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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聞信滿月矣如干得失姑舍涯角分離隔年思想使人難堪雖百倍加意自謂自强而有時不能定情世上事雖知無兩便之道而於是乎知益難矣每念古人之立功立事者何嘗係戀之私有如此而人情則同抑或其無也耶是未可知也會日已過的奇不到風說虛傳不一或云汝免參榜或云退日在今月二日或云今月不得結梢無指的是亦泄泄也但得失付天無喪吾良心其非本源修分耶此則前書雖累累益加勉也世間名利分上易生虛慾致人葛藤都由于此雖心身求之免不得以心守之豈無陽間也今也意必得失已辦矣幸而得參不足可喜不幸失之不足爲阻惟以優之裕哉爲立定法辭色間幾微色勿露焉免參則前頭修去事皆如向言做去不然則今過周年一番返面更圖其非道理耶雖然外此久有大關事此事亦結末然後可以起身謚事今月間果開座成命否亦甚支離奈何傳聞近來都市且有許多風波未知果然而亦憂慮處家中近皆無故遠途而得家信無故二字足矣允弘間遭其承重喪舜□親葬以今十人云前月玉果金明五向傳書否今月二日郵便書亦得見否今聞栢亭曺友入京付此此是今年來苐七矣也聖範在京所求者果何事而近聞有許多狼狽似非虛傳豈非自取狼狽乎此人也不能自謀其身致此譏笑耶譏笑猶餘事今則免於禍敗而間間尋見否愛之憎之若遠水之不及近火此亦奈何可歎而已近聞柿里書到而汝之所看事無及云是亦非人情也下邨生邨栗洞兩族叔念間又發去云今番事若差過則成均學徒一座更圖無失時可也而延諡時還家更去爲料焉本官姑不出來而近則吾門事頗用意云詩會以喪葬之碍退于今念六日爲之耳漁岩金室以産後證不健而來到見無見證耳他不一一辛丑三月望父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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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이승학(李承鶴) 간찰(簡札) 2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辛丑三月卄五日 父 辛丑三月卄五日 李承鶴 李光秀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01년 3월에 이승학(李承鶴)이 아들 이광수(李光秀)에게 관직에 오른 것을 축하하고 여러 가지 당부를 전한 간찰. 1901년 3월에 이승학(李承鶴)이 아들 이광수(李光秀)에게 관직에 오른 것을 축하하고 여러 가지 당부를 전한 편지이다. 지난번 우체국으로 보낸 편지를 받았는지 물어보고 이전의 편지의 전달 여부를 확인하고, 고부(古阜) 편으로 부친 편지가 지체되어 이제 도착했다고 하면서 편지의 전달 여부를 근심하며 편지 서두를 채웠다. 이어 성균관에서 과거 시험 급제 정보를 담은 전방(傳榜)을 받으면서 겪은 일을 적었다. 전방을 든 자가 후한 보상을 기대했으나 3민(緡)을 내어 주자 실망했다는 말과 그 내막 등을 상세히 전한 내용이 보인다. 그리고 고생하며 과거 시험을 통과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말과 함께 출방(出榜) 되었는지를 확인하며 합격에 대한 기쁨을 전했다. 이어 앞으로 관직 살이 하면서 명심할 것에 대해 조언했다. 가장 우선할 것은 임금을 섬기는 의리를 마음에 명백하게 세우는 것이고, 처세할 때는 자세하게 살펴야 하며, 노상에 다닐 때는 용렬하게 하지도 말고 완강하게 하지 말고 화순(和順)으로 중도에 맞게 하도록 당부했다. 또 아들에게 비서랑(秘書郞)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기미를 보고 기회를 잘 잡으라고 하며 '농(隴)을 평정하니 다시 촉(蜀)을 바라게 된다'는 등롱망촉(登壟望蜀)의 고사를 인용하며 아들의 벼슬자리에 대한 기대를 표했다. 이어 본인은 노상에 있고 아들은 서울에 있어서 서로의 상황을 잘 알 수 없어 울적하지만, 이 또한 형세이니 너무 조바심내지 말라고 하였다. 이승학은 이 당시 문중 일로 북도(北道) 길에 있으면서 서울에 있는 아들과 편지로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이승학은 편지에서 노상에서 지내는 기간을 한 달로 잡고 있지만 앞으로 일정은 잘 알 수 없다고 알렸다. 이승학은 시좌(諡座)의 설행 및 의정부 교체에 관한 내용 등에 묻고 재차 서울 생활을 걱정하고 당부한 내용을 이어갔다. 서울에서 사용할 비용으로 백전(白錢) 300냥을 보내는데 부족한 것은 서울에서 환전하여 쓰라는 내용 등을 전하고, 벼슬길에 쓸 관복(官服)과 교자(轎子) 등을 갖췄는지를 걱정했다. 덧붙이기를 돈을 낭비하지도 말고 부족하다고 상심하지도 말라고 했다. 하촌(下邨) 편으로 편지를 보낸다는 말로 편지를 끝마쳤다. 이승학(1857∼1928)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이며, 자는 자화(子和), 호는 청고(靑皋)이다. 전남 담양(潭陽) 장전리(長田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인 진사 이최선(李最善)이고, 이승학 본인도 기정진의 문하에서 배웠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팔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집으로 ?청고집(靑皋集)? 4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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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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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담양(潭陽) 도로수선(道路修繕) 역부(役夫) 명단(名單) 고문서-치부기록류-역사기록 사회-역사-역사기록 昭和二年二月十五日 昭和二年二月十五日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27년 2월 15일에 작성한 도로수선 역부(役夫) 명단. 담양의 도로수선에 참여한 명단을 기록한 것으로 장전리 34명을 포함한 59명의 명단이 표기, ‘○○宅’으로 표기된 것은 여성으로 보이는데, 1/3가량이 참여한 것으로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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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이광수(李光秀) 시(詩) 1 고문서-시문류-시 교육/문화-문학/저술-시 湖南晩生 李光秀 李光秀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이광수(李光秀)가 일본 동경(東京)에 외교사절단으로 다녀온 누군가를 위해 지은 7언 율시(律詩)와 시서(詩序)이다. 이광수(李光秀)가 일본 동경(東京)에 외교사절단으로 다녀온 누군가를 위해 지은 7언 율시(律詩) 한 편과 시서(詩序)이다. 대한제국(大韓帝國) 시기 고종의 명령으로 외교 업무를 무사히 마치고 온 지인에게 빗을 선물하면서 바친 시이다. 수신인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대한제국이 1897년 10월 12일부터 1910년 8월 29까지 존재했다는 것을 근거로 보자면 이 시기 외교사절을 맡았던 인물로 추정할 수 있다. 시를 여는 기구(起句)에서는 황제의 명으로 동경(東京)으로 사신 나간 형께서 의연히 관대(冠帶)를 잘 정돈하여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아서, 사해(四海)의 생령(生靈)이 나라가 있는 줄 알게 되었으니 일가(一家)의 충효(忠孝) 있는 자들이 누가 형(兄)과 같겠냐며 찬탄한 내용이 담겼다. 다음 시구는 사신을 맡은 형은 장년(壯年)에 이미 강회(江淮)의 뜻을 품고 있었으니 이에 두터운 신망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마지막 구절에서는 이광수 같은 천하의 헝크러진 쑥대머리 사람도 머리털을 보호하고자 하는 은미한 뜻으로 작은 빗을 올린다는 내용으로, 빗을 선물한 진정한 의미를 잘 전달하였다. 율시와 함께 적힌 서문(序文)은 빗을 선물한 의도가 담겨 있다. 죽하 대인(竹下大人)은 일본으로 사신을 다녀와서도 개화에 물들지 않고 모발을 잘 지켜왔다는 것이다. 머리칼 하나 보존하고 그렇지 않은 것이 몸을 보존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마는 진실로 그 의리에서는 중차대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 세상에서 그 누가 머리칼을 지킨 의리가 하늘과 땅처럼 현격히 다르다는 것을 알겠느냐고 하였다. 그렇기에 죽하 대인은 배운 것을 저버리지 않고 외국으로 사신을 나가서도 임금의 명령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고 평할 만하니, 감히 이 빗을 드려 나의 이 마음을 시로 읊었다고 하였다. 이광수(1873~1953)의 호는 옥산(玉山), 자(字)는 미중(美中)이다. 부인 죽산안씨와의 사이에 외아들 혁(爀)을 두었다. 노사학파의 일원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이다. 1900년에 경의문대(經義問對)로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로 되었으며, 계몽운동가인 양한묵(梁漢黙) 등과 교유하면서 신학문에 뜻을 두고 개화(開化)에 앞장섰다가 송사에게 파문(破門)을 당하기도 했다. 일제의 강제 병합을 목격하고 고향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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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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續修咸平鄕校隨行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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直員案 李圭燦【字致明號小庭】 慶州人 文忠公齊賢后【乙亥八月 日】韓圭興【字君賓號莘庭】 淸州人 文敬公脩后【戊寅十二月 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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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掌議案 _0014 【甲戌】沈錧澤【字聲彩號晩坡】 靑松人 葵菴安枰后安恒錫【字普一】 竹山人 文惠公元衡后李孔範【字清明】 咸平人 孝友堂慴后尹瑞炳【字敬五】 坡平人 翰林吉后李太憲【字春憲】 咸平人 箕城君兢后朴魯洪【字 】 密陽人 嶺松堂守一后_0015 【丙子】尹甲重【字士允號後松】 坡平人 翰林吉后金仁基【字性中】 商山人 忠簡公德生后李鼎行【字公述】 咸平人 進士啓益曾孫鄭宗燮【字景魯】 晉州人 蒙養齋泰桓子安鍾浩【字 】 竹山人 文惠公元衡后金東述【字稅允】 金寧人 白村文起后_0016 【戊寅】金在表【宇太業號坎山】 光山人 校理錫元后羅重煥【字文七】 錦城人 參判彬后李用憲【字 】 咸平人 孝友堂慴后張洪烈【字執中】 仁同人 參贊百林后魯璹杓【字壽玉】 咸平人 翰林有顔后安仲煥【字京集】 竹山人 文惠公元衡后_0017 【庚辰】金在表【字太業號坎山】 光山人 校理錫元后李宣雨【字重化】 全州人 完原君{忄+遂}后鄭正植【字 】 光山人 追遠堂浚后沈棋千【字 】 靑松人 葵菴安枰后李載曦【字福巖】 咸平人 孝友堂慴后羅承龍【字 】 錦城人 松坡珏后_0018 【壬子】具三用【字明祐】 綾城人 淸溪喜后鄭奉奎【字 】 晉州人 忠莊公苯后羅承允【字陽鉉】 錦城人 松坡珏后李啓煥【字 】 咸平人 孝友堂慴后魯正基【字而中】 咸平人 翰林有顔后金大鉉【字 】 光山人 校理錫元后_0019 【甲申】金在福【字宗漢】 光山人 校理錫元后金熙大【字 】 光山人 應教孝忠后張秉燮【字洪冠】 仁同人 參贊百林后金基根【字宗範】 商山人 忠簡公德生后李佐珩【字 】 全州人 完原君{忄+遂}后羅昌基【字 】 錦城人 淸白吏殷制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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養士齋隨行案 _0020 【甲戌】訓長 魯玟杓【字文玉號絅齋】 咸平人 翰林有顔后掌議 尹晃錫【字世源】 坡平人 昭靖公坤后鄭子謨【字禮明】 東萊人色掌 鄭彩吉【字鳳奎】 晉州人 忠莊公璜后朴鍾洙【字文永】 密陽人 領議政承宗后_0021 【乙亥】訓長 李載烈【字豪俊號龍隱】 咸平人 孝友堂慴后掌議 金容祚【字京玉號沙松】 商山人 忠簡公德生后李鳳榮【字 】 慶州人色掌 鄭燦葺【字贊甲】 河東人 景烈公地后金萬洙【宇百兼】 光山人 漢平君泰屹后_0022 【丙子】訓長 李益緖【字仁化號農窩】 咸平人 令同正仁桂后掌議 鄭宗燮【字景魯號蓮史】 晉州人 蒙養齋泰桓子羅聖晩【字 】 錦城人 遞菴大用后色掌 金俊斗【字贊國】 金海人 濯纓馹孫后崔宇澤【字基溶】 海州人 月潭滉后_0023 【丁丑】訓長 尹沃炳【字啓伯撓箕隱】 坡平人 秋塘恒植子掌議 金伉龍【字士元號潁軒】 金海人 校理遂后李啓淳【字贊圭】 咸平人 府院君光逢后色掌 盧春植【字太植】 光山人 桑村嵩后文濟述【字二善】 南平人 楓巖緯世后訓長 李鍾星【字玉三號鳳谷】 慶州人 文忠公齊賢后掌議 魯炳鉉【字德三號龜溪】 咸平人 翰林有顏后李用憲【字 】 咸平人 孝友堂慴后金鍾憲【字玉三】 金海人 判書壽延后李仁雨【字 】 全州人 完原君{忄+遂}后_0024 【乙卯】訓長 尹鎔炳【字敬煥號松隱】 坡平人 翰林吉后掌議 沈宜中【字用德】 靑松人 葵菴安枰后鄭濟善【字而敬】 光山人 禮判應鍾后色掌 金錫七【字 】 金海人 文愍公馹孫后牟營台【字台文】 咸平人 截江恂后_0025 【庚辰】訓長 金休鉉【字懿卿號後巖】 光山人 校理錫元后掌議 李萬白【字景春】 全州人 襄度公天祐后朴謜容【宇恒守】 密陽人 貞惠公守良后色掌 魯炳洛【字卜玄號雲林】 咸平人 翰林有顔后金宗洙【字 】 光山人 漢平君泰屹后_0026 【辛巳】訓長 李啓淳【字贊圭號陽村】 咸平人 府院君光逢后掌議 金鳳鉉【字德珍號後堂】 光山人 校理錫元后鄭炳南【字允京】 晉州人 忠莊公苯后色掌 金相洙【字君五】 金海人 翠水希訥后申鳳均【字儀卿】 平山人 壯節公崇謙后_0027 【壬午】訓長 洪年憙【字景觀號蘭坡】 豐山人 晩隱載后掌議 金行炫【字公凡】 金海人 鶴城君完后裴禎干【字善會】 達城人 進士紇后色掌 金相喆【字 】 金海人 判官日玉后柳熙燦【字金學】 高興人 英密公淸臣后_0028 【癸未】訓長 鄭鍾南【字斗一號月軒】 晉州人 濯纓稚七世孫掌議 金在權【字 】 光山人 校理錫元后宋貞植【字文化】 新平人 知止堂欽后安在燮【字君贊】 順興人 文成公?后色掌 金在默【字 】 金海人 侍中琢后趙仲衡【字 】 漢陽人 忠靖公仁沃后_0029 【甲申】訓長 金行炫【字公凡號西山】 金海人 鶴城君完后訓長 金在默【字 號海沙】 金海人 侍中琢后掌議 金相培【字相振號菊圃】 金海人 望軒光立后全錫年【字相鎭】 天安人 參議壽強后色掌 羅昌基【字 】 錦城人 淸白吏殷制后金炳鎬【字 】 慶州人 鷄林君稇后_0030 【乙酉】訓長 沈孝澤【字春成號愼菴】 靑松人 葵菴安枰后掌議 崔炳玉【字 】 海州人 晩隱錦壽后全錫南【字邦均】 天安人 參議壽強后色掌 張貴杓【字德元】 仁同人 參贊百林后金炳斗【字 】 金海人 濯纓馹孫后_0031 【丙戌】訓長 李弘雨【字化汝號燕川】 慶州人 文忠公齊賢后掌議 金榮柱【字柱三號傅巖】 慶州人 鷄林君稇后丁在奎【字華誠】 靈城人 府吏克淳后色掌 李鳳洙【字 】 咸平人 直長崑后崔東鎭【字 】 慶州人 文昌侯致遠后續修咸平鄕校隨行案【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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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복규(張復圭) 간찰(簡札) 1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卽 侍生 張復圭 卽 張復圭 李進士宅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창평군수(昌平郡守) 장복규(張復圭)가 이진사(李進士)댁에 소송(訴訟)의 진행 상황을 전한 간찰. 창평군수(昌平郡守) 장복규(張復圭)가 이진사댁에 소송(訴訟)의 진행 상황을 전한 편지이다. 편지는 간단히 안부를 묻는 말로 시작해 곧바로 본론을 얘기했다. 말씀하신 일은 그 대강을 파악해보니 그 애매모호함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오늘 상대방을 다시 불러서 그 사정을 알아보았다고 하였다. 상대방 김씨(金氏)라는 자가 '자신이 스스로 물린 것이 아니라 장전댁(長田宅)이 스스로 물린 것'이라고 주장하기에 우선 물러나 기다리라고 하고 풀어주었다고 전했다는 것이다. 위 편지 내용으로 보건대 이진사댁과 김씨가 환퇴(還退) 등의 일로 소송을 벌였는데, 이 소송의 판결자인 창평군수가 이 일로 이승학에게 편지를 보내 일의 상황을 전한 것으로 보인다. 편지의 수신인은 진사(進士) 이최선(李最善) 댁을 책임지고 있는 장남 이승학(李承鶴)을 이른 듯하다. 또 편지를 쓴 날짜에 '卽'으로만 표기되어 있어서 편지가 쓰인 연도와 일자를 알 수 없다. 이 편지는 장복규가 창평군수를 맡았던 1905년 1월에서 1907년 3월 사이에 쓴 것으로 보인다. 장복규(1869~?)의 본관은 인동(仁同), 자(字)는 공삼(公三)이고 호(號)는 학운(鶴雲)이며, 금구(金溝, 현 김제) 출신이다. 1885년 진사(進士)가 되었고, 궁내부주사(宮內府主事)와 창평군수 등을 역임했다. 1905년 1월에 창평군수로 발령받아 1907년 3월에 면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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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皮封]謹再拜上書伏不審漢回氣體候萬安反旆利稅否伏溸區區生重省姑安私幸何達就白古風例旣承盛諾敢此昻請此回便 惠擲之地伏望餘謹不備伏惟尊照上狀丁卯三月二十一日侍生林三澤再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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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유형 :
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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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道內儒生柳榮沃吳繼洙等謹齋沐百拜上書于巡相閤下伏以褒忠㫌孝爲 國先務激勸世道扶植人心苟有忠孝之曠感行義之激切則其所以襃獎而發輝者百世如一日片善亦不遺所以蹁世而樹風監古而式後此豈特爲其人之地哉誠以敦風敎淑人心之政亶不外此雖一箇忠一箇孝無不闡揚而況此一家三父子之忠孝兼全者乎今此羅州古稱多俊異之人其間忠孝節行之彬彬輩出而苟有可褒之忠可㫌之孝則豈以世代之久遠置而不論哉故逸主簿李公惟誨卽補祚功臣咸平君克明之玄孫敵慨功臣咸城君從生靖國功臣咸豊君宗義之從孫討平倭寇參判宗仁之孫高峯奇先生門人也孝友出天德行名世累以孝廉薦入洗馬副率之望而爲弘瞻輩所沮而當昏朝隱德不仕世稱高巖先生公之事蹟大略皆著於本州三綱錄與邑誌當壬辰倭亂召其子止得曰 國憂如此豈可坐視我今老矣汝須勉哉云云李公止得志節俊邁以別薦爲內乘聞 大駕播遷馳赴 行在時兵糧竭之募粟納饋餉廳還船南下與義士張景弘等戰于興陽浦斬倭石綻等數十級與義士張景弘等同日中丸而死事蹟大略昭載於節義錄三綱錄止得之弟秉節校尉止衖襲家庭之學當其亂負老母避亂于錦城山中城陷之日賊徒猝至欲害其母公哀乞代命翼蔽其母身被鋒刃流血淋漓倭奴憐而書話孝子給母粮六字令公佩之曰如有後至者則示之云云而去賊又大至母子俱不屈而死三父子忠孝大略俱昭載湖南節義錄三綱錄與本州邑誌而且道內儒生前後營邑呈狀如是昭然更不必一一懸錄三父子之忠孝一義士之忠節如是卓異久未蒙 褒贈節惠之典其爲子孫者生無顔於世而忠魂義骨死不杇於地矣幽明之間寧不寒心哉其在士林之公議不勝抑鬱生等▣…▣稟于本邑則題旨內李公三父子卓異之忠孝張公布衣擧義同日立節之事莅玆邑已有所詳見於湖南節義錄本州三綱錄與邑誌而未嘗不三復掩卷欽歎而思矣今觀此狀久未蒙 褒㫌節惠之典而至今湮沒▣…▣聞是如乎伏願▣…▣不至湮沒之地則不但爲士林之幸甚其於 國家㫌別忠孝激勵世道之風化未必無少補豈不美哉豈不休▣…▣▣▣ 處分癸巳四月 日羅州幼學 柳榮沃 吳繼洙 進士羅東綸 李心雨 幼學崔圭鉉 朴鼎陽 梁相衡 林肯圭 奇周鉉 羅瑢植 鄭㯳 張永載 裵瑜基 金泳懿 崔琦相 李炳壽 閔敬植 柳杞淵 綾州幼學 鄭義林 梁善黙 安喆煥 張命慎 裵學舜 丁斗煥 進士梁會益 幼學朴準謨 安宅煥 咸平幼學金勳 李學榮 鄭蘭 鄭煥彩 徐鳳寬 尹相度 安時良 金奎煥務安幼學 尹滋敬 朴民相 朴允相 朴在麟 羅啓煥 高敞柱 柳復基 進士林炳大 吳鎭龍 光州幼學 高人柱 高濟厚 尹範郁 朴源升 朴升柱 奇相鉉 金洪益 金洪穆 金晩植 金命植 南平幼學 崔聖敎 崔應敎 洪祐賢 洪弼周 尹大鎭 尹俊八 長成幼學 金穉煥 奇曾宇 進士 郭璟鍾 幼學 金堯雲 靈光幼學 高大鎭 金載穆 丁贊用 高時烋 金在淇 金在禧長興幼學 張永斗 文基垕 安奎鉉 韓國榮 金益寬 李興集 朴命權 張禹植 魏啓喆 宋伯圭 趙義振 靈巖幼學 朴圭鎭 崔鎭基 愼頭歲 李烋 李敏喆 朴漢龍 昌平幼學 高儕儒 鄭偉 鄭海晩 高台柱 高璥柱 寶城幼學 柳發榮 安啓煥 柳正煥 柳承煥 全州進士 朴麟萬 幼學 李炳璘 黃在天 鄭奎煥 茂長進士 吳道源 幼學 鄭鍾泰 李致雲南原進士 高宗柱 幼學 許牒 洪鍾根 趙性九 金在璜 李仁宇 高濟東 金平執 等都巡使[着押](題辭)偉績實行聞甚欽歎啓禮愼重蓋竢公議之愈蔚事卄八日[官印] 3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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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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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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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관통보류

1902년 이승학(李承鶴) 품목(稟目) 고문서-첩관통보류-품목 정치/행정-보고-품목 壬寅十一月十三日 都正 李承鶴 壬寅十一月十三日 李承鶴 潭陽郡守 行官[押] 潭陽郡守之章(2.5×2.4), 潭陽郡印 3顆(4.2×4.2)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02년 11월에 李承鶴이 潭陽郡守에게 올린 품목. 향교 교원 및 각 면의 直月이 될만한 사람을 薦望하여 올린다는 내용 *題音: 품목대로 시행하되 다른 임원을 정하고 差出하도록 하라는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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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첩관통보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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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10년 이승학(李承鶴)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庚戌八月八日 父 庚戌八月八日 李承鶴 李光秀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10년 8월에 이승학(李承鶴)이 아들 이광수(李光秀)에게 경술국치(庚戌國恥)의 슬픔을 표하고 속히 귀향토록 독려하는 내용을 전한 간찰. 1910년 8월에 이승학(李承鶴)이 아들 이광수(李光秀)에게 경술국치(庚戌國恥)의 슬픔을 표하고 속히 귀향토록 독려하는 내용을 전한 편지이다. 경술국치(庚戌國恥), 즉 대한제국이 일본에 합병되자 이승학은 의지할 곳도 원망할 곳도 없는 현실에 절망했다. 그는 하늘이 무심히 우리나라에 죄준 것을 원망하며 거리의 사람들은 미친 듯하고 취한 듯이 안정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런 상황은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며 이제 어디를 의지하여 살아야 하느냐며 한탄을 쏟아냈다. 이어 아들에게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귀향하라고 독려한 말을 길에 늘려놓았다. 그는 이광수가 서울에 산 십 년 동안 얻은 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냐며 탄식하고, 지금 상황은 눈으로 차마 볼 수 없고 귀로 차마 들을 수 없으니 다시 무슨 희망이 있겠느냐고 하였다. 또 아들이 귀향해야 하는 다섯 가지를 들었는데, '너의 아버지가 늙었으니 돌아와 봉양해야 하고, 너의 아들이 장성했으니 돌아와 가르쳐야 하며, 너의 부인이 원망하니 돌아와 위로해 주어야 하며, 가산(家産)이 줄어들었으니 돌아와 수습해야 하며 향리 사람들이 비웃나니 돌아와 은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거류(去留)는 무관하게 되었고 국가의 계책을 영위하는 것도 무익하게 되었다고 하며 거듭 귀향을 재촉했으며, 앞서 말한 다섯 가지의 의무를 저버리고 서울에서 시류를 좇아 사는 것은 천한 장부(丈夫)가 된다고 하면서 서울 생활에 연연하지 말고 돌아오도록 했다. 지금 처한 시대는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읽고, 「반초은시(反招隱詩)」를 노래할 때이니 다른 일은 도모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무엇보다 지금은 입이 있어도 말을 할 수 없고 해는 저무는데 길은 먼 형세라고 하며 송나라 주희(朱熹)가 말한 애통함을 참고 원한을 가슴에 새겨 절박한 마음을 갖는다는 뜻의 '인통함언박부득이(忍痛含怨迫不得已)'라는 여덟 글자를 명심할 때라고 하였다. 편지 말미의 내용을 보면 이승학이 왜 그토록 아들의 귀향을 원했는지가 드러난다. 이승학은 아들에게 처음부터 기신(起身) 하는 것은 어렵고 여의치도 않아서 공연히 검사(檢事)만 당하게 된다고 이른다. 이 말의 의도를 보았을 때 아들 이광수가 섣불리 의병에 참여할 것을 근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이광수는 을사조약(乙巳條約) 체결 이후 나인영(羅寅永) 등과 같이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여 을사 5적(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다가 일본군에 붙잡혀 진도(珍島)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편지는 세 장의 편지지에 나누어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마지막 장 배면에 추신을 적었는데, 편지의 전달에 관한 내용이다. 이승학(1857∼1928)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이며, 자는 자화(子和), 호는 청고(靑皋)이다. 전남 담양(潭陽) 장전리(長田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인 진사 이최선(李最善)이고, 이승학 본인도 기정진의 문하에서 배웠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팔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집으로 ?청고집(靑皋集)? 4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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