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이광수(李光秀)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戊申十一月初八日 子 光秀 父主前 上白是 戊申十一月初八日 李光秀 李承鶴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08년 11월에 이광수(李光秀)가 아버지 이승학(李承鶴)께 안부와 여러 가지 소식을 전한 간찰. 1908년 11월에 이광수(李光秀)가 아버지 이승학(李承鶴)께 안부와 여러 가지 소식을 전한 편지이다. 먼저 창평군(昌平郡)의 거원(擧員, 과거에 응시하는 인원) 편으로 편지를 받아 안부를 알게 되어 다행이라고 전하고 아버지와 식구들의 안부를 두루 물으며 편지를 열었다. 이어 본인의 안부 및 조정과 관련된 소식을 알렸다. 자신이 맡은 일이 기포(飢飽)와 관련된 것이라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 일을 지루하게 처리하고 있다고 하고, 직을 내려놓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고 하였다. 이어 양원(陽園) 신기선(申箕善)과 관련된 사항에 대해 언급했다. 즉 회의의 총재(摠裁)인 신기선과 간동(諫洞, 현 서울시 종로구 사간동 일원) 대감의 말은 헛된 것이 아닌 믿을 만한 것이라고 하는 등 조정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논한 구절이 보이나 사건이나 이름 등이 생략되어 있어서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 이어 이광수는 과거 시험과 관련된 담양군(潭陽郡)과 창평군(昌平郡)의 갈등에 대해 대략적으로 언급하며 자기 생각을 전했다. 창평군(昌平郡) 거원(擧員, 과거에 응시하는 인원)들이 하방(下房, 곁채)으로 옮겨와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이들의 시험과 관직의 주선 문제, 고향의 중론(衆論)이 모이지 않고 있다는 내용, 담양과 창평 사이의 갈등이 있다는 내용, 우리 전주이씨 가문의 뜻은 모두 창평군에 있다는 내용, 아버지 이승학과 소파(小坡)ㆍ죽오(竹塢) 숙부 사이의 감정이 있다는 내용, 시비를 다투지 말고 담양과 창평을 각자 인정해 달라는 내용 등이 보인다. 이 편지 내용으로 보았을 때 국가가 주체하는 시험에서 지역 배분에 대한 갈등이 있었던 듯하나 자세한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다. 편지 끝에 교사를 구하고 있으나 월급이 30원이라 떠나지 못하고 있으니 날을 헤아려 내려가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하였다. 추신으로 ?지지(地誌)? 상ㆍ하권, ?사략(史略)? 단권, ?옥편(玉篇)? 단권을 살펴서 받아주시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광수(1873~1953)의 호는 옥산(玉山), 자(字)는 미중(美中)이다. 부인 죽산안씨(竹山安氏)와의 사이에 외아들 혁(爀, 1898~1977)을 두었다. 노사학파의 일원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이다. 1900년에 경의문대(經義問對)로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로 되었으며, 계몽운동가인 양한묵(梁漢黙) 등과 교유하면서 신학문에 뜻을 두고 개화(開化)에 앞장섰다가 송사에게 파문(破門)을 당하기도 했다. 일제의 강제 병합을 목격하고 고향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