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이승학(李承鶴)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庚戌八月八日 父 庚戌八月八日 李承鶴 李光秀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10년 8월에 이승학(李承鶴)이 아들 이광수(李光秀)에게 경술국치(庚戌國恥)의 슬픔을 표하고 속히 귀향토록 독려하는 내용을 전한 간찰. 1910년 8월에 이승학(李承鶴)이 아들 이광수(李光秀)에게 경술국치(庚戌國恥)의 슬픔을 표하고 속히 귀향토록 독려하는 내용을 전한 편지이다. 경술국치(庚戌國恥), 즉 대한제국이 일본에 합병되자 이승학은 의지할 곳도 원망할 곳도 없는 현실에 절망했다. 그는 하늘이 무심히 우리나라에 죄준 것을 원망하며 거리의 사람들은 미친 듯하고 취한 듯이 안정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런 상황은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며 이제 어디를 의지하여 살아야 하느냐며 한탄을 쏟아냈다. 이어 아들에게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귀향하라고 독려한 말을 길에 늘려놓았다. 그는 이광수가 서울에 산 십 년 동안 얻은 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냐며 탄식하고, 지금 상황은 눈으로 차마 볼 수 없고 귀로 차마 들을 수 없으니 다시 무슨 희망이 있겠느냐고 하였다. 또 아들이 귀향해야 하는 다섯 가지를 들었는데, '너의 아버지가 늙었으니 돌아와 봉양해야 하고, 너의 아들이 장성했으니 돌아와 가르쳐야 하며, 너의 부인이 원망하니 돌아와 위로해 주어야 하며, 가산(家産)이 줄어들었으니 돌아와 수습해야 하며 향리 사람들이 비웃나니 돌아와 은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거류(去留)는 무관하게 되었고 국가의 계책을 영위하는 것도 무익하게 되었다고 하며 거듭 귀향을 재촉했으며, 앞서 말한 다섯 가지의 의무를 저버리고 서울에서 시류를 좇아 사는 것은 천한 장부(丈夫)가 된다고 하면서 서울 생활에 연연하지 말고 돌아오도록 했다. 지금 처한 시대는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읽고, 「반초은시(反招隱詩)」를 노래할 때이니 다른 일은 도모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무엇보다 지금은 입이 있어도 말을 할 수 없고 해는 저무는데 길은 먼 형세라고 하며 송나라 주희(朱熹)가 말한 애통함을 참고 원한을 가슴에 새겨 절박한 마음을 갖는다는 뜻의 '인통함언박부득이(忍痛含怨迫不得已)'라는 여덟 글자를 명심할 때라고 하였다. 편지 말미의 내용을 보면 이승학이 왜 그토록 아들의 귀향을 원했는지가 드러난다. 이승학은 아들에게 처음부터 기신(起身) 하는 것은 어렵고 여의치도 않아서 공연히 검사(檢事)만 당하게 된다고 이른다. 이 말의 의도를 보았을 때 아들 이광수가 섣불리 의병에 참여할 것을 근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이광수는 을사조약(乙巳條約) 체결 이후 나인영(羅寅永) 등과 같이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여 을사 5적(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다가 일본군에 붙잡혀 진도(珍島)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편지는 세 장의 편지지에 나누어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마지막 장 배면에 추신을 적었는데, 편지의 전달에 관한 내용이다. 이승학(1857∼1928)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이며, 자는 자화(子和), 호는 청고(靑皋)이다. 전남 담양(潭陽) 장전리(長田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인 진사 이최선(李最善)이고, 이승학 본인도 기정진의 문하에서 배웠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팔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집으로 ?청고집(靑皋集)? 4권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