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종(李宅鐘) 시(詩) 고문서-시문류-시 교육/문화-문학/저술-시 歲在丁酉重九月 綾留 宗人 宅鐘 玉山宗氏 歲在丁酉重九月 李宅鐘 李光秀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97년에 이택종(李宅鐘)이 족인(族人) 이광수(李光秀)에게 올린 화답시(和答詩)와 시서(詩序). 1897년에 이택종(李宅鐘)이 족인(族人) 이광수(李光秀)에게 올린 화답시(和答詩)와 시서(詩序)이다. '옥산(玉山) 종씨(宗氏)에게 화답하며'라는 시 제목이 나오고, 이어 이 시를 짓게 된 배경의 서문이 자세히 실렸다. 동종(同宗)을 화수(花樹)라고 하는 이유는 한 뿌리에서 나와서 번성하여 천 개의 가지와 만 개의 잎이 되기에 뿌리로 말하면 본(本)이라고 할 수 있으며 가지와 잎으로 말하면 말(末)이 된다고 하고, 역(易)의 원리를 이용하여 자세히 설명하면서 동종의 일체성을 강조한 내용이 나온다. 이어 전주이씨(全州李氏) 사람들이 경향(京鄕)에 흩어져 살아 각기 빈부(貧富)와 궁통(窮通)의 차이는 있지만 대대로 화목한 것은 장공예(張公藝)의 구세동거(九世同居)와 같고, 범중엄(范仲淹)이 의전(義田)을 마련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장공예는 중국 당(唐)나라 사람으로, 9대가 함께 동거하여 북제(北齊), 수(隋), 당(唐) 등 세 왕조에서 그 집에 정표(旌表)를 내렸다. 당나라 고종이 친족 간에 화목하게 지내는 방법을 묻자, 그가 지필묵을 꺼내어 참을 인(忍) 자 100여 자를 써서 올렸더니, 고종이 훌륭히 여겨 비단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범중엄은 송나라 명재상으로 고향인 오중(吳中)에 좋은 전지(田地) 수천 묘(畝)를 사들여 그 조를 거두어 저축해 두었다가 족인 중에 혼가(婚嫁)나 상장(喪葬)을 치르지 못하는 자에게 공급해 주었다. 서문에서 계속해서 말하기를, 지난번 부친 이범학(李範學)이 창평 현령(昌平縣令)으로 계실 때 담양(潭陽)의 제종(諸宗)과 이웃하였는데 그동안 경향으로 멀리 떨어져 모이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고 하였다. 1896년에 이택종이 아버지를 찾아뵈었을 때 부친과 담소를 나누는 이를 보았는데, 그가 이광수였다는 것이다. 이광수의 논의는 정확했으며, 식견이 넓은 것을 보고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는 하였다. 이 만남으로 한편으로는 이백(李白)이 화창한 봄날 형제들과 복사꽃 오얏꽃이 핀 정원에서 술자리를 벌이며 즐겁게 놀았던 것처럼 종족 간의 만남을 성사시킬 수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붕우(朋友)가 함께 학문을 강습하여 서로 이익을 주는 이택(麗澤)의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하며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다. 이후 올해 5월에 부친께서 능성(綾城)으로 임지를 옮겨와 서로 이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열흘 안에 오갈 수 있는 멀지 않은 거리이지만 그 서글픔은 멀리 떨어진 자들과 다르지 않다고 하였다. 그러던 중에 이번에 이광수로부터 서문(序文)과 시(詩)를 받아 매우 감동했고 감사함을 전하며 창화(唱和)가 없을 수 없다면서 시를 함께 보낸다고 하였다. 이광수에게 부친 칠언율시(七言律詩)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대한 재덕(才德)을 지닌 이광수의 명성은 간담(肝膽)을 기울이게 하고, 중양절(重陽節)의 약속을 꿈속에서도 그리워한다고 하며 만남에 대한 갈증을 드러냈다. 이어 깊어가는 가을밤에 풀벌레 소리 들리고 찬 하늘에 성(城) 위로 솟은 달빛을 보며 다시금 그리움이 깊어짐을 전했다. 마지막 구절에서는 매번 화수(花樹)를 말하며 그 뿌리를 떠올리는데 높은 북두성에서 기러기 소리 들려온다고 하며 이광수가 전해 온 편지에 대한 고마움을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