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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이승학(李承鶴) 단자(單子)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癸卯四月日 化民 李承鶴 癸卯四月日 李承鶴 潭陽郡守 行官[押] 潭陽郡印 3顆(4.8×4.4)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03년 4월에 李承鶴이 潭陽郡守에게 올린 단자. 작년에 부득이하게 향교 都正직을 맡았으나 그 직을 감당하기 어려우니 교체해 달라고 요청한 내용 *題音: 정황을 생각하면 미안하지만 그대로 맡아달라는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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舍弟見靖省之節家中之事兄來後一如否旅館寒燈客不眠此等事乎吾行三日登程而翌到南涯留宿而發則馬已生頉矣十七到完營未逢植兄爲之痡也尤甚進退經谷不得已解卜負人到公州留三日與伯陶聯行到果川又留一日初二入闉凡十九日也素河之上三四十里間綠林蜂起聞見可謂愁慘而無事得抵幸也馬也姑不得放賣而似不見利云耳今行不關於科汝輩不得知矣將西渡爲大觀而歸期勿間無待也家事這間必多葛藤而安心做去妹昏綾城云云處受諾則歲內期於過行可也向有松沙回答耶不然則送壽弟於壽谷使殷兄作一番之行探知無妨四嫂于禮開正二間爲之可也龍奴不得不率去而渠之母妻聞此則必將大驚善爲安撫農作如前任之另爲加護也植兄亦事一家丁則以此立證也如干谷數所捧依前例爲之則似無悲也見縮處數使奴丁收來零錢兩收用木花等執錢則厪厪可與幾朔矣向逢鄭龍旺於路中下去後五十緡起送爲約則今番似不食言矣此錢則無已則犯手不然則別念也債錢皆以吾下去區處爲言也凡此萬里行者細瑣家冗安能盡□念頭也君須細諒爲之光兒之課程使之嚴立爲門戶計也吾行是平生大經營亦不但遊覽而已何能多言也鄕隣宗族聞此必駭而卽子四方之志本自若是何必與斗筲子爭論也艸此付下沙想卽抵矣怱極不盡底凡事須細商量着念着念庚陽月七日 舍伯書果川墓祀今月初十元定云常進參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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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유영옥(柳榮沃) 등 상서(上書) 1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癸巳年四月日 幼學柳榮沃等 76名 城主 癸巳年四月日 [1893] 柳榮沃 羅州牧使 牧使[着押] [羅州牧使之印] 3顆(8.0x8.0) 전남도청(2019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C001_01_A00007_001 1893년 유학(幼學) 유영옥(柳榮沃) 등 76명이 나주목사(羅州牧使)에게 함평이씨(咸平李氏) 삼부자의 충효 행적에 대한 표창을 요청하며 올린 상서(上書). 1893년(고종 30) 4월에 유학(幼學) 유영옥(柳榮沃) 등 76명이 나주목사(羅州牧使)에게 나주 함평이씨(咸平李氏) 삼부자의 충효 행정에 대한 표창을 요청하며 올린 상서(上書)이다. 유영옥 등 총 76명의 유생들은 나주 함평이씨(咸平李氏) 가문의 이유회(李惟誨), 이지득(李止得), 이지항(李止衖) 삼부자(三父子)의 충효(忠孝)가 남달리 뛰어나 『호남절의록』, 『삼강록』 등에 기록되어 있음에도 아직까지 포정절혜(褒㫌節惠)의 은전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이 사실을 임금에게 아뢸 수 있도록 영문(營門)에 보고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문서에 따르면 이유회(李惟誨, 1534~1603)는 고봉 기대승의 문인이며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향리에서 은일하며 지낸 사적(事蹟)이 『삼강록』과 『나주읍지』에 들어있고, 아들 이지득(李止得, 1555~1594)은 임진왜란 때 군량미를 제공하고 의사 장경홍 등과 함께 의병 활동을 하다 흥양포 전투에서 순절한 내용이 『절의록』과 『삼강록』에 들어있으며, 이지득의 동생 병절교위(秉節校尉) 이지항(李止衖)은 임진왜란 때 어머니를 대신해서 죽었다고 한다. 이들 삼부자의 충효와 충절이 이같이 뛰어남에도 아직까지 포상을 받지 못하고 있음을 서술하였다. 당시 나주목사는 윤상익(尹相翊)으로 1891년 11월 13일에 제수되어 1893년 8월 21일까지 근무하였다. 나주목사는 이같은 요청에 대해 감영에 보고하여 등문(登聞)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처분을 내렸다. 한편 함평이씨 3부자의 표창을 요청하기 위해 나주 유생 유영옥을 중심으로 전라도 유생들이 동년(同年) 동월(同月)에 전라도 순찰사에게도 동시에 상서(上書)를 올렸다. 상서(上書)는 조선시대 민원서(民願書)인 소지류(所志類)로 그 서식은 다른 소지류와 약간 다르다. 이 문서는 관찰사·수령·암행어사 등에게 올리며, 그 내용은 산송(山訟)과 효행(孝行)·탁행(卓行)의 정려(旌閭)를 위한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인원이 많은 경우는 연명하여 올리기도 한다. 이 상서는 전래되고 있는 것이 많으며, 시대는 대개 조선 중기 이후에서 말기까지의 것이 대부분이다. 상서를 접수한 관찰사나 수령은 이를 검토하고 그 처분을 문서의 좌편 하단의 여백에 써놓는다. 이것을 제음(題音) 또는 제사(題辭)라 한다. 이와 같이, 처분한 내용을 써서 상서를 올린 사람에게 돌려준다. 그러나 수령에게 1차 올려서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2차, 3차 계속 올리며, 그래도 해결되지 않으면 관찰사에게 올리게 된다. 이러한 상서는 당시의 사회사정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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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皮封]通文三川 壽谷 柳村 后山校邨 下北山 聲山 先山舊邑 西面 星山 芝谷 煙川右通喩事下吏輩怙勢蔑法無變不有而至於犯葬柳眉巖先生墓所而極矣蓋其眼中有一半分不死士氣渠敢乃爾伏惟 先生何等道學節義其有功儒門扶植倫綱昭如日星累百年如昨日事婦孺輿儓尙能言之嗚呼先生生於湖南湖南之幸老於潭州潭州之福況其依履之藏在玆晨夕羹墻自倍餘人而縱下吏犯葬亦旣周歲曾不一擧陳狀遷延至今爲潭士者不得辭其責而知罪知罪今自長城講所起通告長官回喩列邑以今二十日會于先生墓下爛量議到陳狀邑營一以掘去一以請罪如不得請則抱疏叫閽乃其究竟事嗚呼名在儒籍爲先生奔走血脚與有榮焉貴縣士林亦使此中相通日迫恐未及聞知也玆以先通須及期來會而冠儒服儒孰不齊憤闕而不參則形跡殊異何足道何足道右敬通于昌平鄕中己丑九月十七日 進士李龜善幼學李奎永宋在黙宋來琦金永綺柳炳寬李承鶴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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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장문규(張文逵) 등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사회-조직/운영-통문 丙寅九月日 發文 出身 張文逵 等 7名 潭陽校宮 丙寅九月日 張文逵 潭陽鄕校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66년 9월에 장문규(張文逵) 외 6명이 담양향교(潭陽鄕校)에 서학(西學)의 무리를 몰아내기 위해 의병으로 참여해 줄 것을 독려한 통문(通文) 초본(抄本). 1866년 9월에 장문규(張文逵) 외 6명이 담양향교(潭陽鄕校)에 서학(西學)의 무리를 몰아내기 위해 의병으로 참여해 줄 것을 독려한 내용의 통문(通文) 초본(抄本)이다. 조선(朝鮮)이 건국된 지 400여 년 동안 교화가 잘 행해져 삼천리 강토에 병화(兵火)가 일어나지 않아 승평(昇平)의 때가 오래되었는데, 양이(洋夷)의 난리를 만나 혼란하여 왕업(王業)이 평안하지 않다는 것이다. 양이(洋夷)가 감히 그들의 호강(豪强)을 믿고 유입해 요사한 교육이 이어져 이륜(彛倫)의 근심을 일으켜 평안하지 못하다고 하였다. 또 전해 듣건대 군무(軍務)에서 장차 병사를 모아 외세를 물리치려고 결단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십실(十室)의 마을에 충신(忠信)한 이들이 존재하니 이 같은 상황에 어찌 분개(憤慨)하지 않겠느냐고 하며 의병 참여를 촉구했다. 또 우리 호남(湖南)은 본래 왕실의 풍패(灃沛)의 고향으로 계속해서 복을 받아 옥과 같은 문장을 짓는 자들의 연원이 되고, 기자(箕子)의 가르침을 따르는 충의(忠義)의 고장이며, 문정공(文正公)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밝은 가르침도 우뚝하여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과 같은 충혼(忠魂)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곳이라는 점을 들어 충의를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지역임을 강조했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지금 호남인들이 그들과 같지 못해서 감히 충신과 의사(義士)와 견주기는 힘들고 모은 군사들이 약하다는 것이 우려되지만, 오직 나라를 근심하여 이륜을 지키는 마음이 있고, 상사(上沙) 어른의 밝은 인도가 있으니, 바라건대 여러 군자께서는 각자 분발하여 감히 지체하지 말고 의병에 힘을 더해 달라고 요청했다. 각기 의병에 참여하여 서학(西學)의 무리를 섬멸하고 전성(前聖)의 도통의 연원을 밝히고 거듭 독려했다. 이어 장문규(張文逵) 등 통문을 작성한 이들의 성명이 적혀 있고, 추가로 이 통문을 속히 각 진(鎭)과 면, 리, 사찰에 전하여 의병에 참여할 인원의 명첩(名帖)을 만들어 곧바로 전주부모의소(全州府募義所)로 보내달라고 요청한 내용이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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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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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文伏惟肇基四百年宗社幸遙 靈於敎化風行倂生三千里封疆不見兵於昇平日久際右文之做治斥左道之亂法懼王業之不便安洋寇敢恃自强之勢洎人文之已宣朗妖敎恐斁彛倫之患宸裏不安於丙枕達報累至轉聞軍務將蒐于甲衣外攘難決克獻千古文物豈有被髮而祭者十室忠信非無激慨之義乎惟我湖南本道枌社綿籙兪出璿璜之源箕聖遺敎素稱忠義之鄕微高山安仰文正之明敎尙在與秋色爭高霽峰之忠魂不泯苐伏念吾儕其人非敢擬忠臣義士能犯火石不知募軍弱卒自赴陽火其在憂國秉彛豈非志士死命且復上沙丈席明訓典重回於閭下題敎摯故勸勉及此伏願僉君子各自奮發無敢遲回終軍之請縷才不倍於異代溫生之絶裾美罔專士古人於聖德之不忘乃氣義之攸在惟冀殲厥西學之寇昭前聖一貫道之淵源奠吾東封之社用供王萬曆年之洲休右敬通于潭陽校宮丙寅九月日 發文出身張文逵南宮濂徐俊豊幼學權守憲李存奎權大曄此亦中今此通文速傳于各鎭各面各里各寺刹願赴人員名帖先爲修成冊卽送于全州府募義所至無遲滯之地幸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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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平儒道會會則 第一條 本㑹는 咸平儒道會라 稱함第二條 本會事務所는 咸平鄕校에 置함第三條 本會員은 咸平에 居住하는 人士로서 儒道의 彰明發展에 協助贊同하는 이로써 組織함第四條 本會員類数는 十人으로 制恨하고 一邑八面에 各九十人式選出함一. 機會에 따라 四百五十人으로 擴大募集 할 수 있음二. 㑹員이 轉出或死亡할 境遇에는 該面內에서 補缺選出함第五條 會員年令은 五十歲以上七十歲까지로 制根하고 五年이 經過한後에는 再選出함但撗大募集會員은 年令의 制限이 無함第六條 本會는 儒敎思想을 培養하여 倫理道德의 風俗을 保守키로 目的함但中央儒道㑹로서 地方儒道組織이 有할 境遇에는 本會가 咸平地方組織을 代行키로함第七條 本會는 左의 任員을 置함會長一人 副會長二人 總務一人 財務一人과 邑面交部長및幹事各九人(各面二人)第八條 支部長은 本會를 大表하고 副支部長은 支部長을 補佐하며 支部長有事時는代理行事하고 總務는 會務를 總括處理하고 財務는 財政을 管掌하고 邑面支部長과 幹事는 支部長의 命에 依하여 地域會員의 指導及連絡에 當함第九條 支部長, 副支部長은 定期總會에서 選出하고 總務, 財務, 邑面支副長, 幹事는 支部長圍이 任命함第十條 任員의 任期는 滿二年으로 하되 共히 再任할 수 있음第十一條 本㑹는 年一回의 定期總會와 臨時總會를 召集함定期總會는 每年十月上旬 開催하고 臨時總會는 必要에 따라 支部長이 召集함第十二條 本會經費는 創立當時加入員이 五百원以上 據出한 基金의 利息金과 其他贊助金으로 充當함第十三條 本會는 會員名簿 및 規約會議錄 金錢出納簿等을 備置함附則一. 本會則은 創立當日부터 施行함 二. 本會則의 修正加減은 總會에서 決定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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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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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青年儒道會 要綱 憲章 및 定款 趣旨文歷史는 現實의 反覆이며 未來의 胎動이다. 時代의 變遷은 無窮한 가운데 斯道의 遠大한理想과 傳統이 기우러진 지 이미 몆 世代가 지났다.그동안 西歐文明의 合理主義的 文化樣式과 産業技術의 發展이 世界文化를 席捲함으로써 人類社會는 하나의 世界로 變貌하였으며 歷史는 長足의 進步와 成長을 記錄하여 왔다.그러나 技術文明의 一方的 發展은 이 時代의 모든 人類에게 보다 크고 깊은 現實的인 憂慮와將來에 대한 不安한 展望을 提起하고 있으며 人間의 尊嚴性에 대한 價値와 人類平和를 向한 信念을 威脅하고 있다. 이것이 비록 時代的인 趨勢라할지라도 悲觀的인 現實만은 안이다. 人間精神의 無限한 創造能力으로 引導되는 偉大한 人類史의 一大轉換을 이룩하는 한 時代의 終結이며 歷史의 過程이라 믿는 것이다.이제 우리는 所望의 世界를 열고저 한다 普遍的으로 人間精神을 土臺로 繁榮된祖國과 創造의 世界를 建設하는 것이다. 이 모든 人類의 共同課題에 當面하여 이時代를 風靡하고있는 不信과 不安의 要因을 冷徹히 直視하고 人類良心의 偉大한 根幹을 再認識하므로써 眞理와 正義의 信念을 새롭게 밣이는 것이 그 最善의 길임을 確信한다. 이에 우리는 人類文化 最大遺産이며 이 民族의 脈絡인 儒道를 繼承再闡明하므로써 創造的 世界를 이룩하고자하는 人類共同目標에 그一翼을 担當코저한다儒道는 宗派를 超越한 實踐的 世界精神이다. 우리는 모든 文化와 歴史의 참된 矜持를 尊重하며 平和와 繁榮을 念願하는 人類의 모든 兄弟들과 그 길을 함께하고 있다.우리는 世界의 모든 民族이 하나의 兄弟임을 알고 있으며 그들의 成就한 人類史의 偉大한 功積에 盡心으로 敬意를 表하는 바이다. 또한 危機에 處해 있는 現代文明의 脆弱点을 改善할 수 있다면 文明은 分明히 우리의 未來와 繁榮을 約束하는 큰 힘이 되며保障이 될 것이라고 믿고 世界의 모든 兄弟들의게 協同과 總和를 呼訴한다. 이것이바로 大同이며 信念이다. 우리는 現代民主主義의 諸原則을 尊重한다. 民主民本의 理想은 儒道의 基本이다. 따라서 自由平等의 理想과 人道的正義의 具現이 儒道를 通하여 보다 確固히 實現될 수 있음을 確信한다. 苦難과 試鍊을 克服하고 良心과正義를 追求하여 人類의 未來를 爲해 믿음과 所望의 보다 큰 빛을 밝히는 것은 知性의使命이다. 그러나 危難의 時代를 處하여 現代知性은 果然 무엇을 生覺하며 무엇을求하고 있는가? 世界는 彷徨하고 있으며 人類는 漂流하고 있다. 아무도 돌아보지않고 아무도 찾고저 하지 않는다. 人間性의 回復과 새文化의 創造가 時代的 要請임에도 不拘하고 人倫正道는 날노 땅에 떨어지고 文明은 極限狀況으로 치닫고 있다우린 世界萬邦에 告하여 孝悌忠信의 大義를 克明하며 修齊治平의 大道를 宣布한다奉仕와 獻身으로 㸃綴되는 不滅의 良心으로 人類共榮에 이바지할 것이다. 우리는이 길을 나아감에 있어 두려워하지 않고 주저하지 않는다. 東西를 一貫한 不滅의 理性이 우리를 引導하며 偉大한 先賢의 遺業이 永久히 우리와 함꺼 있다. 이것으로서韓國青年儒道會創立의 趣旨를 代하며 보다 많은 同志들의 參與를 期待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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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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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1924년 이승학(李承鶴) 영수증(領收證) 03 고문서-명문문기류-근현대문서 경제-회계/금융-영수증 大正十三年二月一日 潭陽郡昌平面會計員 金永龜代 昌平面 長華里 李承鶴納 大正十三年二月一日 金永龜代 李承鶴 전남남도 담양군 李彦秀 2顆(1.0×1.0)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24년에 이승학이 담양군 대덕면에 지세를 납부하고 받은 영수증. 1924년 2월 1일에 창평면(昌平面) 장화리(長華里)에 사는 이승학(李承鶴)이 종중(宗中)의 지세(地稅)를 납부하고 받은 영수증이다. 이 문서는 담양군(潭陽郡) 대덕면(大德面) 회계원(會計員) 김영구(金永龜) 대리인 이언수(李彦秀)의 명의로 발행했다. 이승학이 납부한 금액은 1923년도 제2기 지세 11원(円) 96전(錢), 지세부가세(地稅附加稅) 3원 22전, 지세할(地稅割) 5원 50전, 지세부가 3원 58전으로 총 24원 26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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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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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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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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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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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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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담양(潭陽) 전주이씨(全州李氏) 명단(名單) 1 고문서-치부기록류-문중기록 사회-가족/친족-종중/문중자료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담양 전주이씨 가문 사람들 명단. 이름과 주소가 함께 표기 *원문: 泰孝 贊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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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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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齋隨行案 _0001 【甲戌】都有司 金基鍑【字鍾碩號愼菴】 商山人 忠簡公德生后掌議 張泳相【字敬安號止堂】 仁同人 參贊百林后李啓哲【字應七】 咸平人 孝友堂慴后色掌 沈孝澤【字春成】 靑松人 葵菴安枰后李載官【字奉植】 咸平人 生員敦友玄孫_0002 【乙亥】都有司 金東昕【字化善號後翠】 金海人 翠水希訥后掌議 李文範【字東一號逰松】 咸平人 孝友堂慴后沈棋駿【字龍善】 靑松人 葵菴安枰后色掌 羅承龍【字 】 錦城人 松坡珏后鄭文采【字貴童】 河東人 景烈公地后_0003 【丙子】都有司 魯玟杓【字文玉號絅齋】 咸平人 翰林有顔后掌議 尹沃炳【字啓伯號箕隱】 坡平人 秋塘恒植子鄭元植【字乃春】 光山人 追遠堂浚后色掌 金東旭【字 】 金海人 翠水希訥后朴南燮【字聖來】 密陽人 吏參承栗后_0004 【丁丑】都有司 羅烋成【字福慶號松塢】 錦城人 監察世緝后掌議 安基德【字鎭洪】 竹山人 文惠公元衡后朴準容【字贊明】 密陽人 吏參承栗后色掌 趙珍衡【字南衡】 漢陽人 良敬公涓后金正基【字 】 商山人 忠簡公德生后_0005 【戊寅】都有司 李載烈【字豪俊號龍隱】 咸平人 孝友堂慴后掌議 沈棋洪【字敬禹】 靑松人 葵菴安枰后崔炳休【字彥容】 慶州人 文昌侯致遠后色掌 金相玉【字 】 金海人 鶴城君完后全瑜鍾【字 】 天安人 大提學翊后_0006 【己卯】都有司 金鸞洙【字瑞玄號交南】 金海人 翠水希訥后掌議 李啓恒【字永芳號忍齋】 咸平人 孝友堂慴后趙炳雨【字性彥】 漢陽人 忠靖公仁沃后色掌 李相烈【字東一】 慶州人 文忠公齊賢后朴龜培【字 】 密陽人 文景公忠元后_0007 【庚辰】都有司 尹沃炳【字啓伯號箕隱】 坡平人 秋塘恒植子掌議 李珞範【字容三號石溪】 咸平人 孝友堂慴后羅承允【字陽鉉】 錦城人 松坡珏后色掌 俞鍾根【字 】 杞溪人 進士敬止后金大鉉【字 】 光山人 校理錫元后_0008 【辛巳】都有司 張鉉斗【字明玉號林川】 興城人 野憂以吉后掌議 鄭程鉉【字德萬號桂隱】 晉州人 忠莊公璜后尹伊炳【字光玉】 坡平人 東湖滋學孫色掌 李公範【字 】 咸平人 孝友堂慴后金鏡萬【字萬錫】 金海人 嘉善鍊宅后_0009 【壬午】都有司 李圭燦【字致明號小庭】 慶州人 文忠公齊賢后掌議 羅丰柱【字甲洙】 錦城人 松坡珏后李啓煥【字 】 咸平人 孝友堂慴后色掌 趙誠鎰【字 】 漢陽人 忠靖公仁沃后金斗洙【字判玉】 金海人 翠水希訥后_0010 【癸未】都有司 安基彥【字德弘號一樂】 竹山人 文惠公元衡后掌議 鄭炳弘【字德仲】 晉州人 忠莊公苯后金炳柱【字安聲號蓮坡】 金海人 文敬公琢后色掌 陳成寅【字奇銖】 驪陽人 錦沙二孫后牟鍾洙【字 】 咸平人 截江恂后_0011 【甲申】都有司 李文範【字東一號遊松】 咸平人 孝友堂慴后掌議 金珪馹【字君千號弦齋】 光山人 應教孝忠后金基根【字宗範】 商山人 忠簡公德生后色掌 金福鉉【字 】 金海人 鶴城君完后牟鍾表【字 】 咸平人 牧使世蕃后_0012 【乙酉】都有司 金在表【字太業號坎山】 光山人 校理錫元后掌議 李直烈【字 】 固城人 容軒原后金鍊喆【字大聲】 商山人 忠簡公德生后色掌 朴在武【字 】 務安人 楓亭義龍后金炳國【字 】 慶州人 鷄林君稇后_0013 【丙戌】都有司 安鍾泰【字洛中號凡儂】 竹山人 文惠公元衡后掌議 沈錧澤【字聲彩號晩坡】 靑松人 葵菴安枰后金鎬炫【字判天】 商山人 忠簡公德生后色掌 李珍雨【字 】 全州人 完原君{忄+遂}后李文觀【字 】 全州人 襄度公天祐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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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학(李承鶴) 간찰(簡札) 4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寄舍弟書 李承鶴 舍弟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이승학(李承鶴)이 동생에게 어머니의 기일(忌日) 불참 소식과 서울살이를 전하고 여러 가지 집안일 등에 관해 묻고 당부한 내용의 간찰. 이승학(李承鶴)이 동생에게 어머니의 기일(忌日) 불참 소식과 서울살이를 전하고 여러 가지 집안일 등에 관해 묻고 당부한 내용의 편지이다. 편지에서는 먼저 이승학 본인의 안부를 전하였다. 돌아가신 어머니 기일이 임박했으나 서울에서 응대하는 일들로 인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면서 집안일을 맡은 동생들에게 미안함을 전했다. 또 작년 아버지 기일에도 참석하지 못했으니 작고하신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 전할 길 없어 애타는 심정만 들끓고 있다고 하면서 기다리는 가족들께도 죄송한 마음을 전했다. 이승학의 어머니는 성주이씨(星州李氏)로 지평(持平)에 증직(贈職) 된 이기대(李箕大)의 여식이다. 임오년(1822)에 태어나 을축년(1865) 4월 3일에 졸하였다. 슬하에 이승학과 이승구(李承龜)를 두었다. 편지에서 말한 어머니 기일은 음력 4월 3일을 이른 것이다. 이승학의 아버지 이최선은 을유년(1825)에 태어나 계미년(1883) 11월 23일에 졸하였다. 계속에서 이승학은 고대하던 소식에 관해 전한다. 이곳에서 한 달 동안 머물면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23일에 영진(永珍)이 왔으나 편지를 가져오지 않았고, 그믐날에 복군(卜軍, 짐꾼)이 와서 비로소 편지를 전해주었다는 것이다. 모든 일은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의혹이 깨지고 고대하는 마음이 조금 풀렸으나 궁극에는 신운(身運)에 달렸다는 것이다. 이미 지난 일은 말할 것이 못 되니 편지를 본 후에 내려갈 계획이라고 전했다. 그리고 동행한 이들도 있고 여러 가지 사정이 많아 4~5일간은 출발하기 어렵다는 말을 덧붙였다. 여기에서 이승학이 말한 고대한 소식이 과거(科擧) 시험과 관련된 것인지, 집안일에 관한 것인지 편지에 드러나지 않아 알 수 없다. 간찰은 수신인과 발신인이 구체적인 내용을 알고 있다는 전제에서 쓴 문서이기 때문에 내용이 생략된 경우가 많다. 특히 친밀하고 각별한 사이에서는 더욱 그러한데, 이승학이 동생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종종 주요한 내용을 생략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본인의 소식을 전한 후에 이승학은 여러 가지 집안일에 대해 적었다. 외숙(外叔)의 상(喪)은 서울까지 부고가 전해지지 않아 오늘 들었으나 거애(擧哀)를 제대로 표출할 길이 없어 서글프다는 내용, 외숙의 장례(葬禮)를 치를 때 숙질(叔姪) 중에 호상(護喪)을 맡아야 할 텐데 어찌 될지 모르겠다고 염려한 내용이 보인다. 지난달 26일에 용국(龍國) 형에게 편지를 붙였는데 말은 많았으나 통쾌하지 못한 것은 편지를 보지 못하고 말했기 때문이라는 내용, 영진에게 편지를 부친다는 내용, 매번 동생들의 과한 염려를 받고 있다는 내용, 용국 편으로 부친 편지를 용대(龍臺)가 전해주었는지 묻는 내용, 문중으로 온 지평(砥平) 어른의 아버지 상에 대한 부고 전달 여부를 묻는 내용, 영진이 환전한 돈 2백 냥을 찾아 쓰라는 내용, 부쳐준 의복이 왔다는 내용, 짐삯[駄價]을 주어 보냈다는 내용 등 집안일에 대해 상세히 다뤘다. 이 편지의 수신자로 적힌 '사제(舍弟)'는 이승학의 손아래 동생인 이승구를 이른 듯하다. 또 편지에 간지가 있지 않아 시기를 알 수 없으나 내용으로 미뤄봤을 때 이승학이 과거 시험을 위해 서울에서 생활한 1890~1891년 무렵으로 보인다. 또 이승학의 아버지 기일인 11월 23일에 서울에 있었다는 내용과 어머니 기일인 4월 3일이 임박했다는 것으로 보아 편지가 쓰인 시기는 대략 1891년 3월 어느 날로 추정된다. 이승학(1857∼1928)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이며, 자는 자화(子和), 호는 청고(靑皋)이다. 전남 담양(潭陽) 장전리(長田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인 진사 이최선(李最善)이고, 이승학 본인도 기정진의 문하에서 배웠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팔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집으로 ?청고집(靑皋集)? 4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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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寄舍弟書此日間吾先孺人喪餘之日而留滯漢中應事未歸使爾曹將事作此大不肖之之責乎去歲先考忌日亦經于此今又至此此罪何以自贖南望欲哭而未能欲奮飛而末由祗自焦盡欲滅而已家中待我亦知如是而已矣無及則所謂浮名將誤我一則家計更誰咎哉栢叔之去此地之想多已悉此地逗遛只待自下消息故坐了一箇月永珍二十三日來見而不傳書到晦日卜軍入來始傳見諸般不如意皆已破惑稍解苦待之心而末稍究竟只繫身運之如何旣往事更不足說而見書後卽爲下去作定則此中同行與凡事久留之餘多不容易不出四五日間發行耳外叔主喪事京中無訃故今始承聞而客中難以擧哀衋然徒傷奈何葬時爾叔侄中護喪不可無而又未知如何也去二十六日龍國兄發去付書言多未暢者以其不見書故也永珍似先我入今方下去而先付此書者此人也似先吾而去又每□爾曺之過慮也龍國便書使龍臺傳之而卽到否砥平丈竟爲遭外艱有通訃於門中此中來到而自島中或又通訃來耶永珍換來二百兩覓用耳如此先換三加則爲害不少而衣服付來駄價常五五兩捧去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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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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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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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이승학(李承鶴) 간찰(簡札) 5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寄舍弟書 李承鶴 舍弟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이승학(李承鶴)이 동생에게 귀가가 늦어진 이유와 여러 가지 집안일에 관한 당부를 전한 내용의 간찰. 이승학(李承鶴)이 동생에게 귀가가 늦어진 이유와 여러 가지 집안일에 대한 당부를 전한 내용의 편지이다. 화촌(華邨) 편으로 보낸 편지의 도착 여부를 물으면서 그 편지에서 언급한 귀에 대한 사정을 적었다. 귀가할 날짜를 정하려고 했으나 확정하여 어렵다고 하면서 그 연유를 전했다. 서울에서 과거 시험을 위해 세월을 보내고는 있지만, 미련이 없기를 위해서라도 서울에 더 머무는 것이 무익하게 돌아가는 것보다 낫다는 내용으로 동생을 설득하였다. 또 양씨(梁氏)와 기씨(奇氏) 두 분과 함께 거처하면서 함께 행동하기로 작정했는데, 그들이 서울에서 여름을 넘기기로 계획했다는 것이다. 이승학도 앞으로 있을 회시(會試)를 위해 7월까지는 머무를 것이라고 하면서 귀가를 미룰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혔다. 또 임금께서 능행(陵行)이 있고 나서 증광시(增廣試)가 열릴 것이라는 소문이 있는데, 이는 헛된 소문이 아닐 것이라고 하면서 과거 시험에 대한 희망을 동생들께 전달하기도 했다. 이승학이 귀가가 늦어지는 이유에 대해 상세하게 알린 것으로 보아 동생들이 이승학의 귀가를 재촉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생들이 이승학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지 않아 수신자의 입장을 파악할 수 없어 아쉽다. 편지 중반에는 여러 가지 집안일에 관한 것으로 채워졌다. 이승학은 집안일의 낭패는 스스로 도모한 것이 아니라 가운(家運)이 그러해서이니 깊이 우려하지 말라고 위로했다. 이때 말한 집안일에 관해서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이전 편지에서 누이의 혼사를 지속해서 말한 것으로 보아 혼사가 성사되지 않은 일을 이른 듯하다. 이어 이승학은 본인이 서울에 있으면서 가족들을 돌보지 않은 죄책감을 표하며 과거 시험에 대한 결심을 전했다. 그는 동생들이 식솔들의 생활을 두려워하고 염려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고 하면서 올해를 기한으로 더는 과거 시험을 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본인이 없는 동안 많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참고 견디라고 당부한 내용과 농사와 독서를 신경 쓰라고 당부한 내용 등을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눈앞의 어려움 때문에 곡식의 종자(種子)를 함부로 사용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고 하면서 편지를 마쳤다. 추신으로 용국(龍國) 형 편에 부친 편지를 받아 보았는지를 물었다. 이승학은 서울에 있으면서 아는 인편을 통해 편지를 보냈는데, 항상 편지의 전달 여부를 물어 확인한 것으로 보아 당시 편지가 잘 전달되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편지의 수신자는 사제(舍弟)로 되어있는데, 내용으로 볼 때 전남 창평에 있는 이승학의 동생인 이승구를 비롯한 동생들 모두에게 부친 것으로 보인다. 또 편지 끝부분이 잘려 마지막 인사말과 간지를 알 수 없는데, 내용으로 추정컨대 이 편지는 이승학이 과거 시험을 위해 서울에서 생활한 1890~1891년 무렵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 이승학(1857∼1928)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이며, 자는 자화(子和), 호는 청고(靑皋)이다. 전남 담양(潭陽) 장전리(長田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인 진사 이최선(李最善)이고, 이승학 본인도 기정진의 문하에서 배웠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팔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집으로 ?청고집(靑皋集)? 4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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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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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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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93년 유영옥(柳榮沃) 등 상서(上書) 2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癸巳四月日 道內儒生柳榮沃 等 112名 巡相閤下 癸巳四月日 [1893] 柳榮沃 巡相閤下 都巡使[着押] □…□ 3顆(9.5x9.5) 전남도청(2019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C001_01_A00007_001 1893년(고종30)에 도내(道內) 유생(儒生) 유영옥(柳榮沃) 등 112명이 순사또(巡相)에게 함평이씨(咸平李氏) 삼부자의 충효 행적에 대한 표창을 요청하며 올린 상서(上書). 1893년(고종 30) 4월에 도내(道內) 유생(儒生) 유영옥(柳榮沃) 등 112명이 순사또(巡相)에게 나주 함평이씨(咸平李氏) 삼부자의 충효 행적에 대한 표창을 요청하며 올린 상서(上書)이다. 전라도 유생 유영옥, 오계수(吳繼洙, 1843~1915) 등 총 112명은 나주 함평이씨(咸平李氏) 가문의 이유회(李惟誨), 이지득(李止得), 이지항(李止衖) 삼부자(三父子)의 충효(忠孝)가 남달리 뛰어나 『호남절의록』, 『삼강록』 등에 기록되어 있음에도 아직까지 포상을 받지 못한 사실을 서술하였다. 또 이 문서에 앞서 본읍(나주목)에 같은 사항의 문서를 올리어 나주목사로부터 감영에 보고하여 등문(登聞)을 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판결을 받은 사실을 알리며 순사또께 나라에서 특별히 충효의 정려를 내려주기를 요청하였다. 이와 같은 요청에 전라도 순찰사는 행실을 들으니 매우 흠탄하지만 예조의 계문(啓聞)은 신중해야 하니 공의(公議)가 더 확산되기를 기다리라고 하는 처분을 내렸다. 상서(上書)는 조선시대 민원서(民願書)인 소지류(所志類)로 그 서식은 다른 소지류와 약간 다르다. 이 문서는 관찰사·수령·암행어사 등에게 올리며, 그 내용은 산송(山訟)과 효행(孝行)·탁행(卓行)의 정려(旌閭)를 위한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인원이 많은 경우는 연명하여 올리기도 한다. 이 상서는 전래되고 있는 것이 많으며, 시대는 대개 조선 중기 이후에서 말기까지의 것이 대부분이다. 상서를 접수한 관찰사나 수령은 이를 검토하고 그 처분을 문서의 좌편 하단의 여백에 써놓는다. 이것을 제음(題音) 또는 제사(題辭)라 한다. 이와 같이, 처분한 내용을 써서 상서를 올린 사람에게 돌려준다. 그러나 수령에게 1차 올려서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2차, 3차 계속 올리며, 그래도 해결되지 않으면 관찰사에게 올리게 된다. 이러한 상서는 당시의 사회사정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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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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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이돈영(李敦榮) 등 격문(檄文) 초(抄) 고문서-서간통고류-격문 사회-조직/운영-격문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발발 때 이돈영(李敦榮) 등이 의병 참여를 촉구하기 위해 전주이씨(全州李氏) 제종(諸宗)에게 보낸 통문 2편의 초본(抄本)이다.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발발 때 이돈영(李敦榮) 등이 의병 참여를 촉구하기 위해 전주이씨(全州李氏) 제종(諸宗)에게 보낸 통문 2편의 초본(抄本)이다. 첫 번째 통문은 병인년(1866) 9월에 판종정경(判宗正卿) 이돈영(李敦榮) 외 12명이 의병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전주이씨 제종에게 보낸 것이다. 통문의 상단에서는 예부터 국가에 치란(治亂)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와 같아서 잠깐 겪은 위기에 불과했다면 근일의 양이(洋夷, 병인양요(丙寅洋擾))가 국경에 침범한 일은 예부터 없었던 일대 변괴(變怪)라고 하며 병인양요의 위험성을 알렸다. 이어 우리나라는 단군(檀君)과 기자(箕子)의 유풍을 세습하고 논맹(論孟)의 유훈을 외고 예악과 문물은 중화(中華)를 따르는 천하 만방에 떳떳함이 있는 나라인데, 저 양이들이 창궐(猖獗)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저들을 전멸시켜야 한다고 의기(義氣)를 고취 시켰다. 게다가 우리 전주이씨 제종은 왕실의 후손으로서 임금께서 한 집안과 같이 돈독하게 대해주시는 은혜를 입었으며 흥선대원군께서도 친목과 은택을 내리시어 감복을 받고 있으니, 바로 이때가 은혜를 보답할 시기라고 하며 의병 참여를 촉구했다. 이어 전주이씨 제종께서 일심으로 협력해서 방책을 진달하여 적을 막고 섬멸할 대책을 모색하자고 하면서, 만일 신하 3천명이 일심이 된다면 큰 공훈이 된다고 하였다. 저 양이들이 비록 강하더라도 한 마음으로 맞선다면 어려울 것이 없을 것이니 갖자 의기(義氣)를 높여 함께 국사(國事)에 힘쓰기를 바랐다. 통문의 주요 내용이 끝나고, 작성된 시기인 '丙寅九月日'과 발신인인 이돈영 외 12명의 명단이 표기되었다. 또 추가로 의병에 참여코자 하는 이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보내면 곧바로 종친부(宗親府)에 모여 상세히 살펴 별도로 처분할 것이라고 덧붙인 내용이 등사되었다. 두 번째 통문은 전(前) 참지(參知) 이윤수(李潤壽) 등 14명이 의병 참여를 촉구하면서 전주이씨 제종에게 보낸 것이다. 군신(君臣) 관계는 부자(父子) 관계와 같아서 아버지가 위급하면 아들이 보호해주고 아들이 위기에 놓이면 아버지가 막아주는 것이라는 말로 통문을 시작했다. 전주이씨 종파(宗派)는 임금에 대해 공적으로는 군신의 관계이지만 사적으로는 종족이라고 하면서 의병 참여를 독려했다. 게다가 전주이씨 제종은 ?선원보(璿源譜)?에 종인으로 입적되어서 여러 혜택을 받고 있으며, 우리 임금이 등극한 이후로는 지극한 은혜를 받았기에 전주이씨 제종은 양이의 침범으로 위기에 놓인 종묘와 사직을 위해 몸소 의기(義氣)를 실천할 때라고 독려했다. 이 통문 하단에 호남(湖南)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나온다. 호남은 풍패(灃沛, 임금의 본관이 있는 곳)의 고을로, 논맹의 풍습이 깊어 임진왜란에 진신(縉紳)과 장보(章甫) 등이 일제히 의병에 참여하여 전장으로 나서기도 하고 군량미를 보내주기도 하는 등 큰 절개를 세워 아직도 모범이 되고 있다고 하였다. 이를 모범으로 하여 전주이씨 제종은 이 통문을 들은 즉시 지체하지 말고 한결같이 임진년(1592)의 예에 따라 병사를 모집하거나 군량미를 모아 이 난리를 말끔하게 이겨내어 종사(宗社)를 안정시켜 조종(祖宗)이 길러주신 은혜에 보답하여 신민의 치욕을 씻자고 하였다. 이어 적성 시기인 '丙寅九月十日'이 표기되어 있고 발신인인 이윤수 외 14명의 명단이 표기되었고, 주의할 사항을 조목별로 정리하였다. 조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일은 의기를 모아 거행하는 일이기 때문에 억지로 하지 말 것, 각 읍에 도유사(都有司)를 뽑고, 유사(有司)의 명첩(名帖)을 먼저 책으로 만들어 보낼 것, 양이의 강화도 침범은 매우 위급한 사안이기 때문에 시일에 늦지 말 것, 종친들이 먼저 효유(曉諭) 하여 나서되, 성씨를 논하지 말고 모두 함께 일에 참여하도록 할 것, 이 통문을 등사하여 속히 여러 읍에 전달하여서 한 읍도 지체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순상(巡相)에게도 이 통문 내용을 직접 전해 거행하여 흥선대원군의 분부를 받들 것이라는 내용이 보인다. 이윤수(李潤壽, 1802~1871)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치오(致五), 호는 오소(吾巢)이다. 이이박(李以鎛)의 아들이며 전라도 운봉(雲峰)에서 살았다. 병인양요 때 병조 참지로 있으면서 치밀한 작전을 세워 큰 공을 세웠다. 당시 섭정하던 흥선대원군이 '호남 제1 재상'이라고 칭송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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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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