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학(李承鶴) 만시(輓詩)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地上友 李承鶴 李承鶴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이승학(李承鶴)이 1918년에 작고한 춘담(春潭) 기동준(奇東準) 선생을 위해 지은 만시(輓詩). 이승학(李承鶴)이 1918년에 작고한 춘담(春潭) 기동준(奇東準) 선생을 위해 지은 만시(輓詩)이다. 만시의 앞 구절은 송사(松沙) 기정진(奇正鎭) 어른의 죽음 뒤로 다시 춘담형을 위해 곡(哭)을 하게 되었으니 스승을 잃은 남쪽 유림의 덕이 외로워지고, 후생들도 돌봐주는 스승이 없어 서글픔이 깊다는 내용을 담아, 이승학을 비롯한 호남 유림의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뒤 구절 내용은 몸은 옷조차 못 이기는 듯 말은 더듬는 듯하고, 지(志)는 기(氣)를 잘 통솔하여 경(敬)을 실정으로 삼았으며 평생토록 신근(辛勤)의 뜻을 수립했으니 그 영향력이 우산(牛山)으로 떨어져 명월(明月)로 우뚝하다는 것으로, 춘담 선생의 평소 인품을 찬탄하고 그 영향력이 영원할 것임을 드러낸 구절이다. 우산은 우산정사(牛山精舍)를 가리키는 듯하다. 이 정사는 현재 광주(光州) 효령동 종방마을에 있는 정사로 송은(松隱) 기정륜(奇梃崙, 1663~1740)이 학문을 가르치던 곳인데, 후손인 춘담이 이곳에 기문(記文)을 남겼다. 기동준(1869~1918)의 본관은 행주(幸州)이며, 자는 평중(平仲), 호는 춘담(春潭)이다. 1860년 기대승(奇大升)의 후손인 창현(昌鉉)의 아들로 광주(光州) 광곡리(廣谷里)에서 태어났다. 18세에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 들어갔다. 1880년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과 만났으며,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을 기리는 모임에 참여하는 등 유림 활동에도 활발했다. 1894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가지지 않고, 후진 양성에 전념하여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이승학(1857∼1928)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양녕대군의 후손이며, 자는 자화(子和), 호는 청고(靑皋)이다. 전남 담양 장전리(長田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인 진사 이최선(李最善)이고, 이승학 본인도 기정진의 문하에서 배웠다. 아들 이광수(李光秀)는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제자이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팔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집으로 ?청고집(靑皋集)? 4권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