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1년 오시유(吳時裕)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辛丑十二月日 全羅道列邑儒生進士 吳時裕 等 111名 巡御使道 辛丑十二月日 [1781] 吳時裕 巡御使道 巡撫御使[着押] □…□ 5顆(7.0x7.0) 전남도청(2019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781년(정조5) 12월에 전라도(全羅道) 진사(進士) 오시유(吳時裕) 등 111명이 순어사또(巡御使道)에게 이지득(李止得)의 충절에 대해 표창해 주길 청하는 상서(上書) 1781년(정조5) 12월에 진사(進士) 오시유(吳時裕) 등 전라도 열읍(列邑) 유생(儒生) 111명이 연명으로 순어사또(巡御使道)에게 이지득(李止得)의 충절에 대해 표창을 청하는 상서(上書)이다. 나주 진사 오시유 등 총 111명의 전라도 여러 고을의 유생들이 나주의 사복(司僕) 이지득(李止得, 1555~1594)의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 사실을 서술하면서 그의 충절이 이와 같이 뛰어남에도 지금까지 포상의 은전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이 사실을 임금님께 아뢰어 포정(褒㫌)의 은택을 입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순어사또는 '이공의 충절은 매우 흠탄할 만하나 다만 임금께 글로 아뢰는 것은 중대하니 이조에서 마땅히 헤아려서 할 일'이라는 처분을 내렸다. 상서에 연명한 이들은 나주, 광주, 영광, 함평, 능주, 창평, 담양, 화순, 장성, 남평 등 나주 인근 지역에 사는 유생들이다. 이지득의 충절 포창과 관련하여 1863년 2건의 문서가 있으며, 1893년에는 함평이씨 삼부자의 표창을 요청하는 문서가 함께 남아있다. 이지득(李止得, 1555~1594)의 자는 덕보(德甫), 본관은 함평, 함풍군 극명(克明)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이유회(李惟誨)이다. 나주시 다시면 영동리 초동에서 태어났다. 1584년(선조 17) 별천(別薦)으로 겸사복(兼司僕) 내승(內乘)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임금이 파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군량을 모아 행재소로 가서 남으로 내려오기를 청하고 돌아왔다. 1594년(선조 27)에 사재를 털어 군량미로 공급하였고, 장경홍(張景弘)ㆍ장경남(張景男) 형제와 의병을 모아 활동하다가 흥양포(興陽浦)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1892년(고종 29) 충신정려(忠臣旌閭)가 내려 졌고, 병조참의에 증직되었다. 현재 나주시 다시면 영동리 초동마을에 이지득의 정려각인 포충각(褒忠閣)이 있다. 상서(上書)는 조선시대 민원서(民願書)인 소지류(所志類)로 그 서식은 다른 소지류와 약간 다르다. 이 문서는 관찰사·수령·암행어사 등에게 올리며, 그 내용은 산송(山訟)과 효행(孝行)·탁행(卓行)의 정려(旌閭)를 위한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인원이 많은 경우는 연명하여 올리기도 한다. 이 상서는 전래되고 있는 것이 많으며, 시대는 대개 조선 중기 이후에서 말기까지의 것이 대부분이다. 상서를 접수한 관찰사나 수령은 이를 검토하고 그 처분을 문서의 좌편 하단의 여백에 써놓는다. 이것을 제음(題音) 또는 제사(題辭)라 한다. 이와 같이, 처분한 내용을 써서 상서를 올린 사람에게 돌려준다. 그러나 수령에게 1차 올려서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2차, 3차 계속 올리며, 그래도 해결되지 않으면 관찰사에게 올리게 된다. 이러한 상서는 당시의 사회사정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