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3년 포충사 유사(褒忠寺 有司)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崇禎六年十月十五日 畓主 自筆 學生 朴思遠 褒忠寺 有司 崇禎六年十月十五日 朴思遠 褒忠寺 有司 朴思遠[着名], 朴思道[着名], 高傅敏[着名] 전남도청(2019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633년 10월에 박사원(朴思遠)이 포충사(褒忠祠) 유사(有司)에게 작성해준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633년(인조 11) 10월 15일에 답주(畓主) 박사원(朴思遠)이 포충사(褒忠祠) 유사(有司)에게 논을 팔면서 작성해준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박사원은 이거(移居)할 계획으로 폐성(廢城) 내 대전(代田)을 매점(買占)하기 위해서 처가로부터 상속받아 갈아먹던 유등곡리(柳等谷里) 지평(旨坪)에 있는 담자답(淡字畓) 20부 3속 볍씨[稻種] 7마지기[斗落只]를 포충사 유사에게 정목(正木) 50필을 받고 팔았다. 이 거래에는 증인(證人)으로 박사도(朴思道)와 고부민(高傅敏)이 참여해 문서를 작성하였다. 증인으로 참여한 박사도(朴思道)는 박사원의 동생이고, 고부민은 박사원 처가 오촌숙(五寸叔)이다. 이 밖에 포충사 관련한 문서로는 1614년 광주목 입안, 1622년 광주목 입안, 1627년 광산현 입안이 있다. 박사원(朴思遠)은 본관이 충주이고, 아버지는 박시영(朴時英)이며 눌재(訥齋) 박상(朴祥)의 후손이다. 배우자는 장흥고씨이다. 박사도(朴思道)는 본관이 충주고, 아버지는 박시영(朴時英)이며 형은 박사원(朴思遠)이다. 고부민(高傅敏, 1577~1642)은 자가 무숙(務叔)이고, 호가 탄음(灘陰)이며, 본관은 장흥이다. 어려서는 강항(姜沆)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김장생(金長生) 문하에서 성리학에 몰두하였다. 1627년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삼종인 고부립(高傅立), 종제인 고부필(高傅弼) 등 동지 수십 인과 호남의병장인 재종숙 고순후(高循厚)의 막부에 들어가 군량을 모으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병자호란 때에도 동지 오천여명을 규합하고 군량을 모아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중 청주에 이르러 정부의 강화로 적이 퇴거하였다는 말을 듣고 통탄하며 향리에 돌아와 은거하면서 시를 읊어 뜻을 보이며 여생을 보냈다. 포충사는 의병장 고경명(高敬命, 1533~1592)과 고종후(高從厚, 1554~1593)·고인후(高因厚, 1561~1592) 3부자와 유팽로(柳彭老, 1544~1592), 안영(安瑛, 1564∼1592) 등 5위를 배향한 사우이다. 1601년(선조 34) 호남 유생들이 광주 제봉산(霽峯山) 아래에 사당을 건립했고, 1603년(선조 36)에 박지효(朴之孝) 등 문인과 후손들이 사액을 청해 '포충(褒忠)'이란 액호를 받았다. 포충사는 사액 사당으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 때에도 장성의 필암서원과 함께 훼철되지 않았던 사우이다. 명문(明文)이란 어떤 권리를 증명해 주는 문서로 흔히 토지와 노비, 가옥 등을 매매하는 문서명으로 쓰인다. 토지매매명문은 파는 사람이 작성하여 사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체로 매매 연월일과 매수자(買受者), 매도사유(賣渡事由), 매도물(賣渡物)의 소재지, 양안상(量案上)의 자(字) ․ 번(番), 결부(結負), 복속(卜束)과 두락(斗落), 배미[夜味] 등 매매 대상물의 정보와 가격, 그리고 매도인(賣渡人)[財主], 필집(筆執), 증인(證人) 등이 기록된다. 그러나 시대와 작성하는 사람에 따라 이들 가운데 일부가 생략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