齊或尙不收捧而又此收錢事必不成故吾亦中止而使之待後云大抵譜成下後必皆結梢矣允弘叔侄去已久矣必不同處或間間相見否通心則必不爲汝亦知此爲之聞其取齋節如拾地芥今至如何云耶本倅聞已免本官而尙在風高民情益惑他不一一耳閏八卄四日父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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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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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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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891년 이승학(李承鶴)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辛卯至月卄九日 族下 承鶴 辛卯至月卄九日 李承鶴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91년 11월에 이승학(李承鶴)이 족인(族人)께 안부를 전하고 과거(科擧) 등의 서울 소식을 물은 내용의 간찰. 1891년 11월에 이승학(李承鶴)이 족인(族人)에게 안부를 전하고 과거(科擧) 등의 서울 소식을 물은 내용의 편지이다. 이승학은 편지 첫머리에서 족인에 대한 그리움을 표했다. 지난 1년간 곁에서 지내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그때를 회상해 보니 꿈만 같지만, 항상 마음속으로 떨치지 않고 있다고 하였다. 이 구절을 보면 이승학이 서울에 있는 동안 이 족인의 집에서 머물렀거나 근처에서 지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승학은 과거 시험을 위해 1890년 9월에 서울로 가서 근 1년간을 지냈다. 이어서 이승학은 벼슬길에 있는 족인과 그 아들의 안부를 묻고 서울 상황을 두루 확인하였다. 지난번 여관(汝寬) 족인의 편지에 녹림(綠林, 반정부 세력)의 혼란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이는 매우 놀라운 일로 도시에서도 이러한데 외방(外方)의 경우는 어떠하겠느냐며 세상의 변란을 근심하였다. 계속해서 이승학은 자신의 최신 상황을 전하였다. 본인은 추위(秋圍, 가을 향시(鄕試))에 낙방했는데, 이는 명운(命運)이기도 하지만 소홀히 준비했기에 빚어진 결과라며 반성하기도 했다. 또 귀향하고서 비 때문에 병을 얻어 고생하고 있다는 안부를 전하고, 경향(京鄕)에 있는 족인들이 추향(秋享)에 참석을 많이 하지 않았다는 말을 전하며 문중 일을 걱정하기도 했다. 이승학이 과거 시험 일정을 묻는 내용도 보인다. 그는 내년 봄에 증광시(增廣試)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하면서 과연 그러한지 확인했다. 본인은 과거를 포기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진작(振作)할 기운도 없다며 탄식과 미련을 드러내기도 했다. 편지 말미에서 여관(汝寬) 족인에 대한 안부를 묻고 인편이 없어 편지를 올리지 못하고 있다고 죄송한 마음을 전하고, 씨 뺀 솜 2근을 함께 보낸다는 말을 추신으로 적었다. 이승학(1857∼1928)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양녕대군의 후손이며, 자는 자화(子和), 호는 청고(靑皋)이다. 전남 담양 장전리(長田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인 진사 이최선(李最善)이고, 이승학 본인도 기정진의 문하에서 배웠다. 아들 이광수(李光秀)는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제자이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팔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집으로 ?청고집(靑皋集)? 4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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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근현대문서

1923년 이승학(李承鶴) 영수증(領收證) 1 고문서-명문문기류-근현대문서 경제-회계/금융-영수증 大正十二年七月五日 全羅南道潭陽郡農會長 大正十二年七月五日 全羅南道潭陽郡農會長 李承鶴 전남남도 담양군 潭陽郡農會長 2顆(2.4×2.4)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23년에 전라남도담양군농회(全羅南道潭陽郡農會)에서 이승학(李承鶴)에게 발급한 농회비 납입통지서와 영수증. 1923년도 농회비(農會費) 납부를 위해 전라남도담양군농회(全羅南道潭陽郡農會)에서 창평면(昌平面) 장화리(長華里)에 사는 이승학(李承鶴)에게 발급한 납입통지서와 영수증이다. 이 문서는 좌면에 납입통지서, 우면에 영수증으로 구성되었으며 담양군농회장 명의로 발행했다. 7월 5일에 발급한 납입통지서를 보면 1923년도 농회비로 이승학에게 고지한 금액은 4원(円) 28전(錢)이며, 납입기한은 7월 30일까지이다. 담양군농회는 일제강점기 중앙농업단체인 조선농회(朝鮮農會)의 지부로 보인다. 조선농회는 1906년에 일본인 농상공부 관리 및 농업경영자 등이 조직한 한국중앙농회를 기반으로 하였으며, 한일합방 이후 조선농회로 명칭을 변경했다. 이 단체는 농사 및 양잠, 축산, 기타 산업 등의 개량으로 인한 생산성 향상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그런데 1920년대에 들어서 소작쟁의 및 농민운동이 점차 고양되자 일제는 이를 대처하고 식민지 지주제의 안정과 확대, 수탈의 정당성을 가지기 위해 1926년에 '조선농회령'과 '조선농회령시행규칙'을 제정, 반포하면서 기존의 농업단체들을 통폐합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조선농회는 새로 조직된 조선농회에 업무를 인계하고 1927년 4월 3일에 해산되었다. 영수증을 수령한 이승학(1857∼1928)은 본관이 전주(全州)이며, 자는 자화(子和), 호는 청고(靑皋)이다. 전남 담양(潭陽) 장전리(長田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진사 이최선(李最善)이고, 어머니는 성주이씨(星州李氏) 이기대(李箕大)의 딸이다.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이며,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다. 1889년에 백의(白衣)로 왕궁에 나아가 대책(對策)으로 천하의 병통에 관해 진술했고,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팔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고 금성산(錦城山)에 제사를 지내면서 국조(國祚)의 융성을 빌고, 진(陣)을 광주(光州)로 옮겨 서울로 진격할 태세를 갖추었는데, 조정에서 선유사(宣諭使) 신기선(申箕善)을 보내 임금의 명으로 타이르자 분개를 참아내고 군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문집으로 ?청고집(靑皋集)? 4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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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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