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이광수(李光秀)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癸丑六月二十二日 子 光秀 父主前 上白是 癸丑六月二十二日 李光秀 李承鶴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13년 6월에 이광수(李光秀)가 아버지 이승학(李承鶴)께 안부를 전하고 아들 혁(爀)의 학업 소식을 전한 내용의 간찰. 1913년 6월에 이광수(李光秀)가 아버지 이승학(李承鶴)에게 안부를 전하고 아들 혁(爀)의 학업 소식을 전한 내용의 편지이다. 일전에 박참봉(朴參奉) 편으로 드린 편지는 받아 보셨는지 확인하면서 편지를 열었다. 장맛비가 지루하게 계속되는데 근래 건강은 괜찮으신지, 이질(痢疾)의 남은 증상은 완쾌되셨는지 걱정하며 마음을 담아 안부를 상세히 여쭸다. 이어 이광수 자신의 안부를 전했다. 자신은 잘 먹고 자면서 아픈 곳 없이 잘 지내고 있으며, 아들 혁(爀)이는 방학(放學)을 맞아 교사가 집에 돌아가고, 신씨(申氏) 학생도 집에 돌아가서 도와주는 이 없이 무료하게 지내고 있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해남(海南)의 의관(議官) 민경호(閔慶鎬)의 자제와 함께 해남 백포(白浦)로 보냈다고 전하고, 혁이가 백포에서 5~6일 동안 머물다가 고향 집으로 돌아가 할아버지를 뵐 것이라고 하였다. 이어 혁의 학업에 대한 진척 정도를 알려 드렸다. 아들이 점차 향학(向學)하는 법을 알아서 올해 안에 한어(漢語)를 터득하기로 약속했고, 내년에는 영어 공부를 할 계획을 세웠다고 하며, 앞으로 4~5년간 전력으로 공부하면 학업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하였다. 또 학비(學費)를 마련하는 것은 비록 곤란한 문제지만 교육은 일평생 무애한 것이니 생계도 그중에 있을 것이라고 다소 여유 있는 태도를 보였다. 추신에 아들 이름을 '혁(爀)'으로 개정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혁의 아명은 병노(丙老)이다. 이광수(1873~1953)의 호는 옥산(玉山), 자(字)는 미중(美中)이다. 부인 죽산안씨(竹山安氏)와의 사이에 외아들 혁(爀, 1898~1977)을 두었다. 노사학파의 일원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이다. 1900년에 경의문대(經義問對)로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로 되었으며, 계몽운동가인 양한묵(梁漢黙) 등과 교유하면서 신학문에 뜻을 두고 개화(開化)에 앞장섰다가 송사에게 파문(破門)을 당하기도 했다. 일제의 강제 병합을 목격하고 고향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