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백보(任百寶)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庚二月十三 記下 任百寶 庚二月十三 任百寶 李進士宅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임백헌(任百憲)이 이진사댁(李進仕宅)에 스승의 상사(喪事) 등에 묻고 여러 가지 소식을 전한 내용의 간찰. 임백헌(任百憲)이 이진사댁(李進仕宅)에 스승의 상사(喪事) 등에 묻고 여러 가지 소식을 전한 내용의 편지이다. 해를 넘기도록 소식을 듣지 못해 서글플 즈음에 보내주신 편지를 받고 요사이 안부가 좋으시다는 것을 듣게 되어 위로된다고 하며 편지를 열었다. 이어 스승님의 상(喪)은 유문(儒門)의 불행이라며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고, 소산(小山, 노사 문인 문순헌(文淳憲) 추정)의 이장(移葬)이 정해졌느냐고 묻고 자신은 멀리 있어 듣지 못했다고 전했다. 이 단락에서 말한 스승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 선생을 이른다. 그는 조선 성리학의 6대가(大家) 중의 한 명으로 꼽힐 정도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의 정신적 지주였다. 호남을 비롯한 영남에까지 그를 따르는 수백 명의 문인이 있었다. 대표적인 저술로 「납량사의(納凉私議)」, 「이통설(理通說)」, 「외필(猥筆)」 등이 있으며, 문집으로 ?노사집(蘆沙集)?이 있다. 편지는 임백헌 자신의 안부와 여러 가지 소식을 전한 내용으로 이어졌다. 자신은 그간에 금영(錦營, 충청 감영)으로 갔다가 열흘 만에 돌아왔는데, 그사이에 감기를 얻어 여러 날을 고생하다가 지금은 비록 머리 빗고 낯을 씻는 정도는 되지만 아직도 얼얼하다며 건강이 좋지 않음을 전했다. 또 동생이 이질(痢疾)에 걸려 상태가 좋지 않아서 근심이라는 내용, 금영을 다녀오고 병의 증상이 심해져서 염려가 깊다는 내용, 지금 임기 날짜를 다 채워 상쾌한 마음이 든다는 내용, 과거(科擧) 일자가 완화군(完和君)의 장례 때문에 미뤄질 것이라는 소문이 있으나 공문(公文)에 있지 않으니 길에서 떠도는 소문일 것이라는 내용, 도목정사(都目政事)에서 받은 점수에 관한 내용 등이 보인다. 완화군은 고종(高宗)의 서장자(庶長子)로, 고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할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세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명성황후의 견제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880년 병을 얻어 13세의 어린 나이로 요절하였고, 사후에 완친왕(完親王)으로 추존되었다. 편지가 쓰인 날짜에 '庚二月十三'으로 쓰여서 연도가 불분명하나 편지 내용으로 보아 간지로 표기된 '庚'은 경진년(庚辰年)인 1880년으로 짐작된다. 수신인 이진사는 이최선(李最善)을 말하는데, 그가 진사(進士)에 올랐기 때문에 이최선의 집을 이진사댁으로 불렀다. 이최선과 그의 아들 이승학(李承鶴)이 모두 기정진 선생의 제자였기 때문에 이 편지가 이최선에게 보낸 것인지, 이승학에게 보낸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임백헌의 본관은 풍천(豐川)으로, 1873년 인제현감(麟蹄縣監)을 맡았고, 1875년에는 창평현령(昌平縣令)에 제수되었으며, 1880년에는 면천군수(沔川郡守)에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