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이승학(李承鶴)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庚子至月卄七日 父 庚子至月卄七日 李承鶴 李光秀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00년 11월에 이승학(李承鶴)이 아들 이광수(李光秀)에게 편지 전달의 문제를 상세히 알리고 여러 가지 소식 등을 전한 내용의 간찰. 1900년 11월에 이승학(李承鶴)이 아들 이광수(李光秀)에게 편지 전달의 문제를 상세히 알리고 여러 가지 소식 등을 전한 내용의 편지이다. 편지 상단에는 최근 오고 간 편지를 확인하고 그동안 잘못 전달되거나 위작(僞作) 편지가 왔다는 내용 등을 자세히 적었다. 이달 십 일 사이에 우체국으로 보낸 편지는 받았는지, 근래에는 다른 편지를 쓴 적이 없는지 묻고, 지난번에 네가 그믐쯤에 편지를 보냈다고 하는데 아직 오지 않았다는 말을 전했다. 또 본군(本郡)의 수리(首吏, 향리의 우두머리) 편에 윤달 8월에 편지를 보냈는데 9월에 보았느냐고 묻고 그 편지 이후 9월에 편지를 보냈는데 부쳤다는 말은 들었으나 답장을 보지 못했다는 말을 하였다. 이렇듯 편지의 전달이 문제가 계속되자 이승학은 편지 전달자로 보이는 경홍(景弘)을 만나 그 연유를 물어 확인하여 편지가 잘못 전달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알렸다. 소산(小山) 측으로 보낸 편지와 백동(栢洞) 편으로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도 문제가 생겼다고 하면서 중간에 다른 곡절이 있었는지 아니면 아들이 잘못하여 그렇게 된 것인지를 확인하면서 믿을 만한 곳으로 보내야 한다고 당부했다. 게다가 경지(敬之) 편으로 보내온 답장은 봉투가 열린 채 왔고, 월평(月坪)의 김장수(金長水)가 전해준 편지는 위작(僞作)이었다고 탄식했다. 이 편지를 보면 일부는 아들의 필적이 맞으나 다른 사람의 필적이 들어있다고 하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모르겠다고 하며 아들의 부주의함을 탓하였다. 이승학은 아들이 세인(世人)들의 구설을 받고 있지 않은지 걱정하기도 하면서 '아들에 대해서는 아버지가 가장 잘 안다'는 말이 있는데 어떻게 아들을 다 알 수 있겠느냐며 걱정하는 한편, 인심이 효박(淆薄)하고 변괴(變怪)가 여러 가지로 발생한다고 하며 윤리와 강상(綱常)이 무너지고 있는 현실을 통탄하기도 했다. 또 연평(延平) 이귀(李貴)와 연양(延陽) 이시백(李時白) 부자(父子)의 예와 같이 서로를 알아주는 부자지간이 되기를 기약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어 그간 이승학이 겪은 여러 가지 소식을 전했다. 본관(本官)이 행한 수접례(酬接禮)와 회사례(回謝禮)에서 겪은 일, 남찰(南察)이 갑자기 떠나 작별하지 못했다는 내용, 새로 부임한 관찰사(觀察使)가 그믐 전에 영(營)에 간다고 하는데 혹시 찾아뵐지 묻는 내용, 난세에서 영달(榮達)을 구하는 것보다는 성명(性命)을 온전히 하는 일이 우선이라는 내용, 문중의 일은 대종(大宗)에서 맡아 할 것이라는 내용, 서당계(書堂契)가 문제가 많으니 차라리 분파(分破)하는 것이 낫다는 내용 등 이승학에게 있었던 일과 당부할 일을 낱낱이 알렸다. 또 위정척사(衛正斥邪) 의식을 지닌 인물 등의 근황을 전한 내용도 확인된다. 여름에 사문(斯文) 박정수(朴貞洙)가 의암(義庵) 유인석(柳麟錫)이 지은 서찰을 보여 주었다고 전했다. 유인석은 요동(遼東)에서 ?동국풍화록(東國風化錄)?을 지어 발행할 계획이라고 하였는데, 이승학은 그 책에서 충(忠), 효(孝), 열(烈), 도덕(道德), 절의(節義), 사업(事業)의 내용을 다루는 것은 좋지만 지나치게 방대하게 하면 마무리가 잘 될지 걱정이고 이를 따르는 자가 있을지 우려된다고 밝혔다. 또 호서(湖西)의 송병직(宋秉稷)이 ?존화록(尊華錄)?을 엮는다고 했는데, 일전에 평동(平洞) 대감의 친척인 무주(茂朱) 이승덕(李承德)이 3책을 가지고 왔다고 전했다. 아들 이광수가 준비하는 과거 시험에 관한 내용이 보인다. 이광수는 1901년 경의문대(經義問對)로 선발되어 성균관(成均館) 박사(博士)가 되었다. 경의문대는 갑오개혁 이후로 만든 시험 제도로, 성균관 대사성이 문제를 내어 각 도(道)에 하달함으로써 관찰사로 하여금 전국의 유생에게 그에 대한 문대(問對)를 해 올리도록 하고, 그중에서 일정한 수를 뽑아 한성에 소집하여 재차 시험을 치고 최종 합격자에게 직함을 주는 제도이다. 이승학은 편지에서 시험이 아직도 미뤄지고 있느냐고 걱정하면서도 만일 성균관 박사가 된다면 제왕묘(帝王庙)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라고 요청하면서 합격에 대한 믿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또 시험을 통과해 관리가 되었을 때 처신할 도리에 대한 조언도 덧붙였다. 당시 이승학의 시대 인식을 볼 수 있는 구절도 편지에서 확인된다. 이승학은 이 세상에 살면서 당대의 일을 알지 못하는 것은 농아(聾啞)와 같다고 하며 현실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라고 하였다. 지금 해외 신문을 보면 괴탄(怪誕)하다고 하며 그 대략을 보면 남북(南北)의 풍속이 다르고 동서가 숭상하는 것이 다르다고 하였다. 지금 서울 상황은 이러한 모습들이라고 하면서 아들에게 외물(外物)에 끌려 다니지 않도록 하고 때에 맞게 성찰하도록 당부했다. 이 외에도 문중 사람들과 관련된 일이나 편지의 전달 여부 등을 적은 내용이 상세히 적혀 있다. 남평(南平)에서 돈을 빌려 달라고 요구하였으나 이는 공전(公錢)이기 때문에 난감하다는 내용, 소산(小山)의 일은 마치 땅에 떨어진 지푸라기를 줍는 것처럼 쉬운 일인데도 어찌 이렇게 늦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고 아쉬움을 토로한 내용, 영변찰(寜邊察) 쪽으로 편지를 썼는지, 경재(耕齋) 집안으로 자주 편지를 보내고 있는지, 완순군(完順君) 이재완(李載完)에게 신경을 쓰고 있는지 확인한 내용 등이 보인다. 또 족보의 판각 여부를 묻고 족보를 부록(簿錄)할 수 있으면 적어서 알려달라고 한 내용, 150냥에 대한 것은 장수 집안과 의견이 다르다고 내용, 이씨(李氏) 친우 편으로 편지를 부친다는 내용 등이 실렸다. 이승학(1857∼1928)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이며, 자는 자화(子和), 호는 청고(靑皋)이다. 전남 담양(潭陽) 장전리(長田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인 진사 이최선(李最善)이고, 이승학 본인도 기정진의 문하에서 배웠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팔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집으로 ?청고집(靑皋集)? 4권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