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기관별 검색

검색 범위 지정 후 검색어를 넣지 않고 검색버튼을 클릭하면 분류 내 전체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전체 으로 검색된 결과 84193건입니다.

정렬갯수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이광수(李光秀) 시(詩) 2 고문서-시문류-시 교육/문화-문학/저술-시 玉山 李光秀 李光秀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이광수(李光秀)가 송덕용(宋德用)을 방문하면서 지은 칠언절구(七言絶句)의 차운시(次韻詩). 이광수(李光秀)가 과재(果齋) 송덕용(宋德用)을 방문하면서 지은 칠언절구(七言絶句)의 차운시(次韻詩) 한 편이다. 문서 첫머리는 시 제목인 '과재형을 방문하고 대인(大人, 상대방 아버지)이 남긴 벽산정(壁山亭) 원시(原詩)에 삼가 차운하다'라는 구절이 적혔다. 대인은 송덕용의 아버지인 송소환(宋邵煥)이다. 시를 보면, 벽산정은 벽산(碧山) 머리에 있는데, 온 사방이 연기에 둘러싸여 있는 중에도 한 구역에서 그윽함을 자랑하고 있다는 것이 앞 구절의 내용이다. 이어 일찍부터 다른 책력의 조짐을 먼저 아시고 꽃과 잎만을 가지고 춘추(春秋)를 기억했다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이광수는 지인 송덕용 선생을 방문하고 부친의 풍모가 담긴 정자를 보고 또 그 시에 담긴 예지력을 찬탄하여 시를 차운한 것으로 보인다. 예견한 혼란한 시대를 송소환 선생께서 지금의 혼란을 예견하셨다고 찬탄한 내용으로 보인다. 시문 몇 개의 글자를 수정한 흔적으로 보아 완성되지 않은 초본(初本)임을 알 수 있다. 문서는 오염 흔적이 많고 상단 일부는 결락 된 상태이다. 또 문장 배면에 종이를 덧대어 보수한 흔적도 보인다. 송덕용(1864~1932)의 자는 태원(兌爰)이고, 호는 과재(果齋)이며, 초명은 송헌용(宋憲用)이다.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증조부는 송유함(宋有涵)이고, 조부는 송두극(宋斗極)이며, 부친은 송소환(宋邵煥)이다. 심석(心石) 송병순(宋秉珣, 1839∼1912)과 백헌(柏軒) 정재규(鄭載圭, 1843∼1911)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저서로 시문집인 ?과재문집(果齋文集)』이 있다. 이광수(1873~1953)의 호는 옥산(玉山), 자(字)는 미중(美中)이다. 부인 죽산안씨와의 사이에 외아들 혁(爀)을 두었다. 노사학파의 일원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이다. 1900년에 경의문대(經義問對)로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로 되었으며, 계몽운동가인 양한묵(梁漢黙) 등과 교유하면서 신학문에 뜻을 두고 개화(開化)에 앞장섰다가 송사에게 파문(破門)을 당하기도 했다. 일제의 강제 병합을 목격하고 고향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이승학(李承鶴) 등 시(詩) 고문서-시문류-시 교육/문화-문학/저술-시 李承鶴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李承鶴 등 10인이 지은 春夜聯句와 7언시 詩軸. 시축 첫 머리는 李承鶴과 李光秀를 포함한 10명이 지은 聯句詩가 있는데, 각 연구마다 지은 사람이 표기, *7언 절구시와 7언 율시 각각에 시인의 號가 표기, 마지막에는 다시 李承鶴 등 11인이 지인 연구시가 있음 *상태: 시 중간 중간에 글자를 지우고 수정한 흔적이 많음, 시들의 필체가 차이를 보임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기타

憲章 우리는 黎明의 世界를 본다 오늘의 時代에 있어서 期必코 우리는 平和와 共榮의 世界를 이룩할 것이다 人類를 文明의 危機로부터 求하고 우리들의 世界에 恒久的인 繁榮의 基礎를 確立하기 爲해서는 中正의 大道와 總和의 主体를 追求하는 人道的 文化의建設이 先行되여야한다 이것은 새로운 文化의 創造이며 참된 文明의 建設이다眞理는 不滅하며 不變하는 것이다 하늘이 우리에게 주신 바는 하늘이 우리를 通하여求하는 것이니 人道는 眞理의 根幹이며 理性과 良心은 人類의 通性이다 眞實노 善함第 알 슈 있고 이 참된 存在에 對한 信仰을 確固히 할 수 있다면 五常의 德을 天下에 밣이여 永遠토록 우리의 길은 그 和平을 함께 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社會와 國家는 正義의 實現이 그 基本課題임을 믿고 있다 民主人本의 理想은 人倫의 正立과 道德의 確立으로 保障되는 것이며 우리들이 가진 모든 것은 平和와 厚生의 目的을 指向하는 人道的 正義를 原則으로 運用되여야 한다 우리는 暴力과 偏見을 排除한다 平和는 그自体의 善한 目的으로 善의 實踐으로서만 이룩되는 것이다 모든 個人이 安全과 自由와 幸福을 享有하고 生存과 眞實을 充足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들의 善은 完全할 것이며 모든 文化와 傳統이 自由롭게 그 名譽와 긍지를 지키고 모든 民族과 國家는 大同의 建設을 爲하야 結束함으로써 眞實노 우리들의 平和는 永遠토록 지켜질 것이다여그서 우리는 올바른 韓國人으로서 스스로 市民이 되고자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곳에서 우리의 兄弟와 함게 永遠이 和平할 것이며 우리을 必要로 하는 모든 곳에서우리의 이웃을 爲하여 참되게 奉仕할 것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근현대문서

1923년 이승학(李承鶴) 영수증(領收證) 5 고문서-명문문기류-근현대문서 경제-회계/금융-영수증 大正十二年九月四日 潭陽郡大德面森林組合長代 潭陽郡 昌平面 長華里 李承鶴納 大正十二年九月四日 潭陽郡大德面森林組合長 李承鶴 전남남도 담양군 □…□(타원형)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23년에 담양군대덕면삼림조합에서 이승학에게 발급한 삼림조합비 영수증. 1923년 9월 4일에 담양군대덕면삼림조합(潭陽郡大德面森林組合)에서 담양군 창평면(昌平面) 장화리(長華里)에 사는 이승학(李承鶴)에게 발급한 영수증이다. 이 문서는 담양군대덕면삼림조합장 대리인 명의로 발행했다. 이승학이 납부한 금액은 1923년도 삼림조합비 1원(円) 95전(錢)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근현대문서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근현대문서

1924년 이승학(李承鶴) 영수증(領收證) 12 고문서-명문문기류-근현대문서 경제-회계/금융-영수증 大正十三年 潭陽郡大德面會計員 金永龜 潭陽郡 昌平面 長華里 李承鶴納 大正十三年 金永龜 李承鶴 전남남도 담양군 潭陽郡大德面會計員印(1.7×1.7), □…□(흑색, 원형)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24년에 이승학이 담양군 대덕면에 지세를 납부하고 받은 영수증. 1924년 12월 20일에 창평면(昌平面) 장화리(長華里)에 사는 이승학(李承鶴)이 지세(地稅)를 납부하고 받은 영수증이다. 이 문서는 담양군(潭陽郡) 대덕면(大德面) 회계원(會計員) 김영구(金永龜) 명의로 발행했다. 이승학이 납부한 금액은 1924년도 제1기 지세 7원(圓) 49전(錢), 지세부가세(地稅附加稅) 2원 2전, 지세할(地稅割) 3원 44전, 지세부가금 2원 24전으로 총 15원 19전이다. 이 문서에는 발급일이 기입되지 않았지만 대정13년 12월 20일 날짜의 도장이 찍혀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근현대문서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정묘년 임정규(林廷圭)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丁卯三月卄一日 弟 林廷圭 丁卯三月卄一日 林廷圭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정묘년 3월에 임정규(林廷圭)가 수신인의 아들과 헤어지면서 안부를 전한 편지이다. 정묘년 3월에 임정규(林廷圭)가 수신인의 아들과 헤어지면서 안부를 전한 편지이다. 엊그제 작별하여 마음이 아직도 서글프다는 말로 편지를 시작하고, 상대방의 안부를 물었다. 분란을 겪은 후에 형제들과 지내는 생활은 어떠신지, 가족들은 두루 좋으신지 여쭈었다. 본인은 이전과 다름없이 지내고 있다고 간단히 덧붙이고, 상대방 아들에 대해 전했다. 윤랑(允郞, 상대방 아들)은 모든 일에 숙달(夙達)하니 크게 전망이 있을 것이니 사랑할만하고 축하할 만하다고 칭찬했다. 그리고 갑자기 윤랑과 작별하게 되어 매우 슬프다고 하며 편지를 끝마쳤다. 헤어지는 윤랑 편에 안부 인사 편지를 보낸 것으로 보인다. ?고종실록(高宗實錄)?에 기록된 임정규라면, 그는 장성(長城) 출신으로 1900년 4월에 전라남도 양무위원(全羅南道量務委員)을 맡은 인물이며, 편지에 적힌 정묘년은 1927년으로 보아야 한다. 또 이 편지가 이승학(李承鶴) 가문으로 온 것이라면 수신인은 이승학을 가능성이 크고, 윤랑은 이광수(李光秀)가 될 것이다. 이광수(1873~1953)의 호는 옥산(玉山), 자(字)는 미중(美中)이다. 부인 죽산안씨와의 사이에 외아들 혁(爀)을 두었다. 노사학파의 일원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이다. 1900년에 경의문대(經義問對)로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로 되었으며, 계몽운동가인 양한묵(梁漢黙) 등과 교유하면서 신학문에 뜻을 두고 개화(開化)에 앞장섰다가 송사에게 파문(破門)을 당하기도 했다. 일제의 강제 병합을 목격하고 고향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皮封]謹拜候狀昨日拜別尙庸伏悵不審勞攘之餘靖棣體還護萬重寶閤均休昻溸區區且祝弟依劣而已 允郞凡事夙達大有前望可愛可賀而遽爾賦別甚悵甚悵餘謹不備伏惟尊照 上狀丁卯三月廿一日弟林廷圭拜拜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임백보(任百寶)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庚二月十三 記下 任百寶 庚二月十三 任百寶 李進士宅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임백헌(任百憲)이 이진사댁(李進仕宅)에 스승의 상사(喪事) 등에 묻고 여러 가지 소식을 전한 내용의 간찰. 임백헌(任百憲)이 이진사댁(李進仕宅)에 스승의 상사(喪事) 등에 묻고 여러 가지 소식을 전한 내용의 편지이다. 해를 넘기도록 소식을 듣지 못해 서글플 즈음에 보내주신 편지를 받고 요사이 안부가 좋으시다는 것을 듣게 되어 위로된다고 하며 편지를 열었다. 이어 스승님의 상(喪)은 유문(儒門)의 불행이라며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고, 소산(小山, 노사 문인 문순헌(文淳憲) 추정)의 이장(移葬)이 정해졌느냐고 묻고 자신은 멀리 있어 듣지 못했다고 전했다. 이 단락에서 말한 스승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 선생을 이른다. 그는 조선 성리학의 6대가(大家) 중의 한 명으로 꼽힐 정도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의 정신적 지주였다. 호남을 비롯한 영남에까지 그를 따르는 수백 명의 문인이 있었다. 대표적인 저술로 「납량사의(納凉私議)」, 「이통설(理通說)」, 「외필(猥筆)」 등이 있으며, 문집으로 ?노사집(蘆沙集)?이 있다. 편지는 임백헌 자신의 안부와 여러 가지 소식을 전한 내용으로 이어졌다. 자신은 그간에 금영(錦營, 충청 감영)으로 갔다가 열흘 만에 돌아왔는데, 그사이에 감기를 얻어 여러 날을 고생하다가 지금은 비록 머리 빗고 낯을 씻는 정도는 되지만 아직도 얼얼하다며 건강이 좋지 않음을 전했다. 또 동생이 이질(痢疾)에 걸려 상태가 좋지 않아서 근심이라는 내용, 금영을 다녀오고 병의 증상이 심해져서 염려가 깊다는 내용, 지금 임기 날짜를 다 채워 상쾌한 마음이 든다는 내용, 과거(科擧) 일자가 완화군(完和君)의 장례 때문에 미뤄질 것이라는 소문이 있으나 공문(公文)에 있지 않으니 길에서 떠도는 소문일 것이라는 내용, 도목정사(都目政事)에서 받은 점수에 관한 내용 등이 보인다. 완화군은 고종(高宗)의 서장자(庶長子)로, 고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할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세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명성황후의 견제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880년 병을 얻어 13세의 어린 나이로 요절하였고, 사후에 완친왕(完親王)으로 추존되었다. 편지가 쓰인 날짜에 '庚二月十三'으로 쓰여서 연도가 불분명하나 편지 내용으로 보아 간지로 표기된 '庚'은 경진년(庚辰年)인 1880년으로 짐작된다. 수신인 이진사는 이최선(李最善)을 말하는데, 그가 진사(進士)에 올랐기 때문에 이최선의 집을 이진사댁으로 불렀다. 이최선과 그의 아들 이승학(李承鶴)이 모두 기정진 선생의 제자였기 때문에 이 편지가 이최선에게 보낸 것인지, 이승학에게 보낸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임백헌의 본관은 풍천(豐川)으로, 1873년 인제현감(麟蹄縣監)을 맡았고, 1875년에는 창평현령(昌平縣令)에 제수되었으며, 1880년에는 면천군수(沔川郡守)에 임명되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879년 김치홍(金致弘)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적 己卯式 幼學 金致弘 牧使 己卯式 金致弘 羅州牧 牧使[押] 周挾無改印(흑색, 21.3×5.9), □…□(7.5×7.5)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C001_02_A00007_001 1879년에 金致弘(66세)이 羅州牧에 제출한 準戶口. *가족사항 : 妻 晉州河氏(66세) *추기: 八一統五戶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寄光兒四朔間不見面不見一字書悠悠此心汝何以軆得近寒重省安過否今秋讀葩經卒業而又尊閣尙書乎在他秩乎所得者幾卷書乃範諸友同處乎壽萬日課九紹亦來留而課讀否俱爲愈愈無斁夫古今人之稱讀書好者汝知以何事何等物曰尋章句摘喜詞而已乎此外又知有無限好處乎吾之望汝者不在多言汝欲恢洪先世勤艱之基業則常食息間勉勉孜孜百事從實上做去久之用力自遠於食色之外然後庶覺寸進不然則終始悠泛矣吾復何望也人之用心也在父師長者之側則雖慵懶夫稍知收拾獨處則任其所之此所以孟子求放心先之大學之誠意中庸之謹獨是也蔽一言曰眞實地頭步耳汝之自點檢汝父在家時同乎異乎若辦得于此則吾何憂也欲言不能盡因下沙便略此庚寅臘月十八父欠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891년 이승학(李承鶴) 간찰(簡札) 1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辛卯五月卄八日 父 辛卯五月卄八日 李承鶴 李光秀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91년 5월에 이승학(李承鶴)이 아들 이광수(李光秀)에게 공부를 독려하고 여러 가지 집안일을 당부한 내용의 간찰. 1891년 5월에 이승학(李承鶴)이 아들 이광수(李光秀)에게 공부를 독려하고 여러 가지 집안일을 당부한 내용의 편지이다. 더위가 심해지는데 가족들의 생활은 어떠한지를 물으면서 편지 서두를 채웠다. 이어 이승학은 아들의 공부를 독려하는 말을 전했다. 과작(課作)은 빠뜨리고 있지 않은지, 몇 사람과 같이 학문을 연마하는지, 마음으로 헤아려 보았을 때 작년보다 학문의 진척은 있었는지를 물었다. 또 과작(科作)은 작은 재주이지만 이 또한 힘쓰지 않으면 얻는 바가 없다고 하며 과작에 힘쓰라고 당부했다. 이어 입지(立志)의 중요성에 관해 얘기했다. 입지에도 크고 작음이 있고 정밀하고 거침의 차이가 있는 것은 스스로 어떻게 기약했는지의 여부 때문이라는 것이다. 입지에 이어 기질에 끌려 다니지 않도록 경계한 말도 보인다. 이승학은 기를 위주로 하는 것은 큰 병통이라고 하면서 사람이 기를 통솔하지 못하면 튼튼한 기둥을 세울 수 없다고 하면서 이승학 본인은 이를 잘하지 못한 것이 병통이라고 하면서 아들에게 잘 염두에 두도록 당부했다. 이어 서울살이 하는 이승학 본인의 생활을 전했다. 이승학은 예전과 같이 무료하게 지내면서도 분주함을 면하지 못하고 있어 한편으론 우습고 한편으론 서글프다고 마음을 표했다. 감시(監試)과 회시(會試)는 이미 지나갔으며, 인근 군(郡)에서 창평(昌平)에 사는 정형[鄭氏]이 참석했는데 낙방하여 안타깝다고 하였다. 이후 과거 시험 일정에 대해 알리면서 불안한 심정도 함께 드러냈다. 이어 집안일에 대한 걱정과 당부를 적었다. 서울은 장맛비가 내리는데 남쪽은 가뭄이 심하다고 하니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다고 하며 걱정하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지난번 편지에서 언급한 일 등은 잘 처리되고 있는지를 묻고 자신의 귀가를 기다려 처리하라고 당부했다. 또 내형(內兄)은 그믐 전에 도착하기로 약속했는데 지켜질지 모르겠다고 말하고, 안씨(安氏) 집안 형제들과 조석으로 함께 지내고 있어 위로된다는 말을 남기며 편지를 끝마쳤다. 이승학(1857∼1928)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이며, 자는 자화(子和), 호는 청고(靑皋)이다. 전남 담양(潭陽) 장전리(長田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인 진사 이최선(李最善)이고, 이승학 본인도 기정진의 문하에서 배웠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팔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집으로 ?청고집(靑皋集)? 4권을 남겼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多少事臨帋又復如此甚矣精神之錯亂也卽日漸熱母主氣力萬康家中俱免何而身狀安吉課作無闕而與幾人同硏否汝須自料胸中今年所讀與所作與往年有異則是分寸有進也不然則終是舊樣人也科作雖是末技不專用意則又無所得況外此而有大於此者乎大抵人之初發軔曰立志而立志亦有大小精粗之不同者以其自期之如何耳又人之主氣者是大病痛而人不充是氣者無以撑柱此七尺之驅如吾之半生病是餒也着念念此中旅屑依遣而日事頗無聊而又不免奔忙自笑自憐而已監會已過鄭兄之山外可歎近郡則昌平鄭氏參一人云耳會日必以退定十七爲之漸且迫頭更何意想吾之所望無乃捕風而免不得奈何都下可謂成霖而每聞南來人傳說魃憂特甚未知近復如何所作畢移否向去兩書中事區處之方皆如書中指封待吾去時也內兄晦前來到爲約而未知踐約否也安兄昆季晨夕相從頗慰擾擾不一一辛卯五月卄八日父欠判重告歸付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聞喜後去念日付郵便書相夜晦可抵其前書皆免浮沈否古阜便來書念二得見必滯一旬於郡邊也羣疑盡釋而上庠書中若傳榜而以厚償如托然旣後相聞故但給三緡來人以失望而去矣大抵傳榜今雖聞知吾亦初不以急傳爲言然過後思之有不然者矣南人之以初事不識裏許者皆然而設有所費急送伴主人使閭里如前呼唱可也而今旣後矣見書知科時經許多勤苦而至於八日之久而出榜耶束立拔擢之境但以天數而參之此可爲一快事今也汝之身已許於國矣苐一事君之義明白立柱於心頭處世之方詳審出脚於路下無作碌碌無作硬硬務以和順適中焉北道行果亦如意已發去而來往必爲一朔未知間至如何也祕書郞若爲之是所望者而凡事先知幾微無失時卽可及也登壟望蜀人情皆然近日在京在道未得的知是菀而雖爲形役勿爲勞神吾嘗客遊自驗比在家時猶專一在家則百務撞着時或擾中在外則惟一條路看所事保身而已古人之途學知所以然也汝亦驗此否諡座近或設行耶日前見新聞知議政之間遞而又下敦諭則必復出仕出仕之日似成而又未知如何耶此事期必結末然後還家而終若差遲則去留姑亦難矣苐觀下回焉家中近如前而吾病近以眩氣益甚不止亦苦哉詩會明日爲之而客擾姑未知多少耳白錢參百兩換送付之汝寬族使傳之又有不足者自京得用或下換用之而玉果金明五處又用幾許否此去錢每百十二兩式加捧自此區送則又有些利而姑亦未及奈何衣服趁爲製着明五便何時到泊乎官服與轎子等屬皆辦得乎餘外事但勿浪費當用處亦得用焉人事之擾惱每以用不足之致然丈夫在有身豈以此至於傷心乎有無間以安字過耳水到渠成不須預慮下邨行以來明發去云近日所見者必傳之他不一一辛丑三月卄五父欠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皮封]長田李進士宅回納隣吏上謝伏拜審靜體候萬安仰慰仰慰示事謹悉而槪知其曖昧矣今日更招尤可見情耳金事渠非自退實自長田宅自退云故退待之意姑爲放送耳餘不備上狀禮卽傳侍生張復圭拜手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장복규(張復圭) 간찰(簡札) 2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卽 侍生 張復圭 卽 張復圭 李進士宅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창평군수(昌平郡守) 장복규(張復圭)가 이진사(李進士)댁에 의병(義兵) 등에 관한 사실을 확인하여 전달한 간찰. 창평군수(昌平郡守) 장복규(張復圭)가 이진사댁에 의병(義兵) 등에 관한 사실을 확인하여 전달한 편지이다. 먼저 파병 소식에 관한 내용을 전하기를, 어제 관사(觀使, 관찰사)의 편지에서 이르기를 군부(軍部)에서 전훈(電訓)으로 곡성(谷城) 등지에 병사를 파병했는데, 30여 명이 군의 객점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옥과(玉果)쪽으로 떠났다는 것이다. 이어 의병의 행군 소식을 알렸다. 어제저녁 오경(五更)에 곡성에 보고된 내용에서 듣기를, 의병이 곡성으로 들어와 유숙(留宿)했다가 다음 날 남원(南原)으로 향하려고 했으나 그 지역에 군인들이 길을 막고 있다는 것을 듣고 순창(淳昌)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군인과 의병에 관해 전달한 내용은 직접 목격한 것이기 때문에 아마도 헛말은 아닐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근래 들리는 유언비어에 대해서도 확인해 주었다. 담양읍(潭陽邑)에 일본 헌병 3명이 그제 들어와서 숨었다는 말은 낭설(浪說)이며, 전주의 병사가 내려갔다고 것은 관사의 편지에서 확인했다고 전했다. 영산포 뱃길이 끊겼다는 말도 모두 낭설이라고 추신으로 덧붙이기도 하였다. 편지의 수신인은 진사(進士) 이최선(李最善) 댁을 책임지고 있는 장남 이승학(李承鶴)을 이른 듯하다. 또 편지를 쓴 날짜에 '卽'으로만 표기되어 있어서 편지가 쓰인 연도와 일자를 알 수 없다. 이 편지는 장복규가 창평군수를 맡았던 1905년 1월에서 1907년 3월 사이에 쓴 것인데, 의병 등의 내용으로 보았을 때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 11월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편지는 피봉 하나와 편지지 두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두 장의 편지지에 내용을 연속하여 기록하여 날짜와 발신인은 뒷장에 표기했고, 추신의 내용은 앞 장에 기록했다. 장복규(1869~?)의 본관은 인동(仁同), 자(字)는 공삼(公三)이고 호(號)는 학운(鶴雲)이며, 금구(金溝, 현 김제) 출신이다. 1885년 진사(進士)가 되었고, 궁내부주사(宮內府主事)와 창평군수 등을 역임했다. 1905년 1월에 창평군수로 발령받아 1907년 3월에 면직되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皮封]長田侍座回納鳴陽吏上謝伏拜審侍體候萬甯伏慰且荷昨日果有觀使書因軍部電訓派兵于谷城等地而三十餘名午站於此郡店夕間發向玉果耳昨夜五更谷城報告使留宿於郡底詳聞則義兵入谷城留宿翌日欲向南原聞該地有兵丁之遮道還向淳昌此是目擊也似非虛語耳潭陽邑日憲兵三名再昨日入去而遁去之說浪說耳觀使書中完兵亦下來云耳餘不備上謝候卽□侍生張復圭榮浦船路之絶皆浪說耳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기타

決議文 우리는 韓國靑年儒道會(靑儒)의 總意로 다음과 같이 決議한다一. 우리는 民族文化의 正統을 繼承하여 國民倫理를 再建하고 人類敎化에 獻身한다二. 우리는 仁愛의 精神과 忠孝思想을 根幹으로 現代的倫理觀을 定立한다三. 우리는 民族維新의 先鋒이 되며 祖國의 새 歷史創造에 앞장선다四. 우리는 鄕土文化를 啓發하고 地域社會發展을 爲해 積極參與한다五. 우리는 率先垂範, 社會正義實現과 國民福利增進을 爲해 盡力한다六. 우리는 儒道理念의 汎世界的實現을 爲해서 國際協力을 增進한다七. 우리는 宗派을 超越하며 모든 宗敎의 傳統과 名譽을 尊重한다八. 우리는 成均館創設理念을 遵守하고 成均館儒道會와 連絡的인 協力關係을 鞏固히 한다

상세정보
84193건입니다.
/4210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