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천주(朴天柱) 묘표(墓表) 고문서-시문류-묘문 개인-전기-묘문 成均進士德殷 宋哲憲 [19세기 말~20세기 초] 宋哲憲 전남도청(2019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송철헌(宋哲憲)이 찬술한 주부(主簿) 박천주(朴天柱)의 묘표(墓表). 성균진사(成均進士) 송철헌(宋哲憲)이 찬술한 주부(主簿) 박천주(朴天柱, 1578~1650)의 묘표(墓表)이다. 문서의 제목은 '주부박공묘표(主簿朴公墓表)'라 하였으며, 작성 시기는 송철헌이 사마시에 합격한 1888년 이후로 추정된다. 송철헌은 문서에서 묘표를 작성하게 된 이유를 후손들이 묘도의 비문이 없어 오래되면 자취가 없어질까 하는 걱정으로 박준동(朴俊東)과 박인주(朴仁周)가 자신에게 찾아와 부탁하여 찬술하게 되었다고 한다. 박천주는 화순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호위하던 중 순절한 모봉(茅峯) 박지수(朴枝樹, 1562~1593)의 아들이다. 묘표의 내용에 따르면 박천주는 자가 경국(擎國)이고, 호가 회재(悔齋)이며, 본관은 밀성(密城)이다. 효자로 10세 때 부모를 잃고 6년 동안 거려(居廬)하면서 날마다 성묘할 때 북쪽을 바라보며 부르짖으며 눈물을 흘려 계석(階石)이 젖으니 세상에서 망북현(望北峴) 쇄루암(灑淚巖) 효자리(孝子里)라고 불렸다고 하였다. 그는 임천(林泉)에 은둔하며 다만 선무랑예빈시주부(先務郞禮賓寺主簿)를 받았고, 1578(선조 11)년에 태어나 1650년(효종 1) 73세의 나이로 마쳤으며, 묘는 능주(綾州) 벽산촌(碧山村)에 있다. 배우자는 광산김씨(光山金氏) 손세(孫世)의 딸이고, 세 명의 아들 소수(素壽), 성소(成素), 종소(宗素)를 낳았다. 박천주는 효성(孝誠)이 순독(純篤)하고 효사(孝思)가 어긋나지 않았다고 하며, 사후 200여 년 뒤에 유론(儒論)이 일어나 조정에 글을 올려 정려의 표창을 받았다고 하였다. 찬술자인 송철헌(宋哲憲, 1870~1924)은 송시열(宋時烈)의 후손으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원명(原明), 호는 지재(止齋)이다. 아버지는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이고, 어머니는 전주 이씨이다. 1870년 5월 27일에 심석재(心石齋) 송병순(宋秉珣, 1839~1912)의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출계하여 송병선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1888년 2월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문집으로 『지재집』 13권 3책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