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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1924년 이승학(李承鶴) 영수증(領收證) 04 고문서-명문문기류-근현대문서 경제-회계/금융-영수증 大正十三年八月卄五日 昌平面森林組合長 潭陽郡 昌平面 長華里 李承鶴納 大正十三年八月卄五日 昌平面森林組合長 李承鶴 전남남도 담양군 □…□(타원형)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24년에 창평면삼림조합에서 이승학에게 발급한 죽림조합비 영수증. 1924년 8월 25일에 창평면삼림조합(昌平面森林組合)에서 담양군(潭陽郡) 창평면 장화리(長華里)에 사는 이승학(李承鶴)에게 발급한 영수증이다. 이 문서는 창평면삼림조합장 명의로 발행했다. 이승학이 납부한 금액은 1924년도 죽림조합비(竹林組合費) 1원(員) 50전(錢)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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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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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1927년 공문(公文) 기록 고문서-치부기록류-역사기록 사회-역사-역사기록 丙寅十二月十一日 丙寅十二月十一日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26년에서 1927년에 이승학가에 온 세금 및 조합비 등의 공문. 세금 관련된 공문이나 지출 사항과 관련된 것을 날짜별로 표기 *상태: 1926년 12월 11일에서 1927년 1월 27일까지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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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공문(公文) 기록 고문서-치부기록류-역사기록 사회-역사-역사기록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27년 1월 27일에서 3월 7일까지 이승학가에 온 세금 및 조합비 등의 공문. 세금 관련된 공문이나 지출 사항과 관련된 것을 날짜별로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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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潭陽) 전주이씨(全州李氏) 명단(名單) 2 고문서-치부기록류-문중기록 사회-가족/친족-종중/문중자료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담양 전주이씨 가문 사람들의 명단. 담양의 貞面 등 소속된 인물의 주소가 나열 *원문: 貞面 德谷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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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전서당안(長田書堂案) 고문서-치부기록류-용하기 경제-회계/금융-용하기 甲寅正月日始設 甲寅正月日始設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13년부터 1936년까지 기록된 長田書堂 用下記. 담양군 창평면 장전에 소재한 전주이씨 문중 서당 회계기, 마지막에 有司 명단 표기 *자료명은 내표지에 의함 *상태: 성책, 필사본, 66張, 加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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跋(1) 此續修咸平鄕校隨行案也其曰續修者癸酉以上具在校誌自甲戌至今年丙戌入刊故云然案之目有東齋養士齋直員六掌議之别兩齋則一年一付故十三年之間其爲數百三十而間有有故再付者二直員則無常限故纔一遞而其爲員只二六掌議則滿二年一舉故歷吾期而其爲選三十總百六十四然又多一人而重錄於諸案故其實非其數也案旣尊閣於校齋案固自若其必曰刊印者爲其傳之廣也旣曰廣矣則夫使鄕中冠儒服儒之人人者皆得以家弆而戶藏必限於案中人蓋爲任司也繼是而將閱年幾十三刊之又刊傳之又傳然後其爲廣也無際也此其謂事之漸爾歲丙戌窉月 日 訓長月城李弘雨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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跋(2) 裒其衣高其冠博其帶讀其文詩書易春秋習其藝禮樂射御書數明其倫父子君臣夫婦長幼朋友而周旋乎堂陛之際揖讓乎尊俎之間者一卽是所願學夫子之徒也列案諸君子夫孰非其人其事哉優優哉洋洋哉其可觀哉是以難其人於無案之前重其事於有案之後案之爲案其義其大矣哉今其刊案之役聊揚其頌而頌而無規非古道也若夫其裒者窄其高者側其博者狹其讀乖其理其習尙其末其明倍其常則雖日躋蹌乎杏樹之壇風浴乎沂上之水夫子其肯曰吾與哉眞所謂憂無疆也其頌其規非圭興之敢言儘古人之語之遺意也遂書此于尾歲丙戌淸明節 直員上黨韓圭興書編輯兼發行者尹桂炳咸平鄕校明倫堂發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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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1923년 이승학(李承鶴) 영수증(領收證) 6 고문서-명문문기류-근현대문서 경제-회계/금융-영수증 大正十二年十二月十六日 潭陽郡昌平面會計員 朴在昊 昌平面 長華里 李承鶴納 大正十二年十二月十六日 朴在昊 李承鶴 전남남도 담양군 朴在昊(타원형), 潭陽郡昌平面長之印(1.8×1.8)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23년에 이승학이 담양군 창평면에 지세를 납부하고 받은 영수증. 1923년 12월 16일에 창평면(昌平面) 장화리(長華里)에 사는 이승학(李承鶴)이 지세(地稅)를 납부하고 받은 영수증이다. 이 문서는 담양군(潭陽郡) 창평면 회계원(會計員) 박재호(朴在昊) 명의로 발행했다. 이승학이 납부한 금액은 1923년도 제1분기 지세 45원(員) 12전(錢), 지세부가세(地稅附加稅) 12원 18전, 지세부가 13원 53전, 지세할(地稅割) 20원 75전으로 총 91원 58전이다. 이 문서에는 합계 금액을 기입하지 않았다. 문서의 뒷면에는 대덕면 삼림비(森林費) 명목이 수기로 작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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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皮封]李進士宅回納隣客謹謝候經年阻候瞻悵際切伏拜惠狀謹審比來春暢體事萬旺何等仰慰而丈席喪事儒門不幸也小山緬禮定於何處在於郡之漠未聞志耳記下間作錦營之行挾旬往還路得寒疾多日叫苦矣今雖梳洗尙此圉圉而聞家弟痢報而錦行則病情本是疸症又添痰漸元氣澌脫澹語也厭食也不無深慮悶鬱見今瓜期已熟月內否擬賦歸浩然之氣是爲爽然也科日或云因於完和君襄禮退行然其無公文可謂塗說也都政云卅之爲之別無可觀處耳餘留不備謝上庚二月十三記下任百寶二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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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백헌(任百憲)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卽 記下 任百憲 卽 任百憲 李進士宅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임백헌(任百憲)이 이진사댁(李進仕宅)에 시약(試藥) 등에 관한 부탁 등을 전한 내용의 간찰. 임백헌(任百憲)이 이진사댁(李進仕宅)에 시약(試藥) 등에 관한 부탁 등을 전한 내용의 편지이다. 호우(好雨)가 개고 덥고 습해지는 시기에 상대방을 그리워하던 중에 보내주신 편지를 받고 요사이 생활이 두루 좋다는 것을 알고 위로가 되었다는 말로 편지를 시작했다. 이어 본인은 예전과 같은 일들로 고민이 많다고 전했다. 이어 지금 낙하(洛下, 한양)에 평소 친한 벗들이 둘러앉아 시약(試藥) 중인데 자리의 사람들의 말이 정밀하지 않고 믿음도 없으며, 돌아가는 동정을 보니 마땅히 좋지 않다고 하며, 저를 위해 소개해 주기를 간절히 요청했다. 이 구절에서 '나를 위해 소개해 달라'는 말은 무엇을 소개해 달라고 하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편지에서 계속 이르기를, 이제 전교(專敎)해 주시니 매우 감사하지만 일의 사정이 좋지 않으니 어찌할지 모르겠다고 속상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 단락의 '일의 사정' 역시 불분명하다. 또 임백헌은 병증이 나아지는 별다른 기미가 없다고 하며 이 같은 사정을 헤아려서 통기(通奇) 해주도록 부탁했다. 편지가 쓰인 날짜에 '卽'으로만 표기되어서 연도가 불분명하다. 수신인 이진사는 이최선(李最善)을 말하는 것인지, 그의 아들 이승학(李承鶴)을 지칭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임백헌의 본관은 풍천(豐川)으로, 1873년 인제현감(麟蹄縣監)을 맡았고, 1875년에는 창평현령(昌平縣令)에 제수되었으며, 1880년에는 면천군수(沔川郡守)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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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이승학(李承鶴) 간찰(簡札) 3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庚寅臘月十八 父 寄光兒 庚寅臘月十八 李承鶴 李光秀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90년 12월에 이승학(李承鶴)이 아들 이광수(李光秀)에게 경학(經學)의 진척과 학문을 독려하는 내용을 전한 간찰. 1890년 12월에 이승학(李承鶴)이 아들 이광수(李光秀)에게 경학(經學)의 진척과 학문을 독려하는 내용을 전한 편지이다. 편지 서두에는 그리움을 표하고 안부를 묻는 내용을 적었다. 넉 달 동안 서울에 있으면서 얼굴도 보지 못하고 편지도 받지 못해 그리움이 깊다고 전하며 할머니와 어머니를 모시면서 사는 생활은 어떠하며, 경서(經書) 공부에 대한 진척을 상세히 물었다. ?시경(詩經)?은 다 마쳤는지, 그 책을 마쳤다면 ?상서(尙書)?를 읽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책을 읽고 있는지, 그동안 몇 권이나 독파했는지를 물었다. 또 동무들과도 함께 공부하면서 모범이 되고 있는지 물으며 학문을 독려했다. 이어 독서의 즐거움과 중요성에 대해 논하며 재차 학문에 힘쓰기를 바란 내용이 보인다. 독서는 무한한 즐거움이라고 하면서 선대가 이뤄놓은 것을 넓히고 짧은 시간도 낭비하지 말고 힘쓴다면 모든 일이 실상을 따라 나아갈 것이라고 하였다. 이 같은 마음가짐으로 오랫동안 행하다 보면 식색(食色)과 같은 욕망을 좇는 삶에서 멀어져 조금씩 진보가 될 것이고, 이렇게 하지 않으면 유유범범(悠悠泛泛) 하여 이룬 것이 없을 것이라고 하며 학문에 힘쓰도록 하였다. 또 사람은 아버지나 스승, 어른이 옆에 있을 때는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나 홀로 있을 때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기에, 맹자(孟子)가 구방심(求放心)을 말했고, ?대학(大學)?에서 성의(誠意)를 강조했으며, ?중용(中庸)?에서 근독(謹獨)의 중요성을 표했다는 것이다. 경학(經學)에서 이른 이 말들을 한마디로 하자면 '진실한 자리'라고 하면서 아버지가 곁에 없는 지금을 경계하고 점검하라고 당부했다. 장성(長城) 하사(下沙) 편으로 편지를 붙인다고 말을 덧붙이며 편지를 마쳤다. 이승학(1857∼1928)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이며, 자는 자화(子和), 호는 청고(靑皋)이다. 전남 담양(潭陽) 장전리(長田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인 진사 이최선(李最善)이고, 이승학 본인도 기정진의 문하에서 배웠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팔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집으로 ?청고집(靑皋集)? 4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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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년 이승학(李承鶴) 간찰(簡札) 2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辛卯至月十三日 父 家兒見 辛卯至月十三日 李承鶴 李光秀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91년에 4월에 이승학(李承鶴)이 아들 이광수(李光秀)에게 서울살이가 지체된 까닭과 집안일에 대한 당부 등을 전한 내용의 간찰. 1891년에 4월에 이승학(李承鶴)이 아들 이광수(李光秀)에게 서울살이가 지체된 까닭과 집안일에 대한 당부 등을 전한 내용의 편지이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니 그리움이 깊다는 말로 편지를 열고, 아들의 안부와 공부의 진척에 관해 물었다. 이어 이승학은 서울살이가 길어진 연유를 상세히 전달했다. 지난번 동생들의 편지를 보고 귀가 날짜를 정하려고 했으나 과거 시험 상황으로 보았을 때 서울에 더 있으면서 결말을 짓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그사이에 만일 고향을 왕래한다면 어려움이 많을 것이고, 동당회시(東堂會試)가 비록 계륵(鷄肋)이긴 하지만 이 시험을 보고 내려가는 것이 낫다고 하면서 귀가가 늦어질 것이니 당분간 기다리지 말라고 전했다. 이 말끝에 본인은 평생 구설이 따랐으며 진퇴(進退)도 마음대로 하지 못해 이 지경에 이르렀으며, 과거 시험을 위해 서울에 온 것도 원했던 것은 아니라고 한탄 섞인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또 시험 준비는 올해를 기한으로 더는 하지 않을 생각인데 식구들이 귀가를 재촉하니 마음이 좋지 않다고 덧붙였다. 이 내용을 보았을 때 가족들은 가장인 이승학이 고향을 오가면서 복잡한 집안일 등을 결정해 주기를 바란듯하지만, 이승학은 시험으로 서울에 온 김에 시험에 집중하고 내려갈 결심을 한 듯하다. 가족들과의 의견 차이로 이승학이 아들 광수에게 귀가가 늦춰진 이유와 심정을 상세히 전한 것으로 보인다. 이어 이승학은 집안일에 대해 의견을 전했다. 집안일의 낭패는 가운(家運)이라 어찌할 수 없지만 본인이 잘 도모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니 누구를 원망하겠느냐고 탄식했다. 또 사람의 삶은 정한대로 되지 않으니 넓은 시야를 가지되, 본인처럼 처리하지는 말라고 당부하기도 하였다. 내형(內兄)과 한 달 동안 함께 거주했다는 말과 문중(門中)의 일은 반드시 자세히 전하라는 말을 덧붙이며 편지를 마쳤다. 이승학(1857∼1928)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이며, 자는 자화(子和), 호는 청고(靑皋)이다. 전남 담양(潭陽) 장전리(長田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인 진사 이최선(李最善)이고, 이승학 본인도 기정진의 문하에서 배웠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팔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집으로 ?청고집(靑皋集)? 4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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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복규(張復圭) 간찰(簡札) 3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念八日 侍生 張復圭 李進士宅 念八日 張復圭 李進士宅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창평군수(昌平郡守) 장복규(張復圭)가 이진사(李進士)댁에 신문을 받았다는 내용 등에 관해 전한 간찰. 창평군수(昌平郡守) 장복규(張復圭)가 이진사(李進士)댁에 신문을 받았다는 내용 등에 관해 답한 편지이다. 상대방의 안부가 평안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위로 된다고 하고 본인은 공무(公務)로 정신없이 지내고 있다고 하였다. 이어 보내준 8폭의 신문을 잘 받았다는 내용, 모씨(某氏)의 일은 반드시 다시 알려드리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내용이 적혔다. 모씨의 일은 아마도 수신인과 합의하여 해결을 보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듯하다. 편지의 수신인은 진사(進士) 이최선(李最善) 댁을 책임지고 있는 이승학(李承鶴)을 이른 듯하다. 편지를 쓴 날짜에 '念八日'로만 표기되어 있어서 연도를 알 수 없다. 이 편지는 장복규가 창평군수를 맡았던 1905년 1월에서 1907년 3월 사이에 쓴 것이다. 장복규(1869~?)의 본관은 인동(仁同), 자(字)는 공삼(公三)이고 호(號)는 학운(鶴雲)이며, 금구(金溝, 현 김제) 출신이다. 1885년 진사(進士)가 되었고, 궁내부주사(宮內府主事)와 창평군수 등을 역임했다. 1905년 1월에 창평군수로 발령받아 1907년 3월에 면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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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皮封]長田李進士宅回納昌吏上謝候伏拜審宵落侍體候萬安仰慰侍生一味公擾而耳 新聞八幅依受而某事不必更達耳餘不備上謝禮侍生張復圭再拜念八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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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복규(張復圭) 간찰(簡札) 4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侍生 張復圭 李進士宅 張復圭 李進士宅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창평군수(昌平郡守) 장복규(張復圭)가 경환(京換)의 보증 문제로 이진사(李進士) 댁에 보낸 간찰. 창평군수(昌平郡守) 장복규(張復圭)가 경환(京換)의 보증 문제로 이진사(李進士) 댁에 보낸 편지이다. 편지의 수신인은 진사(進士) 이최선(李最善) 댁을 책임지고 있는 이승학(李承鶴)을 이른다. 편지의 주된 내용은 이승학이 이광수를 위해 경환(京換)을 부치면서 장복규에게 보증을 부탁했는데, 비용이 잘 처리가 되지 않아 보증인에게 빚 독촉이 오자 장복규가 이승학에게 속히 이 문제를 처리하도록 재촉하면서 보낸 것이다. 편지에서 이르기를 경환을 간청해서 쓴 자가 누구인데, 오히려 자신이 떨고 있다며 자신의 상황을 토로하고, 애초에 보증을 선 것도 이승학의 아들을 믿고서 한 것인데 오히려 보증인인 저에게 미뤄지고 있다면서 불평했다. 평소에 이승학에게 가졌던 믿음에 실망을 표하기도 했다. 경환의 경위(經緯)에서 보자면 표주(票主), 즉 증명서의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자동으로 보증인에게 빚이 전가되게 되는데, 이러한 사정을 응당 먼저 알고서 속히 마련하여 지급하지 않고 이렇게 갈등을 일으키냐며 이승학을 몰아세우기도 했다. 또 자일(玆一)이란 자가 이르기를 '오늘 내로 아들(이광수)에게 연락하여 5~6일 사이에 내려오게 해서 서로 미루는 지경에 이르지 말게 하라'고 하였다고 전하며, 이광수가 와서 속히 빚 문제를 처리하도록 재촉했다. 편지는 날짜가 표기되지 않고, 발신자 장복규만 기록되어 있다. 이 편지는 장복규가 창평군수를 맡았던 1905년 1월에서 1907년 3월 사이에 쓴 것이다. 이 시기 이광수는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가 되어 서울에서 지내고 있었다. 장복규(1869~?)의 본관은 인동(仁同), 자(字)는 공삼(公三)이고 호(號)는 학운(鶴雲)이며, 금구(金溝, 현 김제) 출신이다. 1885년 진사(進士)가 되었고, 궁내부주사(宮內府主事)와 창평군수 등을 역임했다. 1905년 1월에 창평군수로 발령받아 1907년 3월에 면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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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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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朴慶杓再從兄塚至梁義永新窆處相距四十八尺朴慶杓[着名]梁義永[着名](背面 題辭)堦下四十步之也不但可禁起訟之不待官決任自入葬揆以或問後葬喪窮故梁塚期於督掘此後罪官爲知向事甲午九月卄四日 背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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