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년 이승학(李承鶴) 간찰(簡札) 1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己亥正月卄九 父答 答川兒 己亥正月卄九 李承鶴 李光秀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전주이씨추성수파중중 편, ?전주이씨추성수파보(全州李氏秋城守派譜)?, 낭주인쇄사, 1990 이승학, ?청고집(靑皐集)? 1899년 4월에 이승학(李承鶴)이 강학소에 머물면서 이광수(李光秀)에게 시국 상황을 전하고 여러 가지 집안일을 당부한 내용의 간찰. 1899년 4월에 이승학(李承鶴)이 강학소에 머물면서 이광수(李光秀)에게 시국 상황을 전하고 여러 가지 집안일을 당부한 내용의 편지이다. 문을 나서면 난리를 만나게 되는 상황이라 집에 있는 자는 객지에 있는 가족을 걱정하고, 객지 가족은 집의 가족을 근심하는 때라고 한탄 섞인 말로 편지를 열었다. 이어 아들에게 여러 가지 집안일에 대한 처신을 알려주었다. 갑오년(1894)의 난리를 겪은 뒤로 두려움이 남아 있어 더욱 염려된다고 하면서 아들에게 당부하기를 밖에서 들려오는 풍문을 함부로 듣지 말되, 지나치게 놀라지 말고 법도에 알맞게 처리토록 하였다. 또 만일 위급한 경보가 오면 집안을 지키기 어려우니 예전과 같이 처리하라고 하고, 저 동학교도(東學敎徒)의 기세의 여부를 관망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갑오년에 동학교도가 분기했을 때 이승학은 가족을 이끌고 방장산(方丈山)으로 이들을 피해 있었다. 이승학은 동학도들의 형세가 아직 사그라지지 않았으니, 혹시 위기가 닥쳤을 때 갑오년 당시에 처신한 것과 같이 가족을 이끌도록 당부한 것으로 보인다. 또 편지에서 이르기를 많은 식구가 실업(失業)하게 되면 구렁에 버려질 위험이 있기에 제때 맞춰 농사를 짓도록 하라고 하면서 만일 있을 소요를 대비토록 인도했다. 산송(山訟)은 결말이 났는지를 묻고 만일 뜻대로 되지 않았다면 우선 그대로 두라고 하면서 집안의 대소사를 세세히 챙겼다. 이승학은 동학교도에 대해서도 아들에게 자세히 전했다. 그는 동학교도를 무뢰한이라는 의미의 '비도(匪徒)'라고 칭하면서 19일 밤에 고부(古阜)을 함락시켜 병장기(兵仗器)를 가지고 갔는데, 이들의 세력이 무려 수천만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수백만을 넘지 못한다고 하였다. 또 전주의 병사와 교전하다가 그 한 부대가 22일에 태인(泰仁)에 머물러 후군(後軍)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데 자세한 내막까지는 알 수 없으나 시급히 공격할 뜻은 없는듯하다고 전했다. 지금 나라의 계책으로 보았을 때 조금도 느슨하게 해서는 안 되는데도 자신은 세월을 지켜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라고 했다. 편지 하단에는 이승학의 근황을 전한 내용으로 채워졌다. 이승학은 동산에서 유씨(柳氏)가로 옮겼다가 행단(杏壇, 강학소)에 이르러 길의 소식을 탐문하고 최문창(崔文昌), 최치원(崔致遠)의 영상(影像)에 배알 하고 고현(古縣) 송정(松亭)의 김씨(金氏) 집안에 머물고 있다고 하면서 자세한 이동 경로를 알려 아들을 안심시켰다. 또 앞으로 도망할 염려는 없을 것이나 간혹 있더라도 담대하게 처신한다면 크게 일이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능주(綾州)의 환전(換錢) 일은 지금 상황을 보았을 때 반드시 이행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면서 만일 온다면 동암(峒菴)으로 기별하라고 전하였다. 피질(披姪) 편에 편지를 보낸다고 하면서 편지를 끝마쳤다. 이승학(1857∼1928)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이며, 자는 자화(子和), 호는 청고(靑皋)이다. 전남 담양(潭陽) 장전리(長田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인 진사 이최선(李最善)이고, 이승학 본인도 기정진의 문하에서 배웠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팔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집으로 ?청고집(靑皋集)? 4권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