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김재한(金在漢)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癸酉梧秋念七 服弟 金在漢 癸酉梧秋念七 金在漢 李光秀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33년 7월에 김재한(金在漢)이 이광수(李光秀)에게 안부를 전하고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에 선조가 배향된 일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한 간찰. 1933년 7월에 김재한(金在漢)이이광수(李光秀)에게 안부를 전하고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에 선조가 배향된 일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한 편지이다. 피봉을 통해 개성부 숭양서원(崧陽書院) 안에 있는 두문동서원 창건사무소(刱建事務所)에서 근무하는 이광수에게 전북 남원의 두동면 영촌마을에 사는 김재한이 보낸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름에 서로 길이 어긋나서 만나지 못해 아쉬웠는데, 보내준 편지로 안부를 확인하게 되어 위로되었다는 말로 편지를 시작했다. 보내준 편지는 청량함이 가득한데다가 금강산의 기운까지 가지고 있다고 하며 얘기를 이어갔다. 예전에 김재한 본인도 금강산을 유람한 적이 있었는데, 자신은 속인의 눈으로 보았으나 이광수는 신선의 안목을 지녔기 때문에 그 산의 진수(眞髓)를 얻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 기성(箕城, 평양)과 송경(松京, 개성)의 풍물을 두루 보고서 옛날을 회상하고 지금을 슬퍼하는 마음이 더욱 절절하지는 않았는지 물어, 자신이 느낀 서글픈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편지는 두문동서원과 관련된 내용으로 이어졌다. 김재한의 선조께서 개성의 표절사(表節祠)에 배향되셨는데,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이 사우가 훼철되어 한이 되었는데, 새로 서원을 신설한다고 하니 어찌 분주히 이 일을 따르지 않겠느냐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 이광수가 서원을 건립하는 과정에서 보인 정중한 태도는 현인을 위하는 정성과 그 후손을 대우해 주시는 깊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고, 어찌 이 일을 관례대로만 할 수 있겠느냐며 직접 뵙고 감사함을 전하겠다고 하였다. 지금 자신은 다리에 부종이 생겨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데, 점차 호전되면 일간에 찾아뵐 계획이라고 전하며 넓은 마음으로 헤아려 줄 것을 부탁하며 편지를 마쳤다. 두문동서원에 배향된 김재한의 선조는 김충한(金沖漢)이다. 그는 고려 때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통경(通卿), 호는 수은당(樹隱堂)이다. 고려말 봉익대부(奉翊大夫)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냈다. 남원군 송동면(松洞面) 두신리(杜新里)에 신도비(神道碑)와 세거비(世居碑)가 있으며, 송동면 두곡리(杜谷里) 두남사(杜南祠)에 배향(配享)되었다. 표절사는 두문동 72현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고려가 운이 다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김충한을 위시한 임선미(林先味) 등 70여 명이 벼슬을 버리고 개성 만수산(萬壽山)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는데, 세인은 이들을 두문동 72현이라 하였다. 1740년 영조가 개성을 행행(行幸)할 때 두문동의 유래를 듣고 비석을 세워 주었으며, 1783년에 정조가 개성에 표절사를 세워 추모하였다. 1822년 개성유수(開城留守) 오한원(吳翰源)이 요청으로 김충한을 두문동의 표절사에 추가로 배향하였다. 이 사우는 1864년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폐지되었다가 1935년 유림에 의해 신설되어 두문동서원으로 명명했다. 이 편지로 두문동서원은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에 사무소를 두고 창건했다는 것과 이광수가 설립과 관련된 일을 맡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광수(1873~1953)의 호는 옥산(玉山), 자(字)는 미중(美中)이다. 부인 죽산안씨(竹山安氏)와의 사이에 외아들 혁(爀, 1898~1977)을 두었다. 노사학파의 일원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이다. 1900년에 경의문대(經義問對)로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로 되었으며, 계몽운동가인 양한묵(梁漢黙) 등과 교유하면서 신학문에 뜻을 두고 개화(開化)에 앞장섰다가 송사에게 파문(破門)을 당하기도 했다. 일제의 강제 병합을 목격하고 고향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