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충효당(忠孝堂) 상량문(上梁文) 2 고문서-시문류-상량문 경제-토목/건축-상량문 孔夫子誕降二千五百七年丙申四月十四日 瑞興 金奎泰 孔夫子誕降二千五百七年丙申四月十四日 金奎泰 전남도청(2019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56년 4월에 충효사(忠孝祠)를 신축하면서 지은 상량문(上梁文) 1956년 4월에 충효사(忠孝祠)를 신축하면서 지은 상량문(上梁文)이다. 표제는 "충효사상량문(忠孝祠上梁文)"이며, 문체는 변려문(騈儷文)으로 작성되었다. 상량문을 쓴 사람은 서흥(瑞興) 김규태(金奎泰)이다. 내용과 형식은 같은 해 같은 날에 후손 박도동(朴道東)이 쓴 충효당상량문(忠孝堂上梁文)과 비슷한다. 박지수(朴枝樹), 부인 노씨(魯氏), 아들 박천주(朴天柱)의 행적을 적고 이어서 사우에 대한 내력을 간단히 서술한 뒤 상량송(上梁頌)을 적고 마지막 부분에 상량한 뒤에 충군친애(忠君愛親)의 도리를 익히고 항상 영백(英魄)이 엄숙히 임함을 생각하여 나라가 좀먹는 것을 끊고 자신의 사사로움을 돌아보고 장차 경박한 세태에서도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적었다. 김규태(金奎泰, 1902~1966)는 본관이 서흥(瑞興)이고, 호가 고당(顧堂)이다. 아버지 김봉운(金捧運)과 어머니 광주 노씨(光州 盧氏) 사이에서 4남1녀 중 장남으로 경북 달성군 현풍 지동에서 태어났다. 율계(栗溪) 정기(鄭琦, 1897~1950)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26세이던 1927년 스승 율계 선생을 따라 전남 구례로 이거하였다. 35세(1936)에 구례군 토지면 금내리에 용암재(龍巖齋)를 짓고 스승의 뜻을 받들어 후생 교육을 시작하였다. 이후 후학 양성과 저술에 주력하다가 1966년 9월 17일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시부(詩賦)와 서예(書藝)를 잘했다. 1970년에 간행된 시문집 ?고당문집?13권이 있다. 충효사(忠孝祠)는 화순군 도암면 벽지리에 자리하며 박지수(朴枝樹)와 아들 박천주(朴天柱)를 배향하고 있는 사우다. 1598년 건립되었고 1868년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 그 후 1924년에 우선 단으로 제향해 오다가 1955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현재 밀양 박씨 문중에서 보존 관리하고 있으며 2001년 7월에 화순군 향토문화유산 제2호로 지정되었다. 박지수(朴枝樹, 1562~1593)는 본관이 밀양(密陽), 자가 무중(茂仲)이고, 호가 모봉(茅峰)이다. 밀양군(密陽君) 박중손(朴仲孫)의 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찰방 박영걸(朴永傑)이고, 아버지는 사맹공(司猛公) 박억서(朴億瑞)이다. 자질이 빼어나고 일찍부터 강개한 뜻이 있었으며, 1580년(선조 13)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합격하였다. 1591년 사헌부 감찰을 제수 받았으며, 동료들 24인과 함께 사헌부에서 서로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시를 지어 주고받았다. 선조가 이를 가상히 여겨 「총마계회도(驄馬契會圖)」를 지어서 주었다. 임진왜란 때 특명으로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호위하여 북도로 피난 도중 적병 수천 명을 만나 삼일간의 접전 끝에 온몸에 상처를 입어 회령에서 순절하였다. 그의 노복이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에 돌아오자 부인 노씨가 남편을 따라 자결하였고, 이 광경을 지켜본 노비 근춘(斤春) 역시 자결하였는데 이에 일문삼절(一門三節)이 배출되었다고 회자되며 이들의 충절이 높이 평가되었다 한다. 부친 사맹공(司猛公)은 83세의 나이로 재산을 털어 군수를 보조하였다. 1869년에 좌승지에 증직되었으며, 1870년에 정려가 내려지고, 1892년에 좌참찬에 증직되었다. 충효사(忠孝祠)에 그의 아들 박천주와 함께 배향되었다. 박천주(朴天柱, 1578~1650)는 자가 경국(擎國)이고 호가 회재(悔齋)이다. 박지수(朴枝樹)의 아들로, 주부(主簿)를 지냈다. 효성과 우애가 독실하였다. 나이 10세에 부모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계속 부모님이 처음 돌아가신 때와 같이 변함없이 하여 주변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였다.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충효사(忠孝祠)에 아버지 박지수와 함께 배향되었다.